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말] 행간의 천사 | 신동옥 |

[1월의 말] 행간의 천사 | 신동옥 |

shindongok    우리는 새집을 얻었다. 마음이 너무 많아서, 벽은 늘 막다른 곳으로 바람을 들이는가보다. 어둑어둑한 불빛 사각거리는 처마 아래로, 마음은 노랗게 물이 들어서 한 방울 습기에도 쉽게 들떠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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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화(寓話) 속에서 한 채의 이야기 집이 지어지면, 주인공보다 먼저 손님이 등장한다. 주인공은 모르고, 우리 모두가 아는 이야기의 비밀이다. 물론 세상 어떤 주인공도 그를 기다리지 않았다. 먼 데서 불어온 바람을 어깨에 얹고 문고리에 손을 얹는 그이의 몸짓에는 떨림이 없다. 그는 늘 철 지난 옷을 걸치고 있다. 작소(鵲巢) 머리 위로는 이름 없는 계절의 벌레들이 기어 다니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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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를 위해 마련한 우리의 식탁 위에는 지난 계절의 향기가 가득하다. 우리의 살림살이는 어떻게 서로를 재우고 먹이고 입히고 날이면 날마다 새로운 자장가로 꿈자리를 덥힐지……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으로 흥성거린다. 요람에 아이를 재우면 마당이 더 따뜻해 보였고, 불가에 아이를 눕히면 우물가가 더 포근해보였다. 바깥은 늘 캄캄했고 우리에게는 늘 더 많은 땔감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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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활은 그렇듯 늘 막다른 벽이었다. 우리가 지은 집 맞은편에 우뚝 버티어 선 채로, 우리가 지은 공간의 더께를 압박해오는 낯선 두려움. 이물감. 실뿌리를 가득 담은 바람과 실패의 안온한 잎맥을 펼친 새순, 절개지에서 막 끊어온 서늘한 웅성거림으로 빚은 한상차림. 우리가 기다려온 그는 문고리를 가볍게 밀어젖히고, 마침내 우리가 지은 우리의 살림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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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 당신을 위해 마련한 음식이에요. 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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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과 창턱마다 양각된 벌 나비와 온갖 꿈틀거리는 동물들. 벽에 걸린 기원을 알 수 없는 초상화들. 둥근 탁자와 곱게 무두질한 가죽을 덧입힌 소파. 그 곁에 얇고 검은 다리를 구부린 채 건반을 때리는 작은 망치의 떨림을 견디고 서있는 피아노. 모두가 한 때의 살림을 말해주는 증거다. 보드라운 공단(貢緞) 천으로 깃을 해 올린 원피스를 입고 앉아있는 여인들. 금장단추를 목까지 꾹 눌러 채운 아이들. 그이는 집에 들어서기 전에 발뒤꿈치로 바닥을 탁탁 두드리고 가벼운 목례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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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고 떠날 자는 다른 이의 살림 위에 먼지를 얹지 않는 이곳의 오랜 관습 탓이다. 그리고 그가 잡은 문고리는 우리가 사는 집을 드나드는 모든 이들의 표정이며 숨결이며 영혼을 고스란히 품은 채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식탁을 채운 공기가 파문을 일으킨다. 그는 흙먼지가 덕지덕지 엉겨 붙은 코트자락을 고이 접어 소파 위에 걸어둔다. 발목까지 꽁꽁 싸맨 군화 끈을 풀어 먼 길을 걸어온 앙상한 발목에 숨을 틔운다. 모자를 막 벗어서 쥔 손을 풀고 포크를 집어 든다. 그가 걸어온 길을 따라 좇아온 빛이 발뒤꿈치에 고이 포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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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인들. 귀밑머리가 하얗게 센 여인들. 구부정하니 소파를 밀치고 일어서서 시종 놀란 눈을 하고, 저도 모르게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서 있는 여인들. 읽던 책을 밀치고 눈을 들어 그의 행동거지를 바쁘게 쫓아가는 아이들. 목을 잔뜩 움츠리고, 식탁 아래 모은 발끝에 힘을 잔뜩 준 채 놀란 눈을 치켜뜨고 남자의 손길을 따라가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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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갓 파계한 채식주의자처럼, 육식의 완강한 계율을 헤집으며, 향긋한 소스가 뿌려진 양상추 사이로 붉고 푸른 힘줄을 골라낸다. 동물은 애초에 세계라는 관에 드러눕기 위해 말을 배우는 존재, 썩어문드러지는 사지육신으로 피리소리를 내며, 모든 비명은 갖가지 침묵의 향으로 플레이팅 된다. 인간은 숨을 품고 태어나고, 브라스는 자연의 소리를 모방한다. 그러니 이것은 한 덩이 고기의 말. 씹고 씹어도 삼킬 수 없다. 목구멍이 게워낸 고깃점은 이윽고 새하얀 종이죽이 되어 펼쳐지리. 필경사도 채색가도 더는 한 문장의 글줄도 이어갈 수 없는 탁자 위에서, 몸이 으스러져 즙이 될 것만 같은 침묵을 견디며, 우리의 식사는 계속되었다. 이윽고 그가 포크와 나이프를 밀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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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까지, 쓰고 나자, 텅 빈 종이는 마치 용서의 여지가 없는 여백처럼 빛난다. 이 식탁은, 종이는, 지배(紙背)는 알 수 없는 곳에 꿈을 묻어두고, 그곳을 향해 돌진하는 들라크루아의 깃발 같다. 바리케이트 아래 흩어진 처참한 글자더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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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때, 그가 일어서 속죄하듯이 이제까지 내가 적은 문장을 암송하기 시작한다. 우리의 살림을 매개로 그는 ‘문장’을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모두가 믿었지만 차마 누구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강령들. 그것은 완고한 관습이었고 규율이었다. 여기서 행을 건너뛸 것인가? 저기서 이야기를 끝맺을 것인가? 여기가 행과 이야기의 안이었는가, 밖이었는가? 우리의 긍휼한 살림은 늘 기나긴 만찬을 앞에 두고 있었고, 만찬은 늘 한바탕 광가난무로 끝났던 것만 같다. 그때마다 우리는 저마다 젓가락질을 다시 배우는 미식가처럼 꿈속의 글자를 하나, 하나 집어냈던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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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화는 여기까지다. 어깻죽지가 시큰할 정도로 피곤한 노동에 시달린 날에는, 반나마 주검이 되어 잠든 꿈의 푸른 심연 속에서, 어제 짓다 놓아버린 문장을 다시 매만졌을 것이다. 사라진 문장의 비자발적인 힘으로, 무목적성의 목적성으로, 비자율성의 자율성으로 행은 계속되었다. 언젠가 나는 그것을 ‘그의 시’라고 이름 붙였고, 내 노동의 금과옥조로 받아들였다. 문장 속에서 나는 노동자를 자처했으나, ‘나의 문장 노동자’는 그의 꿈에 사로잡혀서 번번이 행 바깥으로 증발했다. 이곳은 여전히 우리의 살림살이가 전시된 집이어서, 저 귀밑머리가 하얗게 센 여인들과 두려운 낯섦으로 목을 움츠리고 사위를 두리번거리는 아이들 천지다. 이제는 숫제 그들이 내 ‘문장의 삶’을 지배하는 전부인 것만 같다. 나는 그들이 버리고 간 의자에 앉아 지난 모든 세월을 견뎌온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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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다시 오랜 시간이 흐르고, 누군가 나의 의자에 도사리고 앉아서, 스스로 무릎이 마비되는지도 모르고, 손목 인대가 끊어지고, 더 이상 꿈의 매듭으로 옭아맬 상념조차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서서히 희박해져가는 우리의 살림, 우리의 살림이 뿜어낸 독한 향내를 증류해 마셔가며, 파랗게 부풀어 오르는 혈관을 톡톡 두드리며, 어쩌면 우리의 살림이 최후에 닿고자 했던 인간의 꿈속으로, 인간이 인간의 손으로 자신이 피운 꽃을 꺾는 필연의 문장 속으로, 피를 한 방울씩 떨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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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피를 종이에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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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로써, 문장은 비로소 당신이 되었다. 당신이 스스로 당신을 암송하는 문장이 푸른 증기로 뿜어지네요. 당신은 암송을 마친다. 우리의 살림은 암송을 마친 당신의 표정과 속내를 인유하며 실내의 조도를 한 톤 낮춘다. 당신을 인유하는 우리의 문장은 내내 거짓말의 역사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흩날리는 꽃 이파리와 가시에 스민 냉기 같은 것들로 채워진 한 편의 서사시였다. 작은 어항 속에 깜빡 트였다 가뭇없이 사라지는 한 점 기포와 같은 자음과 모음들. 혀뿌리와 이빨이 맞닿아 내는 웃음소리 속에 문장은 선율을 입었고, 끝없이 인유되는 거짓말의 서사시 속에 산입되었다. 늘 딱 그만큼이 우리 몫의 의미였다. 당신은 암송을 마치고 자리에 앉았다. 언젠가 그였던 당신을 지배하는 대기 속에서 겨울비가 흩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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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늘처럼 겹쳐진 채, 벽지 위로 연속되는 무늬들. 당신은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가, 원뿔 모양의 주머니를 뒤집어 꺼내 이마 위에 얹는다. 안개가 자욱한 실내, 선율을 입은 문장으로 자욱한 안개가 식탁에 올라앉는다. 문장이 비를 뿌린다. 누군가 이마에 앉는 빗줄기의 행간을 더듬는다. 그것은 꼬무락거리며 벌레처럼 주름에서 주름 사이를 건너뛰며 흘러내린다. 마치 벌레 같군, 우리는 이 대기를 기억한다. 나는 늘 여기 있어왔고, 우리는 늘 함께했으므로. 심지에 불붙여 높이 치켜든 횃불과 바람, 모두 이 공기를 기억하리. 문장은 이어지고 낭독은 계속되는 실내, 무관심의 관심, 그 끈질김, 이 식탁은, 지배(紙背)는 마치 우리가 지은 상상력의 중립지대, 점이지대에 관한 강력한 한 편의 암시처럼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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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소리들은 다시금 제 자리를 찾아간다. 어느 행간에선가 교란이 생겼다. 교착에 빠진 삶의 내적 규범에 대한 통찰로, 거짓말은 스스로 발화 주체가 되어 우리 모두의 역사를 인유하기 시작한다. 망가진 선율로도 노래는 이어갈 수 있지. 그러나 망가진 규율로 문장을 이어갈 수는 없다. 가장 강력한 관습과 더욱 막강한 일탈이 팽팽한 균형을 이루는 불안정한 평형처럼, 우리에게는 늘 적당한 요리법으로 기갈을 달랠 ‘조작’이 필요했다. 먹는 손과 익히는 손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쓰는 손과 읽는 손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누군가 마지막 힘을 내어 다시 낭독을 이어간다. 이쯤해서 우화 속의 손님과 주인공은 모두 문장의 기식자일 따름이다. 줄거리는 한 모금 수증기에 섞인 향기와 다를 바 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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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탁은 달구어진 주전자가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찻상, 난로 위로 옮아간다. 우리는 끊임없이 행간을 이어가고, 끝없이 이어지는 문장의 안뜰에 듬성듬성 포석이 놓인다. 우리는 다만 진실하게 스스로 자신에 대해 토로하기 위해 이 행간 속으로 뛰어들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문장’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그것을 해석적으로 전유하며, 인간의 꿈이라고, 시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왜 낭송가들은 잠시도 닥치고 있을 수 없는 것일까? 들어보자. 우리가 낳은 저 무수한 하소연들을.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다만 진실하게 스스로 자신에 대해 토로하기 위해 이 행간으로 뛰어들었다. 틈입했다. 내 말이 위험하다고 여겨지면, 우리를 기소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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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찻주전자 주둥이에서 한 마리 새가 날아오른다. 자연은 인간을 모방하고, 새는 노래를 닮은 부리를 가로젓는다. 우리의 대화는 듬성듬성 놓인 포석을 디디며, 구르며, 돌멩이처럼 이리저리 치이길 거듭한다. 자, 봐. 구조가 있을 거야. 구도가 있겠지, 암. 나는 썼고, 당신은 암송했고, 그는 침묵했다. 우리의 목소리는 나선으로 뻗은 계단을 울리고는 저 찻상 아래 어딘가에 있을 깊은 곳으로 조금씩, 조금씩 가라앉았다. 어쩌면 우리가 차린 이 잔칫상 아래 어딘가 까맣게 빛나는 맨홀이 자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끝자락에 가라앉아 고일 최후의 반향을, 파동을 응시하는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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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간의 살림으로 들어선 이래로 나는 결코 쉬지 않았다. 쉴 수가 없었다. 나는 매번 시작했고, 내가 시작한다는 것은 동시에 계속한다는 뜻이었으므로, 내가 사는 살림은 바로 이 순간 저 멀리 어딘가에서 달려온 시간에 의해 두 조각으로 나누어진 칼끝의 이쪽 또는 저쪽. 나와 당신과 그는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 속에서 다시 자신의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서로를 부르는 우리의 이름은 식탁 아래서 먹기 좋게 부푼 공 모양으로 말랑말랑한 빵이 되어가고 있었다. 빵은 침묵 속에서 푸르게 푸르게 부풀다가 어느새 걸쭉한 액체가 되어 깊은 곳으로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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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가진 화음으로도 행간을 이어갈 수는 있지.”
   “그 끝에는 무엇이 도사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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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힘을 합해 살림을 꾸리기 시작한 이래로 누구도 묻지 않은 질문은 바로 이것. 우리는 다만 우리의 행간이 마련한 탁자에 앉을 누군가를 기다려왔다. 그는 결코 우리가 되지 않을 것처럼 문고리를 잡고 벽을 두드리고 창밖을 서성였지만, 마침내 그는, 우리 사이에 앉은 어느 사이 당신이 되었고, 결국에는 내가 되었다. 결국, 우리의 만찬은 늘 기식으로 끝나는 행간. 끝에 대해 묻지 않기 위해, 늘 새롭게 시작하는 방식으로 모두(冒頭)를 여는 행간만을 살기 위해, 우리 가운데 누구도 끝에 관해 묻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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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우리를 읽고 가는 이들은 누구였는지? 그가 우리가 지은 살림의 액자 밖에 존재하는 누군가라면, 그이와 우리를 사로잡는 미장 아빔(mise en abyme)은 어디에 뿌리를 둔 틀일까? 그것은 결국 심연에 대한 물음이었을 테지만. 우리는 단 한 번도 우리의 행간을 읽고 지나가는 그이의 ‘실물감’을 대한 적 없으므로, 우리를 읽고 가는 이가 비록 당신이라고 해도 당신에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신이 나의 행간을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당신과 나 사이에서 번번이 유예된 이 만남으로 인하여, 당신은 마침내 나를 죽은 자로 간주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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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이 나의 행간에 도사리는 격자를 깨부수고, 심연을 밖으로 끄집어낸다면 그곳에서 당신은 보게 될 것이다. 두 개의 녹슨 난간이 끝없이 뻗은 어느 하늘 끄트머리를. 그 끄트머리에 한 개의 문장이, 한 개의 단어가 빛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을 읽어 내려갈 당신의 턱으로 엷은 사양斜陽이 칼날처럼 비낄 테지. 당신은 곱은 손을 포개고 가엾게 잠에 취한 내 곁을 지나, 듬성듬성 놓인 문장의 포석을 밟고 왔던 길을 되짚어 당신의 살림 속으로 걸어 들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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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이 당신 자신의 살림 속으로 돌아갔을 때, 그곳에서도 나의 행간은 지속될 것인가? 그곳에서도 내가 만든 문장의 사금파리는 날카롭게 빛날 것인가? 나를 읽고 갈 당신은 결코 우리가 아니다. 당신은 모반자였고, 적대자였고, 사랑스럽고도 두려운 마법사였다. 당신의 목소리는 나의 행간이 태어나기도 전에 피리를 불며 행간을 뒤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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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우리는 눈과 귀를 가진 동물이었고, 우리는 썩어문드러지며 자연의 호흡을 모사한다. 당신과 나 사이에 가로놓인 문장 사이로 늘 바람이 지나는 까닭이다. 누군가 우리가 만든 사전에 불을 지른다. 불길에 구석으로 내쫓기며 우리는 비로소 깨닫겠지. 두려움 속에서. 이 문장의 주인은 어디에도 없었는데, 여태 갈 곳 몰랐던 행간만 저 혼자 바빴구나. 이제 우리를 한데 불러 모은 이 무감한 행간 아래 이끌려온 발걸음을 멈추고 머리를 조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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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행간은 깊은 곳으로, 깊은 곳으로 내려가며 문장은 스스로 행간의 격자를 구축해갔다. 누군가가 지은 문장의 하늘 아래 다시 문장의 맨홀 뚜껑이 얹힌다. 누군가가 맨몸으로 걸치고 사라지는 행간으로 소실점이 영롱하게, 희미하게 반짝인다. 끝내 마디지지 않을 구두점으로 다른 살림의 빛살이 내리쪼인다. 누군가 팔을 치켜든다. 그이의 팔 끝에서 다른 문장의 천사가 날아오른다. 천사의 읊조림은 나비 떼가 되어 가루, 가루 흩어진다. 그렇게 우리의 살림이 다한다고 해도, 우리는 끝끝내 누가 이어갈 지도 모를 이 행간의 사복(司僕)이 되어, 언제 어떻게 끝날지 모를 잔칫상에 앉아 말없이 서로의 눈길 속에 비친 자신의 눈동자를 들여다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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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의 침묵으로, 낭독은 계속될 것이다. 낭독이 끝날 때마다, 누군가는 비로소 우리가 될 것이다. 우리의 살림 속에서 누군가는 우리가 버리고 온 행간 속에서 자신의 삶이 열독해왔던 증오의 첫 페이지를 펼쳐 읽을 것이다. 우리가 만든 행간의 살림 속에서 누군가는 우리의 삶을 한 모퉁이씩 접어 날카로운 도그지어를 세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행간에 밤이 밝고 누군가는 놀라서 환몽으로 물든 자신의 빵을 버리고 떠날 때, 행간의 새벽이 밝고 누군가는 등을 돌리고 여태껏 지녀온 자신의 이력을 되짚어 걷겠지. 이렇게 누군가 열렬히 사랑했고, 다른 누군가 열렬히 증오했고, 또 다른 누군가 열렬히 살고 죽어간 행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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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처음 행간에 살림을 들였을 때, 나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꿈속에서 나날이 증발하고 있는 몸뚱이를 스스로 돌보며 소일했다. 눈송이가 서서히 기화하는 그이의 잠은 따스했다. 그이의 잠을 꿈꾸는 나의 행간으로 어둡게 찡그린 눈썹을 펴주는 아늑한 손길이 느껴졌다. 그이의 가슴에서 차디찬 입김이 응결하고, 저도 모르게 포화한 울음을 삼킨 그이의 침묵 한 가운데서 ‘처음 문장’을 나직하게 읊조리는 천사의 음성을 들었다. 눈발 속에서도 짙푸른 빛을 발하는 어느 이름 모를 나무의 뾰족한 잎사귀처럼, 짙푸른 대기 속에 말랑말랑 구워져 방울방울 쏟아지는 선율. 나는 문장을 펼쳐 ‘행간의 천사’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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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 시간이 지나자 누군가 나의 행간을 ‘당신의 푸른 각주’로 고쳐 읽었다. 문을 닫고 문고리를 닦을 시간이면, 여전히 흥성이는 식탁을 돌아본다. 우리는 저마다의 입김이 스민 손수건을 꺼내, 피곤에 달아오른 눈자위를 닦았다. 끝없이 전진하며 이어지는 웅얼거림, 파동에 여리게 떨리는 눈길, 그 끝에서 애써 감춘 표정을 지우는 저마다의 엔딩 크레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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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우화는 끝난다. 그리고 이야기는 시작된다. 고백하자면, 나는 태어나며 죽었다. 오늘은 내가 마지막으로 품었던 행간에 앉아본다. 힘차게 팔목을 놀렸을 노트의 겉표지는 수만 번 무두질한 가죽인 듯 반짝일 지경이다. 나는 내가 기른 행간의 천사들을 불러 모아, 누구도 치르지 않은 나 자신의 장례를 집전한다. 드라이플라워와 조화로 생전의 식탁을 덮는다. 천장에 커튼을 달아 텅 빈 방안을 정원으로 바꾼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자가 마지막으로 남긴 먼지는 쓸지 않는 법, 그가 살아갈 풍경을 채우는 것은 결국 식물과 그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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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치 귀밑머리가 하얀 여인들이 안락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하듯이, 끝없이 변하는 말씨와 표정은 모두 생전 그이가 이어간 행간의 체현이다. 한 번도 정면으로 보지 않은 나의 얼굴이 인화되어 묘비에 붙어 있다. 채색묘비 곁에 목 없는 마네킹이 은빛 드레스를 입고 서 있다. 표정이 없는 문장의 천사, 나의 마지막 침묵이 미래의 행간에서 불러온 이름. 나는 가볍게 나의 문장을 딛고 미래의 행간으로 날아간다. 새 집은 따뜻해졌니? 겨울의 칼바람은 어떻게 견디어 냈니? 나와 나의 천사를 위해 우선 방안을 검은 천으로 가린다. 촛대에 불을 밝힌다. 생전에 내가 남긴 행간으로 당신들이 모여든다. 당신들은 우선 안부를 묻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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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은 새가 날아갈 때 한 쪽 발과 생전 그가 날던 가지 사이에 끈이 한 가닥 묶여 있다. 실타래들은 얽히고설켜 바람을 만든다. 바람은 산자의 귓불을 퉁기며 행간 저쪽으로 달아간다. 금관악기를 통과하는 숨처럼 안부가 이어진다. 오늘은 비로소 내가 죽은 날, 내 마지막 숨이 흐너진 대기 속으로, 부음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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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생전 십자말풀이와 장기를 좋아했지만 꾼은 못 되었다. 당신들은 이 순간을 위해 검은 옷을 준비해두어야 한다. 검은 천을 얼굴에 두르고 목을 휘감아야 한다. 나는 생전에 팔을 놀렸을 빛바랜 탁자 위에 누워 있고, 당신들의 안부는 계속된다. 너는 자상했지, 너는 행간의 도미노를 즐겼지, 네 아이들이 먼 곳에서 달려오고 있단다, 네가 즐기던 낱말들의 패를 세어보니 너는 올해 마흔둘이더구나, 바람이 불고 새가 날아가고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제재소로 몰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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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나흘 밤낮을 새서 관을 짠다. 나 자신을 위하여. 나무로 종이를 만들고, 연필을 만들고, 행간을 엮고, 문장을 달래고, 관을 만든다. 나의 아내와 누이와 딸이 빈 방을 지키며 죽은 나와 대화를 주고받는다. 네가 좋아했던 물건이 무엇이지? 향수, 도미노, 사전, 면도기, 손수건, 레이스가 달린 셔츠, 검은 바지, 잭나이프, 휴대용 코냑통. 죽은 행간의 천사가 천장에 거꾸로 누워 떠는 밤. 나는 내 발목에 실을 묶어 살포시 창밖으로 넘어간다. 실이 끊어지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한손으로는 성냥이 꺼지지 않도록 불을 돌보며, 실이 끊어지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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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떨지 말고, 울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자. 모두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새 옷과 새집이 만들어지고 있다. 삼백 마리의 물고기와 삼천 통의 술이 준비되었다. 행간의 친구들을 위하여, 일곱 테이블의 기다란 식탁을 마련했다. 오래 전에 죽은 나의 책들 또한 먼지 쌓인 서고에서 불려왔다. 이 하얀 실을 보렴. 너는 하얀 실을 좋아했지. 이제는 불붙는 도화선처럼 침묵해버리는 행간의 실 꾸러미, 삶과 죽음 사이에 가로놓인 찰나의 폭발 속에 헤매는 행간을 딛고, 이 실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자. 나는 연신 성냥을 긋고, 나는 영정을 들고 앞서며, 나는 곡(哭)을 하며 길을 낸다. 1월 하늘에 유성이 긋고, 암갈색으로 긋는 유성을 따라 한 타래의 문장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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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은 현관에 놓인 발판에 발을 두 번 닦고, 뒤꿈치로 힘차게 바닥을 구르고 들어선다. 산 자도 죽은 자도 발부터 나고 드는 행간의 관습이다. 나는 스스로 관을 메고 흙구덩이로 내려선다. 수북한 흙더미 위로 꽃다발이 떨어져 내린다. 말라가는 꽃의 무게로 땅은 다져질 것이다. 나는 죽었고, 죽지 않았다. 문, 장, 하고 목젖을 움직이는 사이에도 행간을 이어가는 실타래는 끊어지지 않고 떤다. 그것은 하나의 구멍으로 나고 드는 소리와 같고, 한 인간의 목구멍을 울려 떠는 이명과도 같다. 이 행간은 마치 물방울의 심장 같다. 마치 총알이 강선을 돌아 총구를 빠져나가듯. 삶은 행간을 벗어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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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검은 행간은 배후에 흰빛을 거느린다. 도사리는 무수한 목소리들. 누군가는 조용히 하라고 고함쳤고, 다른 누군가는 고함치지 말라고 절규했다. 만일 내가 쏟아지는 빛줄기 속에 서 있을 수 있다면, 나는 퍼붓는 낱말 더미 속에 서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몇 마디의 문장만 걷어내면 여기가 바로 거기다. 지우고 다시 쓸 수 있으리라는 위로와 자유 속에서 나는 늘 귓바퀴에 행간을 걸치고 걸어왔다. 바람과 파도가 지도 여기저기 제각각이듯, 내가 지은 문장의 세포와 원소도 저마다 제각각 행간을 만들었으리라. 나는 오늘 나의 천사와 나의 죽음을 당신에게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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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만든 집 속에서 문장은 늘 그가 최후에 되고자 하는 바를 스스로 지어 입었다. 당신과 나는 아마 오랜 시간을 숨과 볼과 숲과 재가 서로 몸을 바꾸는 이생의 문장에 대해 오랜 대화를 나누어 온 것만 같다. 고백하건대, 나는 내가 지어 입은 행간 속에서 당신의 숨결이 스민 모든 것을 기억하려 애써왔다. 돌이켜보니, 내가 나라는 말을 잃어가는 방식으로 우리가 만든 문장의 기억은 두께를 더해온 것은 아닌가 싶다. 나는 완고한 걸음걸이로 다른 시간을 향해 전전 또 전진했고 그곳에는 언제나 당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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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당신을 알기 전부터 당신은 그곳에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렵사리 당신을 품은 나의 두 볼은 부풀어 올랐다. 마치 우리가 나란히 몸을 누이고 바라다보는 저 행간 너머 문장의 천정(天井)처럼. 거기 올라앉은 달빛처럼. 이제 다시 누군가의 꿈속에서 당신이 나의 이름을 불러도 나는 깨어나지 않을 것이다. 일어나지 않고, 당신 곁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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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내가 당신의 천사와 당신의 죽음을 볼 차례다. 깃을 치고 날아오르는 당신으로 인하여, 하늘은 온통 잿빛이다. 여기가 행간의 문턱이라는 것을 안다. 오랜 직감으로. 오직 숨과 울음뿐인 문장의 나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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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까지가 나의 이야기고, 문장은 저 혼자 행간을 이어갈 것이다. 끝없이, 끝도 없이.

• 사진 : Bianca van der Werf, 〈Pilgrimage〉.

시인. 2001년 『시와 반시』로 등단. 시집 『악공, 아나키스트 기타』, 『웃고 춤추고 여름하라』, 『고래가 되는 꿈』, 산문집 『서정적 게으름』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