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칼럼] 예술은 아랑곳없이 |이수명|

올해 초등학교 6학년이 되는 큰 아들이 작곡을 시작한 건 작년 초였다. 처음엔 어쩌나 봐야지 하는 호기심에, 그리고 뭐, 나쁜 건 아니니까, 하고 다분히 방관자 연하며, 한번 해 볼래 한 것이었다. 아이는 어렵고 딱딱한 이론 책을 지루해하며 좀 보더니 곧 날아갈 것 같은 음표들을 오선지에 그려 대며 이른바 곡이란 것을 만들어 댔다. “My Sky”라는 첫 곡이 만들어진 작년 여름만 해도 나는 덜컥, 얘가 진짜 작곡가가 되면 어떡하지? 하고 혼자 허황된 근심을 하다가, 아이가 장난 반, 재미 반으로 그러는 것이 게임하는 것보단 나으니까, 하는 심사로 곧 평정을 되찾곤 했다.
그렇게 해서 “Picnic”, “Blue Hat”, “Orange House”, “Memorize” 같은 곡들이 만들어졌다. 아이가 맘에 안 드는 부분을 지우개로 날려 버릴 때마다 나는 옆에서, 지우지는 말고 다른 페이지에 해라, 지워진 동기가 언제든 다시 살아날 수가 있는 것이니 어쩌구 하면서 괜히 참견을 했다가, 그것들은 쓰레기에요, 하는 핀잔이나 듣기 일쑤였다. 그리고 아이가 한 곡을 떠올렸다가도 그 곡을 끝내기보다는 이내 다른 곡을 불러들이거나 두 곡을 대결시켰기 때문에, 그러다가 심사가 뒤틀리면 둘 다 청산해 버렸기 때문에, 나는 바닥에 떨어진 종잇조각들을 집어 들고 이걸 버려야 하나, 어디에 끼워 두어야 하나 하고 문외한의 고민을 만끽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저녁 아이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요, 너무 힘들어요, 할 때는 갑자기 가슴이 서늘해졌다. 생각이 나지 않을 때는 하지 마, 그냥 놀아, 라고 했다가, 처음부터 생각이 나지는 않아, 대개는 생각이 나지 않다가 나는 거야 하고 바꿔 말했다. 아이는 한동안 풀이 죽어 있더니, 나중에 몇 마디를 쓰고 잠들었다. 나는 그 몇 마디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예술이란 무엇일까. 어떤 갈증이기에 이 어린 아이로 하여금 가장 고도의 추상과 가장 긴요한 감정의 날카로운 조응을 맛보고야 말게 한 것일까 생각하면서.
다음 날 둘이 산책을 나갔다. 아이가 먼저 공원을 가고 싶다고 했다. 걸으면서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높고 낮은 목소리, 차량들이 내는 여러 가지 다양한 소리,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들을 계이름으로 바꿔 보라고 했다. 아이는 재밌어 하면서 그 소리들을 되는 대로 음악의 언어로 치환했다. 그래, 거리에서, 이런 것들을 써보면 어떠니, 아니면, 스쳐 지나가는 것들, 이런 건 어때, 가장 가까이 있는 것들을 짧게 스케치해 봐, 아주 조금밖에는 할 수 없는 게 예술일 거야, 했지만 아이는 들었는지, 어땠는지 별 반응이 없었다.
쌀쌀한 기운이 감도는 공원의 벤치에 앉아 아이는 노트를 꺼내 끄적거렸다. 나는 조금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서성거렸다. 처음에는 약간의 감상에 젖었던 것 같다. 글을 쓴답시고 노트를 끼고 혼자 배회하고 다니던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러다가 조금씩 어린 시절의 어떤 느낌들이 되살아났다. 당시 나는 자못 고독했고, 심각했다. 홀로 한 줄 두 줄 적어 내려가며 돌아다니는 동안 모든 게 너무나 막막했고, 마치 심연을 들여다본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아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갑자가 울컥하고, 무언가 뜨거운 게 올라왔다. 하지만 이 예상치 못한 고통이 무언지 정확히 알기는 불가능했다. 마치 숨겨 왔던 어떤 황홀한 현장 같기도 하고, 예술이라는 부질없는 반복에 대한 현기증 같은 것이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 내 안에서 도사리고 있는 그 많은 그림자들 중의 하나가 실체가 되어 튀어나온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면서 도대체 뭐가 뭔지 혼란스러웠다. 나는 천천히 아이 주변을 걸어다녔다. 아이는 나의 이 산만하고 낡아빠진 관념의 포위에 아랑곳없이 너무나 천진하게 새로운 음표들을 날리고 있었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