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말] 튀니지 색채 | 김태용 |

[4월의 말] 튀니지 색채 | 김태용 |

kimtaeyong   파울 클레는 1914년 튀니지 여행 중 색채에 눈을 떠 새로운 창조의 세계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강의실 칠판에 쓴다. 썼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면 아무 것도 읽을 수 없다. 당연한 사실이, 모든 사실을 의심할 수 있는 시간이 나를 여기에 붙잡아 두고 있다. 책상을 뒤집는다. 뒤집힌 책상 위에 의자를 뒤집어 올린다. 책상과 의자는 다른 방향을 꿈꿔야 한다. 사물을 계몽시키는 건 볕빛과 포르노그래피다. 손때와 얼굴때. 무릎때와 엉덩이때. 그러나 내가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눈빛때와 침묵때다. 참을 수 없는 것들을 나는 또 얼마나 사랑하는가. 믿을 수 없다. 더 믿을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가 창문을 열고 들어온다. 얼굴만 보면 이제는 사라진 활인화 속 인물 같다. 샌드위치에서 토마토를 꺼낼 때처럼 신중하다. 파울 클레의 튀니지 색채가 돋보이는 것은 아니다. 튀니지 색채라니. 그런 말은 없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쓸 수 있다. 튀니지 색채. 나는 파울 클레의 작품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제대로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제대로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물음표가 사유를 만들고, 사유의 거품을 만들고, 거품은 사라지게 되어 있다. 거품 보다 먼저 내가 사라져야 한다. 나를 따라서 그도 사라진다. 그는 실어증을 앓고 있는 기계체조 선수다. 지금은 살인자로 누명을 쓴 채 자신의 죄를 벗겨내려고 한다. 마음에 든다. 그는 어떤 이야기 속에서 도시와 인간 그리고 범죄와 맞서 싸울 수 있을 것이다. 그 싸움은 실패로 돌아가겠지만 그는 자신의 실어증을 포기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억울함을 증명하기 위해 텀블링을 하면서 도시의 밤을 뛰어다닌다. 뛰어다녀라! 뛰어다녀라! 뛰어다녀라! 뛰어다녀라! 뛰어다녀라! 뛰어다녀라! 뛰어다녀라! 그가 뛰어다니는 사이 나의 뒤에 눈이 달린다. 나의 눈에 그가 보인다. 뛰어다니기 전의 그가 나의 가장 뒷부분에 닿을 듯 말 듯 붙어서 다시 사라지고 있다. 사라진 이후에는 조샌드위치에 앉아 빈혈영화를 구상한다. 그가 영화를 구상할 때 영화는 문학에 가깝다. 문학에 가까운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구상할 때 어떤 색채가 머릿속을 찌른다. 아무 것도 아닌 색채로 만들 것. 허리를 곱게 펴고 어둠에 적응할 것. 주변에 돋보이는 모든 것을 물리칠 것. 좀처럼 적응하고 싶은 어둠이 없고, 물리치고 싶을 만큼 돋보이는 것이 주변에 없다. 망할! 9초 동안의 침묵! 그리고 꽃을 눌러 죽이는 손! 더 이상 실재하지 않는 사변적 색채다. 파울 클레는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튀니지는 말할 것도 없다. 빈혈영화의 끝에서 토성의 고리가 검게 타고 말 것이다. 나는 손을 씻고 옷을 갈아입는다. 그리고 이 글과 다른 방향을 꿈꾸는 글을 찾아 연결시켜 본다. 정확한 밤이다. 예술에 대한 확신을 잃은 사람이, 그게 나라고 할 수 있다면 일찌감치 나는 이 글에서 사라져야 한다, 나의 역할을 물려받을 또 다른 내가 저기서 걸어오고 있다, 언제나 그렇다, 방심하면 끝장이다, 편의상 그라고 불러보자, 내가 그가 되면 걸음의 속도가 달라진다, 3인칭을 두려워 말라, 산문의 십계명 중 하나라고 해도 좋다, 이런 말을 왜 하고 있을까, 풀독이 오른 산문의 언덕을 올라가고 있는 중이다, 나머지 구계명을 얻기 위해서, 물음표 생략, 그는 약간의 진정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 때 애용하던, 입에 넣어 녹여 먹는 진정제는 더 이상 그에게 처방되지 않는다, 그가 이곳에 없었을 때 그러니까 치앙마이의 히피주술사로부터 얻어낸 진정제, 그건 처방이 아니라 공급이라고 해야 될지도 모른다, 아니 그게 맞다, 조르주 바타유의 ‘하늘의 푸른 빛’ 같은 날씨였다, 그는 하룻밤에 두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 그리고 삐쩍 마른 개에게 영혼을 털려 버렸다, 육체의 접촉 없이 가능한 많은 일을 생각했다, 정확하다, 그는 녹녹치 않은 슬픔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차라리 누가 죽었다면, 아니 너무나 많은 사람이 죽었기 때문이다, 그 일에 대해 말할 수 없어 회피하고 있지만 그 일은 계속 그를 불러내고 있다, 이십 이년 전의 일이다, 사 년 전의 일이다, 두 달 전의 일이다, 바로 어젯밤의 일이다, 영혼을 털려 버렸다, 곧 일이 벌어지고 말 것이다, 그는 어떤 굴절된 힘에 의해 오고 있다, 어디로 오는가, 그가 오는 속도, 속도는 그를 묘사하지 못하게 만들고, 묘사의 피곤함과 허약함, 그리고 알 수 없는 열기를 느끼게 한다, 포스트 아열대의 열기를, 그의 걸음걸이는 이제 막 일을 마친 조수처럼 힘없이 여유롭다, 그러니까 그는 계속 오고 있지만 도착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제 막 일을 마친 조수처럼 힘없이 여유로운 사람은 없다, 그가 없는 사람이 될 수 있는 확률은 희박하다, 그럼 이건 어떤가, 그는 어떤 시의 한 대목과 참을 수 없는 엉덩이 하나를 떠올린다, 백남준은 맞고 존 케이지는 틀렸다, 무엇 때문인가, 정확함 때문이다, 술을 한 잔 해도 좋을 시간이다, 그래 한 잔 하자, 그는 한 잔 하지 않는다, 누가 좀 가져다주면 좋으련만, 조수 같은 사람이 있다면, 머리에 모자를 걸어두고 싶은 조수가 있다면, 그는 조수들의 봉기로 온몸이 찢겨져 톱밥가루에 섞여 오리밥이 되고 말 것이다, 그는 오면서 고개를 숙인다, 그만 물러나고 싶다는 뜻이다, 밤은 아직 정확한데, 아름다운 글은 여기에 없다, 없는 것 때문에 그는 집을 나와 떠돌다 언어의 직격탄을 맞고 운율을 잃은 시인이 되었다고 한다, 믿을 수 없는 말이다, 한 잔이 온다, 빈 잔이다, 빈 잔을 마셨을 뿐인데, 시간이 흘렀고 계속 오고 있는 그는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니 그의 말을 믿어 보기로 하자, 믿는 척 하고 있다는 것을, 믿기 어렵다, 너나할 것 없이 운율을 잃은 시들을 쓰고 있지만, 밤에 취하거나, 잠에 취하거나, 사랑이라는 차가운 불에 손을 대고 나면 아주 잠시 나마 운율을 회복해 노래하듯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건 입에서 서서히 녹는 리듬과 무관하다, 이쯤 되면 나는 그와 너무 멀어지고 그를 더 괴롭혀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가 나를 괴롭히게 되겠지만, 정확한 밤하늘 아래 오늘은 여기까지다, 또 다른 오늘은 유령이나 진흙에 맡기자, 한 잔이 가벼운지, 빈 잔이 가벼운지, 다시 예술로 돌아가자, 망할, 9초 동안 돌아가고, 이제 남은 것은 문학에 가까운 빈혈 영화. 파울 클레는 1914년 튀니지 여행 중 색채에 눈을 떠 새로운 창조의 세계로 들어갔다고 한다. 믿을 수 없다. 믿을 수 없는 것을 기억하고 기록한다. 그리고 다시 연결한다. 메레디스 몽크와 진은숙이 튀니지 색채가 흘러내리는 스코어를 들고 걸어오고 있다. 사라진 활인화 속 전기 올빼미 장존삽이 새벽 창문을 뚫고 날아간다. 정확한 밤이었다. 나는 나를 따라다니는 음악이다.

소설가. 1974년 서울생. 2005년 『세계의 문학』을 통해 등단. 소설집 『풀밭 위의 돼지』 『포주 이야기』와 장편소설 『숨김없이 남김없이』 『벌거술이들』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