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말] 따옴표라는 귀신 | 구병모 |

[5월의 말] 따옴표라는 귀신 | 구병모 |

kubyungmo   작가들은 문장의 종결어미에 찍는 마침표 한 개에까지 의미를 부여하면서 쓰는 게 보통인데 의미란 미학적 신념이나 고유한 의식 내지는 개성, 때론 자존심으로 달리 부를 수 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화자의 심리와 서사의 연결 및 서정의 변화에 따라 마침표의 자리를 말줄임표나 느낌표나 물음표로 대체하기도 하고 심지어 문장이 분명 끝났다고 여겨지는 자리를 다른 부호 없이 비워두기도 한다. 본인이 말줄임표를 찍어놓고선 뭔가 아니다 싶어서 다음번 교정지에 붉은 돼지꼬리로 삭제 표시를 하며 인쇄기가 돌아가기 직전에 변심하여 마침표로 바꾼다. 남들이 보면 편집증이나 신경증에 불과할지 모르는, 부호 안에 담긴 측정 불가능한 심연을 독자는 각자의 기준으로 판독하고 이 과정에서 작가가 심어둔 뜻밖의 이스터 에그를 발견하곤 전율하기도 한다.
    하물며 종결과 생성의 지점이 아닌 미로의 한복판—문장의 한가운데라면, 쉼표의 위치 또한 용의주도한 기획과 섬세한 의도에 따라 최상의 공간에 배치하는 게 당연하다. 내가 쓴 문장을 예로 드는 게 가장 가깝고 편해서 뽑자면:

    이제 알약, 삼킬 줄 아니. (『파과』 中)

    이제 알약 삼킬 줄 아니.
    이제 알약을 삼킬 줄 아니.
    사실상 의미 전달만을 목적으로 하자면 그 어느 쪽을 택했어도 상관없는 한 줄이었으며 오히려 쉼표가 없었어야 깔끔할 수도 있었던 짧은 문장이었지만, 나는 아무런 논리적 근거나 계산에 의하지 않은 채 본능이 시키는 대로 목적격 조사 ‘을’을 빼고 그 자리에 쉼표를 찍었다. 그러고 나니 이 단 한 개의 쉼표는 앞의 이제와 뒤의 삼킬 사이에 굳이 휴지를 둠으로써 인물의 망설임과 측은함과 떨림과 각종 기억의 중첩 및 함축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을 물리치려는 단호함 내지는 냉정함이 깃들인, 부호 자체로 독립적인 의미를 담은 문장이 되었다(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꿈보다 해몽 격으로 깨달았다).
    이렇게 뒤늦은 고찰을 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정작 글을 쓸 적에 나는 이들 부호를 지극히 평범한 용도와 기능에 따라 부리는(뿌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읽다가 숨이 좀 가쁘고 지치네 싶으면 쉼표, 관형어가 어느 절에 걸리는지 헛갈리려나, 최소한의 가독성을 확보하고 구획을 짓기 용도로 또다시 쉼표, 인물이 경악했으니 느낌표, 흐리마리하게 얼버무렸으니 말줄임표 하는 식으로 단순하게. 그러면서 한 페이지에 느낌표가 두 번 이상 들어가면 왠지 절제의 미덕이 없어 보이고 정신 사나우며 느낌표의 본래 목적을 상실하니 특별한 상황(육탄전을 비롯한 재난 재해나, 인물의 광기를 묘사하는 등)이 아니면 금해야지, 정도로 생리적 본능에 가까운 지침을 병용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문단에는 마침표 대신 쉼표를 쓴 부분이 많고 이들을 생략하면 더 아름다울 것도 같네.

    그러던 어느 날, 교정지를 받았는데 마침표 자리에 붉은 표시로 물음표를 대체 기입한 부분이 눈에 띄었다. 오래전인 데다 비슷한 일도 많았다 보니 정확히 무슨 원고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해당 문단이 줄곧 ~습니까. ~인가요. ~할까요. 인물이 거듭 반문하는 대목이었을 것이다. 나는 나름의 구체적인 규준을 성문화한 적은 없으나 아마 인물의 정적인 성격이나 심드렁한 또는 체념적인 태도, 음성의 단조로운 톤을 떠올리면서 그 자리에 마침표를 투척했을 테고, 책을 진행해주신 담당자님은 정확한 한국어 문법 기준에 맞추어 의문문의 자리에 제 쓰임에 맞는 물음표를 아로새겨주신 것이었다. 한참 그 문단을 들여다보는데 세 번 연속 등장하는 물음표들이 신경을 콕콕 찔러왔다. 이 자리에 물음표가 있음으로 해서 인물의 성격이 일관성을 잃지는 않는지, 물음표 자체가 쉼표나 마침표와는 달리 느낌표만큼 물리적인 부피를 차지하다 보니 문장의 흐름이나 인물의 사고가 다급하게 여겨지지나 않을지, 무엇보다…… 그저 아름답지 않을까 봐, 같은 고민이 들었다.
    그리하여 결과는 어떻게 됐는가 하면, 나 자신이 물음표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나, 해당 원고는 독자들에게 선명한 의미와 주제를 실어 나르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하는 것으로 내적 결론이 내려져서 물음표로 가기로 했을 것이다. 그런 거창한 분석은 그 결정으로 인해 내가 작가로서의 무언가를 잃었거나 버렸다는 느낌을 갖지 않기 위해 사후에 이루어졌을 테고, 어쩌면 당시에는 단지 마침표 하나에 유난을 떠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을 수도 있으며, 그 자리가 물음표 아닌 마침표여야만 하는 이유를 스스로에게조차 논리적으로 설득시키지 못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마침 이 글을 쓴 덕분에 당시 나의 미심쩍었던 의도나 불명확했던 감정을 대강 정리할 기회를 얻은 만큼 다음번에는 그렇게 간단히는 접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보편적으로 물음표가 들어가야 맞는 자리에 내가 마침표를 썼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음을 의식하게 됐으니.

    물음표와 마침표 사이를 표류하다 멀리 돌아왔지만 오늘의 진짜 고민은 따옴표이다. 역시 교정 단계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권의 책 안에 실린 여러 편의 소설이 있는데 어느 편은 인물의 대화가 가운뎃줄이라 부르는 전각기호로 등장하고 어디서는 따옴표로 제시되며 또 다른 데서는 부호 자체가 없이 서로 다른 인물의 목소리가 이어지는데, 이들을 좀 통일을 시도해볼까 말까 하는 제안이었다. 그 말을 듣고 원고를 살폈는데, 각각의 단편 안에서는 부호의 쓰임에 나름의 기준과 규칙이 있는 듯했으나, 저마다 다른 잡지와 다른 시기에 집필 수록한 원고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책 전체를 보자면 통일성이 없었다. 그래서 표제작을 기준으로 하여 나머지 예닐곱 편의 원고의 형식을 거기다 맞추는 시도를 했다. 현재 시점의 대화는 큰따옴표(“ ”) 인물의 사고 작용은 작은따옴표(‘ ’) 대과거의 대화를 회상할 때 가운뎃줄(—) 초현실적인 상황에서의 목소리나 의식은 부호 없이 해당 주체가 바뀔 적에 행갈이만, 하는 식이었다. 이 과정에서 따옴표를 대체하는 또 다른 인용부호인 꺾쇠(『』 「」)는 일본의 편집 방식이라는 평소의 강박이 있어 고려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통일하고 나니 갑자기 큰따옴표의 분량이 대폭 늘면서, 분명 그전과 동일한 내용을 담고 부호라는 외피가 추가된 데 불과함에도, 왠지 모르게 소설의 무게가 가벼워지고 인물들의 사고가 튀어 보이는 이상한 일이 생겼다. 한마디로 ‘우아하지 않았다.’ 인물의 상상을 감싼 작은따옴표가 무언가를 강조할 때(‘우아하지 않았다’)도 쓰인 작은따옴표와 용법이 뒤섞이는가 하면, 주요 단락이 기억의 회상인지 화자의 망상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되어버리거나, 때로는 그 분간할 수 없음이 주요 목적인 글에서 현실과 상상의 구역을 분리해야만 하는 상황이 생겼다.
    결국 각각의 소설을 썼던 당시의 마음이 시켰던 대로 개별 부호를 원래 자리로 돌려놓고 진행한 뒤, 나는 따옴표가 많아진 원고를 마주 대했을 때 느낀 왠지 모를 거부감의 근거를 찾기 위해 다른 작가들의 책을 뒤져보았다. 인상 깊게 읽었던, 존경하거나 사랑하는 작가의 소설을, 국내외와 출판사를 막론하고 일별해보았다. 몇몇 작품들에서 현재 시점의 인물 간 대화든 회상이든 생각이든 용도를 가리지 않고 아무런 인용부호가 없다는 점이 두드러지기는 했지만, 한편으론 인물 대사마다 고전적인 큰따옴표가 충실하게 쳐진 작품들도 적지 않았고, 대화에 가운뎃줄을 쓴 대신 인물의 생각에는 부호를 따로 넣지 않은 작품도 있었으며, 대화에 큰따옴표를 쓰고선 생각 부분에는 작은따옴표나 가운뎃줄이 아닌 괄호( )를 쓴 작품도 눈에 띄는 등 방식은 다양했다. 그중 대화에 아무런 부호도 없는 소설과 수많은 큰따옴표가 행마다 나타난 소설을 한 편씩 살피며, 그들을 서로 반대의 방식으로 바꾸었다고 상상해보았다.
    어디까지나 주관적 판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줄표든 다른 무엇이든 이 부분이 인물의 대화임을 알게 해주는 표시가 하나도 없이 최소한의 행갈이만 된 데다 때론 그조차 명확하지 않아 말하는 주체가 종종 뒤섞인 작품에 일일이 따옴표를 넣자, 원래는 고요한 불편을 공유하고 불안을 토로하던 인물들이 순식간에 들뜨고 우악스러워졌으며 무의미한 수다를 목청 높여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되었다. 한마디로 글이 시끄러워졌다고나 해야 할지, 그전보다 육성이 생생해지고 도드라지면서 기품이 사라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대신 그 장면의 원경에 자리했으나 본래는 더욱 부각되었어야 마땅할, 작가가 공들여 주조했음이 틀림없는 초라하고 신산한 배경이나 상황 들은 육성에 압도당하여 소실점 밖으로 밀려났다. 이 모든 변명 같은 횡설수설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괜히 ‘없어 보였다.’
    반대로 큰따옴표가 거의 전 페이지에 걸쳐 등장한다고 볼 수 있는 소설에서 그것들을 빼고 바라봤더니, 구체적인 상황을 표현하고 명료한 이야기를 진행시키던 인물들의 언어가 갑자기 탄력을 잃고 시들더니, 얼핏 뜬구름 잡는 선문답 같은 장면도 없지 않았지만 대부분은 약에 취했거나 혼수상태로 보였다. 직진하던 이야기의 주행 속도가 느려지고 리듬과 활력이 끊어졌다.
    이 착시현상은 어디서 오는 걸까. 아무런 의미도 형상도 없는 색맹검사표에서 기어이 올바른 숫자를 포착하려고 눈을 부릅뜬 사람의 심정이 되어, 나는 따옴표를 붙였다 떼어보기를 반복했다. 어쩌면 그것은 단지 처음 만난 것이 어느 쪽이었느냐에 달린 선입견의 문제에 불과할지도 모르고, 다른 이들이 같은 시도를 했다면 별반 차이를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나는 없는 것, 보거나 듣지 못하면 그만인 귀신이나 다름 아닌 것에, 다만 내가 느낀다는 이유로 집착하는 셈이다.
    글을 쓰기로 작정한 이상 이와 같은 비실용적인 집착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으니, 다만 어디선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동지를 찾아서 한수 가르침을 득하고 싶다. 당신도 나와 같은가. 당신이 어느 글에서 따옴표를 쓰는 이유는 무엇이며 굳이 삭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따옴표 안에는 당신이 생각하기에 어떤 유령이 배회하고 있어, 글을 돋보이게도 하고 없어 보이게도 하는가.

2008년 『위저드 베이커리』로 등단. 소설집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과 장편소설 『아가미』 『파과』 『한 스푼의 시간』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