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말] 나는 못난이 | 김대산 |

[2월의 말] 나는 못난이 | 김대산 |

kimdaesan―분리의 문제를 중심으로

   숨이 안 쉬어지면 재빨리 내릴 마음의 준비를 한 뒤, 버스를 탔다. 어디선가 들어본 노래가 라디오에서 나온다.

   해도 잠든 밤하늘에 작은 별들이
   소곤대는 너와 나를 흉보는가봐

   이게 누구 노래지? 유심초인가? 아니지…

   저렇게 많은 별들 중에
   별 하나가 나를 쳐다본다

   뭐, 대충 그렇게 시작하는데…
   아직까지는 숨이 잘 쉬어진다고 생각하면서, 그 노래를 속으로 따라갔다. 하지만 내 옆자리의 누군가(어떤 술 취한 아저씨)는, 나보고 들으란 듯이, 겉으로 따라가고 있었다. 마치 나도 부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미소 짓는 그 입술이 하도 예뻐서
   입 맞추고 싶지만은 자신이 없어
   누군가가 요놈하며 나설 것 같애
   할까 말까 망설이는 나는 못난이

   그 대목에서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곧바로 웃지 말라는 경고의 목소리가 속에서 들리고, 표정이 굳어지며, 갈등이 일어난다.
   뭐가 웃겨? 왜 웃어? 웃음이 나오냐?
   웃는 것도 죄냐?
   상황에 따라서는.
   그럼 울기라도 할까?
   아니, 웃지도 말고 울지도 마. 근엄한 표정이나 초연한 표정이나 무심한 표정이나 냉담한 표정이나 진지한 표정을 단절 없이 지속시켜! 하여간에 속의 운동이 겉의 형태로 금방 드러나게 놔두지 마!
   어떻게?
   속과 겉을 분리시켜! 그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속한 근대적 의식의 역사적 요구야!
   햐아, 진짜 못났네, 못났어, 못났다…
   누가, 어째서 못났다는 거야? 나? 아니면, 너? 아니면, 우리?
   어쩌면.
   그래? 우리가 어째서 못났다는 거야? 뭐가 문제야?
   단절이냐 지속이냐, 분리냐 결합이냐, 그게 문제야.
   야 임마! 그런 양자택일적 문제제기 자체가 이분법적 사고방식에 근거한 부적절한 물음이잖아!
   아, 그러셔, 그런데 어쩌지, 우리는 이분법적 사고를 할 수밖에 없게끔 되어 있는 걸. 구조적 체계가 결국에는 그렇게 되어 있다고들 하네. 진보냐 보수냐, 물질이냐 정신이냐, 과학이냐 종교냐, 진화냐 창조냐 등등처럼 말이야. 그러니까 우리는 이를테면 이 순간 단절의 편에 선 바슐라르냐, 지속의 편에 선 베르그송이냐, 선택해야 해.
   왜 그래야 하지? 바슐라르는 지속을 제외한 베르그송의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고 말했다고 들었는데.
   음, 그러니까 그게 좀 이상한 건데 말이야. 너 같으면 단팥을 빼고 단팥빵의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니? 단팥빵의 핵심은 단팥이며, 단팥을 뺀 순간, 그러니까 단팥과 빵을 분리한 순간, 단팥빵은 더 이상 단팥빵이 아닌 데 말이야. 아무튼 이건 좀 정태적이고 고체적인 비유라 적절치 않은 것 같기도 하다만은. 그래서, 다르게 말하자면, 지속이란 게 가령 살아있는 불같은 물, 그러니까 인체 내부에서 인체의 삶을 가능하게 해주며 부단히 흐르고 있는 따뜻한 온기를 지닌 피 같은 거라서 인체의 생명을 빼앗는 일 없이는 그걸 모조리 빼내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겠네.
   음, 하긴 좀 그렇긴 하네. 마치 집단 무의식의 원형을 뺀 융의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고 말하는 것처럼, 혹은 절대정신의 변증법을 뺀 헤겔의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고 말하는 것처럼, 혹은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주관의 형식을 뺀 칸트의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고 말하는 것처럼, 혹은 이데아를 뺀 플라톤의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고 말하는 것처럼, 혹은 상상력을 뺀 바슐라르의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고 말하는 것처럼, 혹은 존재를 뺀 하이데거의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고 말하는 것처럼, 혹은 구조를 뺀 구조주의의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고 말하는 것처럼, 혹은 질량보존의 법칙을 뺀 라부아지에의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고 말하는 것처럼, 혹은 지동설을 뺀 코페르니쿠스의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고 말하는 것처럼, 혹은 상대성을 뺀 아인슈타인의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고 말하는 것처럼, 혹은 진화를 뺀 다윈의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고 말하는 것처럼, 혹은 돈 키호테를 뺀 세르반테스의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고 말하는 것처럼, 혹은 예수를 뺀 기독교의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만! 그만! 재미 들렸냐? 언제까지 그렇게 무례한 반복만 할 참이냐? 넌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사는 거냐?
   정신? 너 지금, 정신, 이라고 했냐? 내게 정신이 있기라도 하다는 거냐?
   그럼? 정신이 없거나 나가기라도 했냐? 넌 정신없는 놈이거나 정신나간 놈이냐? 나간 정신은 언제 돌아오냐?
   그래, 난 썩어빠진 정신머리를 가진 못난이야.
   정신이 어떻게 썩어? 썩은 정신을 본적이라도 있어? 더 이상 살아있지 않은 부패한 시체 같이 썩은 물리적 신체를 봤으면 몰라도. 정신이 썩는 게 아니라 정신과 분리된 물리적 신체가 썩는 거라고 말해야지. 삶은 정신과 신체가 결합된 거야. 죽음은 그 둘이 분리되는 과정이지. 그래서 정신과 분리된 물리적 신체는 부패와 해체의 과정을 거쳐서 물리적 자연의 세계로 돌아가는…
   야! 그건 그냥 전근대적이고 비과학적이고 원시적인 세계관 같은 거잖아! 또 자연과 정신, 물질과 마음, 신체와 영혼 같은 화해되지 않는 대립적인 두 원리적 요소들로 구성된 이분법적인 이원론을 주장하는 것이기도 하고 말이야.
   그게 무슨… 난 단지 나타난 현상의 경험을 이해하려고 했을 뿐이야. 살아있는 신체성 자체의 경험이 실체적인 이분법을 극복하고 있는 관계적인 이원론적 현상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건데… 자, 그러니까, 우리의 문제는 말이지… 실체-속성 도식에 입각한 스피노자의 자연주의적인 실체적 일원론이나, 그와 유사한 욕망을 보여주는 절대성의 철학이나, 자연과학적인 유물론이나 일종의 광신적인 유심론이 함축하는 환원적 일원론으로는, 화해되지 않는 이원론적 긴장과 투쟁에서 오는 불만족을 해결할 수 없다는 거야. 그렇다고 헤겔이나 들뢰즈나 화이트헤드 같은 철학자들처럼 우주의 거의 모든 것을 포괄하고자 하는 사변적 개념의 체계를 구성한다고 그런 불만족이 해소될 것 같지도 않고. 물론 그렇다고 모든 과학적 이론들과 철학적 사변들이 무의미하다는 건 아니야. 그건 분명 특수한 재능과 영감과 노력을 통해서 나온 것이고, 너나 나 같은 못난이가 감히 비판하기 어려운 귀중한 작업들이고, 우리 각자가 고유하게 경험한 현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야! 그래서 결국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요점은 너나 나나 못난이라는 거 아니야? 그러면 다 같이 조용히 있는 게 최선인 것 같은데, 안 그러냐? 괜히 뇌만 피곤하게 하지 말고, 진전되지 않고 제자리에서만 맴도는 뇌의 생각을 멈추고 나는 못난이나 계속 부르자.
   뇌의 생각이라고? 그건 무슨 억지스런 표현이야? 내가 생각하지 뇌가 생각해? 내가 뇌야? 차라리 생각이 생각한다거나 뇌와 결합된, 아니 뇌에 결박된 내가 생각에 참여한다고 말하는 게 더 설득력 있게 들리는데?
   야, 너, 점점 비과학적인 선입견들을 드러내고 있는 거 아냐? 다 과학적으로 검증된 애기래.
   아니 그걸 무슨 수로 검증해. 생각이 무엇인지는 생각을 통해서만 알 수 있어. 남의 뇌에 실험적 조작을 가하거나 해부학적 관찰을 통해서 우리의 정신활동이 뇌의 활동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애당초 위험한 오류야. 우리의 모든 정신적 활동들과 내용들이 뇌 속에, 물리적 신체 속에 한정되어 있다는 주장은 그 어떤 외적인 관찰과 실험을 통해서도 검증될 수 없어. 그건 마치 TV의 여러 채널을 통해 나오는 영상의 발원지나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타인의 목소리의 진원지가 TV나 전화기 자체 속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아. 뇌가 생각한다고 생각하든, 내가 생각한다고 생각하든, 미지의 그것이 생각한다고 생각하든, 아무튼 다 결국 살아있는 자기의식과 함께해야만 가능한 생각이야. 그러니까 그 모든 서로 다른 주장들에 선행되어야 할 것은 살아있는 자기의식 속에서 생각을 생각하는 일이야.
   야! 임마! 그렇게 최소한의 공부도 없이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로 한가한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까 우리가 요 모양 요 꼴로 살고 있는 거야! 하는 일도 없이 벌써 사십 대 중반이 넘어가잖아! 아니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냐? 나도 아저씨라는 게 실감나네. 뭐 거의 삼십 될 때까지는 공부라는 걸 해본 적도 없다가 겨우 좀 해보려고 했는데 이젠 책을 읽어도 예전처럼 안 읽히고, 역시 공부도 때가 있다는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네. 그래 어차피 눈도 침침하고 머리도 잘 안 돌아가니 생각을 생각하는 일이라도 해라. 그런데 뇌 없는 생각이라… 그게 가능하려면 제정신으로 살아있는 상태에서 뇌를 밖으로 꺼내놓고도 생각할 수 있든가, 아니면 우리가 제정신으로 살아있는 상태에서 뇌 밖으로 나가서 생각할 수 있든가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그러니까, 음…
   무슨 말? 왜 빨리 말 안 해? 빨리 말해!
   음… 아까 내가 삶은 정신과 신체가 결합된 거라고 했지?
   그랬었냐? 요즘은 기억이 가물가물한 것 같아… 그런데 그게 왜?
   그러니까 살아있는 모든 존재 속에서 정신적 극과 신체적 극이라는 양극성이 상호침투하며 자기 형성적 활동을 하고 있다고 보는 거지. 그런 이해 속에서 보면 식물, 동물, 인간 사이에는 분명 어떤 단절들이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생명현상의 연속성이 있어. 서로 공유하고 있는 게 있다는 거야. 그 질적 양태는 다르겠지만. 물론 식물이 갖지 못한 것을 동물은 갖고 있고, 또 동물이 갖지 못한 것을 인간은 갖고 있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꼭 동물이 모든 면에서 식물보다 우월하다거나 인간이 모든 면에서 동물이나 식물보다 우월하다고 말할 수는 없어. 가령 생존욕구와 관련된 특정한 감각능력들, 예컨대 후각능력에서는 인간이 개코를 따라갈 수 없고, 시력에서는 매의 눈을 따라갈 수 없겠지. 아마도 인간은 특정 감각기관에 기초한 감각능력의 증대 쪽으로 사용될 수도 있는 잠재적 형성력을 뇌 기관에 기초한 지성능력의 증대 쪽으로 사용한 건지도 몰라…
   아니! 그래서 그게 뇌 밖으로 나가서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이랑 무슨 상관이라는 거야?
   음… 그러니까, 그게… 내가 뭘 어떻게 말하려고 했지?
   야! 너 할 말 없으니까 괜히 말 돌리는 거 아니야!
   좋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좋아! 빨리 말해!
   막상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려니까, 그게 내 맘대로 안 되네… 그러니까, 애당초 하려던 말은 식물의 식물성이 여기서 무언가 핵심적인 단서를 제공한다는 거였는데… 그러니까 식물이 동물이나 인간보다 어떤 의미에서 더 나은 면이 있다는 건데… 그러니까 식물이 흙, 물, 공기, 빛을 통해서 자신을 형성하는 순수한 생명현상을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건데… 또 그러면서도 식물에게는 뇌가 없다는 건데… 그런데 우리의 애당초 전제에 의하면 식물의 삶 또한 정신적인 극과 신체적인 극의 결합이라고 봐야 하고, 그렇기에 하늘과 땅, 빛과 어둠, 위와 아래를 연결하는 수직성을 구현하며 아름답고 평화롭게 자라나 꽃에서 절정을 이루는 식물체의 자기형성적 과정은 어떤 구체적인 정신적 생각이랄까 관념이랄까를 역동적인 균형을 잃지 않는 미적 평온 속에서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건데…
   이건 뭐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인데. 그래서 그게 뇌 밖으로 나가서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과 어떻게 연결되냐고? 그럼 우리가 식물이라도 되어야 한다는 거야? 무슨 수로? 어떻게 자기의식적 식물이 될 수 있어?
   아니, 여기서 중요한 건 식물의 관념인 것 같아. 객관적으로 경험되어야 할 식물의 관념 말이야. 여기서 관념은 객관적 세계에 속한 구체적인 것으로 생각될 수 있어야 하고, 또 여기서 생각의 운동은 그 자체가 객관적으로 관찰될 수 있는 경험이 될 수 있어야 할 거야. 식물의 관념은 식물이라는 객체에 맞서있는 인식주관으로서의 내가 머릿속에 만들어낸 추상관념이 아니라 식물자체의 형성과정 속에 스며들어가 있는 관념이고, 그러한 식물의 관념에 대한 생각을 추동하는 힘은 식물 자체를 형성하는 힘과 그 본질에서 다르지 않은 형성력이라고 봐야 해. 그러니까 그러한 생각의 힘을 상상력이라고 한다면, 그건 나의 주관성에 한정된 능력이 아니라 객관적인, 아니 차라리 보편적인 세계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이고, 서로 분리된 나와 세계를 다시 새롭게 결합시켜줄 수 있는 잠재적 사유능력일 거야. 그런데 아무튼 식물의 관념이 중요한 이유는 그 관념이 또한 빛의 관념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일 거야. 여기서 빛이란 물질과 정신의 애매모호한 경계에 있는 존재야. 그러니까 가령 정신의 빛이란 단지 비유에 그치는 것만은 아닌 셈이지. 식물의 창조적 형성과정에 사용되는 빛을 인간은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식물이 빛의 변형과정을 통해 이산화탄소를 받아서 산소를 주는 광합성, 탄소 동화 작용을 하는 반면에, 왜 인간은 산소를 받고 이산화탄소를 주는 정반대의 호흡활동을 하는 것일까? 혹, 인간은 광합성을 내면화한 게 아닐까? 인간이, 비밀리에, 합법적이든 비합법적이든, 식물의 광합성에 해당하는 어떤 활동을 하고 있거나, 적어도 그럴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창조적 상상력과 연관될 수 있다고 추측하는 것은 너무 비약적인가? 넌 어떻게 생각하니?
   여기서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뭐 비약적이고 안 비약적이고 간에 그 탄소 동화 작용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갑자기 숨이 안 쉬어지는 것 같은데… 대답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빨리 버스에서 내리는 게 급선무야. 나는 못난이도 다 부른 것 같으니까.

평론가. 2006년 『문학과사회』를 통해 등단하였고 평론집 『달팽이 사냥』을 펴냈다. 현재 『쓺-문학의 이름으로』 편집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