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칼럼] 엘비스의 찹쌀 도나쓰 |정한아|

(이 모든 것은 팩트이며 전혀 허구가 아니다.)

1982년 봄, 엄마와 아빠와 나, 세 식구가 구반포 아파트에 셋방을 들어 살 때였다. 프로야구가 막 창단되고 MBC 역사드라마 조선왕조 500년 <장희빈>에서 엄마를 닮은 이미숙이 여우 짓을 하면서 강석우 손가락을 물던 시절이다. 어린 엄마는 나를 데리고 밖에 나갈 때면 이모라고 부르라 했다.
– 왜?
– 재밌잖아.
내가 이모, 이모, 부르면 시장 아줌마들이 어머, 조카가 귀엽네요, 하면서 사심 없이 뺨을 꼬집어주었다. 그래서 엄마는 상가에 가면 이국적인 물건들이 잔뜩 쌓인 수입품점 구경하기를 즐기는 발랄한 이모가 되었다. 기분이 좋아진 이모는 길 건너 <독일빵집>에서 소보루나 팥빵을, 그보다 기분이 더 좋으면 찹쌀 도나쓰를 사주었다. 겉은 바삭하고 씹으면 쫀득쫀득한 찹쌀 도나쓰! 한 입 물어뜯으면 오래오래 고소한 찹쌀 도나쓰! 적당히 달콤한 팥 향이 부드럽게 새어나오던 찹쌀 도나쓰! 먹고 나면 입술이 기름에 젖어 반짝거리는 찹쌀 도나쓰!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있다니 찹쌀 도나쓰! 나는 <독일빵집>을 지날 때마다 이모에게 찹쌀 도나쓰를 사달라고 졸라댔다.
– 이모, 나 찹쌀 도나쓰!
– 안 돼.
– 왜?
– 찹쌀 도나쓰를 매일 먹으면 죽어.
– 왜?
– 옛날에 엘비스 프레슬리라는 가수가 있었는데, 찹쌀 도나쓰를 매일 두 개씩 먹다가 동맥경화에 걸려서 죽었어.
아무래도 나는 ‘왜’와 ‘왜냐하면’을 좋아하는 좀 논리적인 어린이였던 것 같다. 설득력이 있다 싶으면 바로 수긍하는 버릇이 그때 생겼다. 미국 가수가 찹쌀 도나쓰 때문에 뭔진 몰라도 동맥경화라는 것에 걸려 죽은 건 사실일 거야. 엄마가 딸에게 거짓말을 할 리는 없으니까. 참, 그땐 이모였지. 아무튼, 맛있는 걸 맨날맨날 먹는 건 분명 해로운 일이야. <독일빵집> 앞을 지날 때마다 진열장 너머 가지런히 놓인,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찹쌀 도나쓰를 보면서 나는 욕망의 괄약근을 꽉 조이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실제로 동맥경화로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그로부터 20년쯤 뒤였다. 그가 매일 두 개씩 먹은 것은 기름에 팔팔 튀겨 시럽을 두르고 고운 설탕가루를 하얗게 바른 커다란 도너츠였다. 당연하지 않은가. 팥을 넣은 동그랗고 쫄깃쫄깃하고 노르스름한 찹쌀 도나쓰를 미국에서 팔았을 리 만무하니까. 하지만 그걸 알았을 때는, <독일빵집> 앞에서 이모가 150원을 아끼려고 들려준 이야기 때문에 폭식에의 욕망을 참으며 끼니때마다 반찬을 시계 방향 순서대로 집어먹는 다소 괴팍하고 재밌는(혹자는 전형적인 강박증상이라고 할) 방식을 계발한 지 이미 한참 지난 후였다.
가장 맛있는 반찬 순서가 되면 저작 속도를 최대한 줄이고 천천히 음미한다. 이 대목이 이 규칙의 백미다. 못되게 구는 사내아이들은 하루에 딱 한 명씩 차례로 손봐주었고 가장 못된 아이는 주먹에 체중을 다 실었다. 30권짜리 소년소녀문학전집과 15권짜리 과학만화전집도 거듭 차례를 지켜 읽었으며 [햄릿], [기암성], [몽테크리스토 백작]에선 읽는 속도를 급격히 줄였다. 한 자 한 자를 꼭꼭 씹어야 했던 것이다. 특히 마지막 장면들에선 읽는 속도가 자꾸 빨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중간 중간에 멈춰 한숨을 쉬어주어야 했다. 이 이상한 규칙 때문에 무엇이든 셋 이상만 있으면 그중 하나는 거의 반드시 꿀맛까지는 아니어도 먹을(때릴) 만했다. 게다가 편식도 예방해준다. 전에는 싫어하던 것을 좋아하게 되는 의외의 즐거움도 쏠쏠하다. 그러니까 아마 동맥경화에는 걸리지 않을 것 같지만, 포만감보다 만족감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다.
그렇다면, 1년에 한 번쯤은 디오니소스 축제 기간을 만들어서 찹쌀 도나쓰를 하루 종일 양껏 먹어보는 것은 어떨까. 정말로 좋아한 한 사람에게 폭풍 고백을 해보면 어떨까. 몸서리쳐지는 밉고 싫은 악당에게 소포 폭탄 같은 것을 보내보면 어떨까.
음… 생각만으로도 군침이 돌지만 그 하루가 지나면 30년 동안 좋아하던 찹쌀 도나쓰를 미워하게 될 것 같아. 안됐지만, 이 계획은 취소다. 찹쌀 도나쓰가 먹고 싶을 땐, 역시 소보루, 팥빵을 함께 사서 배가 고플 때 딱 한 개씩 먹는 게 좋겠다(찹쌀 도나쓰는 물론 맨 마지막이다).
무엇보다도, 이런 생각을 거의 매일 한다는 게 가장 치명적인 부작용이다. 이젠 <독일빵집>이 폐업한 지도 오래되어서 다시는 그 집 찹쌀 도나쓰를 먹을 수 없게 되었는데 말이다. 짝사랑은 고백을 미루는 사이 백혈병에 걸리고, 악당은 치매에 걸릴 때까지 오래 산다.
그게 정말 동맥경화보다 나은 걸까. 장희빈을 닮은 이모는 사실 엘비스 편이었는데…

(아, 여기서 장희빈은 이미숙이고, 강석우는 숙종이고, 이모는 엄마고, 엘비스는 엘비스인데, 도너츠를 매일 먹고 동맥경화에 걸려 죽은 그 엘비스이고, 도너츠는 찹쌀 도나쓰는 아니고, 동네 빵집들은 점점 망해가고 있고, 악당은 전직 대통령이고, 짝사랑이 누군지는 밝힐 생각이 없지만, 분명 원빈은 아니고, 하지만 원빈을 거의 짝사랑하며, 에, 또, 이 모든 것은 픽션이 전혀 아니라고 하기는 힘들지만 거의 팩트인데, 편식을 권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만, 당신이 조금이라도 그럴 의향이 있으시다면, 이 글이 정말로 무엇에 관한 것인지 한 번만 더 꼭꼭 씹어주신다면…)

[시인 /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