[6월의 말] 묘설(猫說) | 장이지 |

[6월의 말] 묘설(猫說) | 장이지 |

jangeasy   인터넷서점에서 책을 한 권 주문했습니다. ‘현실’에 대해 알 필요가 있어서입니다. 그 책을 쓴 노인은 ‘현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려면 우선 ‘반현실’을 알아야 합니다. ‘현실’은 ‘반현실’과의 대비를 통해 그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노인은 ‘반현실’의 준거점으로 ‘이상(理想)’과 ‘꿈’과 ‘허구’를 거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꿈’이란 것은 부분적으로는 ‘이상’에 속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허구’에 가까운 것이기도 해서, ‘이상’과 ‘허구’가 중요한 준거점이 되는 것 같습니다. 노인은 말합니다. 어느 시기까지 우리는 ‘이상’을 위해 살아왔고, 나중에는 ‘허구’를 위해 살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품절인지 모릅니다. 제가 애용하는 사이트에서는 ‘품절’이라고 나오지만, 또 다른 인터넷서점에서는 재고가 있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주문을 했는데, 역시 품절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 책을 보고 싶은 이유는.

    ―제가 좋아하는 라이트노벨에서는 마법사들끼리의 결투가 진행 중입니다. 몇 번이나 읽고 있는 라이트노벨입니다. 이 책의 저자는 이 작품이 라이트노벨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지만, 그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겠지요. 아무튼 마법사가 손가방을 발로 툭, 하고 치자 ‘고양이’가 튀어나옵니다. 이 ‘고양이’는 좀처럼 죽지 않습니다. 고양이는 대개 목숨이 아홉 개쯤은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경우는 딱히 그런 것도 아닙니다. ‘고양이’는 사실 그림자입니다. 그림자는 죽일 수 없지요. 아마 죽일 수 없을 걸요? 더 재미있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이 ‘고양이’가 상대를 집어삼킨다는 것입니다. 그림자가 사람을 집어삼킬 수도 있다는 거, 믿을 수 있습니까? 저는 항상 이 대목에서 이 책을 벽에 집어던지고 다른 일을 합니다. 「다큐멘터리 3일」을 본다든지 합니다.

    ―최하연이라는 키다리 시인이 있습니다. 배구 선수나 핸드볼 선수처럼 생긴 시인인데, 이 사람의 시에는 이상한 고양이가 한 마리 나옵니다. 눈을 꼭 감고, 두 다리를 모은 채 엎드려 있습니다. 시의 제목은 잊어버렸습니다. 『팅커벨 꽃집』이라는 시집에 나오는 시입니다. 그러고 보니 작년의 일이 문득 떠오릅니다. 작년에 저는 학교 일로 서촌 일대에 간 적이 있습니다. 학생들을 데리고 갔는데, 학생들은 무슨 강연을 들으라고 해두고, 저는 서촌 일대를 싸돌아 다녔습니다. ‘팅커벨 꽃집’이 있다고 해서 찾고 돌아다녔습니다. 의외로 대로변에 있어서 금방 찾아버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B 대학교 앞까지 흘러갔다가 어느 카페에 들어갔습니다. 커피를 가져다주는 남자는 조금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마음이 아픈 사람이었습니다. 마음이 아픈 사람은 제가 커피를 반쯤 마셨을 때 집으로 돌아가고 주인장과 하얀 장화를 신은 검은 고양이와 저, 이렇게 셋만 남게 되었습니다. 저는 거기서 『팅커벨 꽃집』을 읽었습니다. 눈치 채셨겠지만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저는 통인시장에서 기름 떡볶이를 먹고 배를 탕탕 두드리며 학생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아, 이상한 고양이 이야기를 하다가 이 지경이 되었군요. 그 고양이는 정말 이상합니다. 그 고양이는 ‘실재’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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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마쓰가와 여고생 살인사건을 배경으로 한 「교사형(絞死刑)」(1968)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고마쓰가와 사건에 대한 재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오시마 나기사(大島渚) 옹의 영화입니다. 이 사건은 열여덟 살 자이니치 소년의 연쇄살인 사건입니다. 소년범이지만, 최고재판소에서 사형이 확정되었습니다. 이 소년이 그런 무서운 범죄를 저지른 것은 어쩌면 일본 사회의 자이니치에 대한 차별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간단하게는 정리되지 않지만, 아무튼 자이니치 사회는 일본 사회 내부의 외부로서 오래 이어져 온 면이 있습니다. 세세히 설명하자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고양이의 손이라도 빌려야 할 정도입니다. 이 영화에 난해하기로 유명한 한 장면이 있습니다. ‘고양이’가 나오는 장면입니다. 현장검증 비슷한 것을 하러 나온 주인공에게 교육부장이라는 형무소 관계자가 설교를 늘어놓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문득 ‘들고양이’를 발견하고 ‘야옹’ 하고 말을 겁니다. ‘고양이’ 쪽에서도 ‘야옹’ 하고 반응을 보입니다. 리버스 숏으로 두 번 반복되는 장면입니다. 형무소 관계자들은 모두 딴 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주인공 소년이 해찰을 한다고 아무도 훈계를 하지 않습니다. 형무소 관계자들은 ‘고양이’를 보지 못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한 사람도 ‘고양이’를 보지 못했다니 신기할 노릇입니다. ‘고양이’는 주인공의 꿈일까요. 사람들이 같은 것을 보지 않으면, 현실을 공유하고 있지 않으면, 그것은 실재가 되지 못하는 수도 있습니다.

    제주도에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서울을 떠나고 보니 저는 점점 투명해지고 있는 중입니다. 저의 문학도 그렇습니다. 저의 문학이 한국문학 전체인지 그냥 저만의 문학인지 깊이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만, 아무튼 문학도 조금은 투명해지고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보았던 것은 허깨비였나, 하고 회의 비슷한 것이 배꼽 밑에서 꾸물거리기도 하는 요즘입니다. 허깨비한테 먹히지 않고 용케 깨어났다고 하면, 그래도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왜 이리 마음이 헛헛한 것일까요? 무엇을 해야 할지 사실 길을 잃었습니다. 꿈도 이상도 없고, 그 결락의 구멍을 막을 허구 같은 것도 제 기능을 잃어버렸다고 해야 할지? 제가 보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함께 보아주어야 다시 육체가 생길 텐데요. 사람들이랑 같은 것을 볼 수 있어야 할 텐데요.

2000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등단. 『안국동울음상점』 등 3권의 시집을 펴냈고, 곧 네 번째 시집 『레몬옐로』가 나올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