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말]  배니싱 트윈 | 양윤의 |

[11월의 말] 배니싱 트윈 | 양윤의 |

yangyunui―은희경, 『새의 선물』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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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신 중 자궁 속에서 쌍둥이 가운데 하나가 사라지는 현상을 배니싱 트윈(vanishing twin)이라고 부른다. 다른 말로 쌍둥이 소실(쌍생아 소실), 태아 흡수(fetal resorption)라고도 한다. 통상적인 쌍둥이는 공시적(共時的)이다. 함께 태어나서 같은 시간대를 살면서 서로가 서로의 거울이 된다. 그런데 배니싱 트윈의 경우에는 하나가 태어나고 하나가 죽어서 둘이 ‘존재 / 부재’ 혹은 ‘현실적인 것 / 잠재적인 것’이라는 짝을 이룬다. 비유적으로 말해서 나의 공시적인 짝이 아니지만, 시간적인 간격을 두고 출현하는 모든 알터 에고(alter ego)들을 우리는 배니싱 트윈이라 부를 수 있다. 오늘 읽어볼 『새의 선물』에서도 이런 인물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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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의 주인공 진희는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13쪽)고 말한다. 진희의 전략은 이렇다. “내가 내 삶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나 자신을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로 분리시키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본다. ‘보여지는 나’에게 내 삶을 이끌어가게 하면서 ‘바라보는 나’가 그것을 보도록 만든다. (중략) 나는 언제나 내 삶을 거리 밖에서 지켜보기를 원했다.”(12쪽) 그 결과, ‘바라보는 나’는 열두 살에 성장을 멈추고 그 ‘바라봄’만으로 존재하기 시작했고, ‘보여지는 나’는 “삼십 내 중반을 넘긴 나”(11쪽)로 나이를 먹는다. 물론 ‘바라보는 나’가 나이를 먹지 않는 것은 아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 독백을 하는 ‘나’는 여전히 ‘바라보는 나’이지만, 열두 살 아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본문을 이끌고 가는 ‘열두 살’ 진희의 목소리 역시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아니다. 이것이 이 소설의 목소리를 이중으로 물들인다. 이 소설은 열두 살 진희(‘보여지는 나’)의 몸을 하고 있는 삼십 대 중반 여성의 목소리(‘바라보는 나’)로 적혔다. 진희는 실제로는 애늙은이가 아니라 늙은 아이였던 셈이다. 이것이 첫 번째 배니싱 트윈이다. 성장을 멈춘 건 열두 살 때의 진희가 아니다. 진희는 이미 충분히 나이를 먹었다. 한 번에 늙어버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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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소한 사건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열두 살 진희는 대체로 ‘바라보는 나’의 역할에 충실하다. 이후에 벌어지는 여러 사건(그 중에 핵심은 당연히 연애사건이다)의 주인공은 진희가 아니라 이모다. 따라서 이 소설의 짝은 ‘바라보는’ 진희 / ‘보여지는’ 진희라기보다는 진희(‘바라보는 나’) / 이모(‘보여지는 나’ 혹은 ‘겪는 나’)라고 하는 게 온당할 듯하다. 이것이 두 번째 배니싱 트윈이다. 어린 ‘나’ / 늙은 ‘나’(이모), 혹은 사건이 벌어지기 전부터 모든 것을 개괄하는 ‘나’ / 사건을 겪고 나서야 사건에서 놓여나는 ‘나’(이모)라는 쌍둥이. 이것이 두 번째 배니싱 트윈이다.
    진희는 어머니가 자살하고 아버지는 새엄마를 찾아 떠나서 할머니 손에서 자란다. 이것이 성장을 멈추게 된 배경이다. 어려서 너무 큰 상처를 받아서, 세상이 진희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아버려서 성장을 멈췄다는 거다. 그런데 정작 실제로 상처를 받는 건 이모다. 이모와 펜팔을 시작했던 연인(이형렬)은 친구(경자 이모)와 바람이 나고, 그 친구는 자기 대신 공장에 취직했다가 죽었으며, 이모는 낙태수술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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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본다면 열두 살 진희가 작성했던 “절대 믿어서는 안 되는 것들”의 목록(13쪽)은 이후의 진희가 부정해버리는 목록이 아니라 겪어나가야 할 목록이다. 왜냐하면 진희는 열두 살 아이의 몸으로 주변인들이 저 목록들을 체험하면서 겪는 몰락/성장을 목도하기 때문이다. 흔히 어떤 입사(트라우마에 해당하는 체험) 의식(儀式)을 겪고 의식(意識)의 변화를 겪는 것이 성장소설이라고 하지만, 이 소설은 성장소설의 구조를 선결정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렇다. 1) 진희는 전혀 성장하지 않는다. 자신이 ‘겪는’ 일이 아니라 ‘보는’ 일을 적기 때문이다. 2) 진희는 겪지 않는다는 것은 진희에게 상처가 선재적(先在的)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전쟁 통에 정신이 나가서 세상을 떠났으나 진희의 기억에 없다. 아빠는 진희를 버리고 떠났다가 소설의 끝에 가서야(말하자면 기계신처럼 서사의 바깥에서) 돌아온다. 엄마의 죽음이나 아빠의 부재는 상처의 원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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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로 상처를 겪는 이들은 진희의 눈을 거쳐 간 수많은 인물들이다. 이들은 모두 ‘바라보는 나’의 눈에 ‘보여지는’ 이들이라는 점에서 또 다른 배니싱 트윈들이다. 몇몇 예를 들어보자. 1) 장군이와 진희. 미련하고 순박해서 늘 진희에게 당하는 장군과 지혜롭고 영악해서 늘 장군을 골려주는 진희는 피동적 체험자 / 능동적 행위자라는 점에서 쌍둥이다. 2) 영옥(진희의 이모)과 경자. 친구 사이였으나 영옥은 경자에게 애인과 일자리를 빼앗긴다. 둘은 ‘피해 / 가해’라는 짝을 이루었으나 후에 경자는 사고로 죽는다. 영옥의 낙태수술과 비교하면 둘은 죽음에 이르게 한 자(영옥) / 죽음에 이른 자(경자)라는 짝으로 전환된다. 3) 에필로그에 등장하는 ‘그’는 “나의 하나뿐인 열세 살 아래 여동생의 지도교수이자 첫사랑”이고 “스무 살 무렵의 그에게는 내가 첫사랑이었다.”(385쪽) 그러니까 그에게 진회와 ‘여동생’은 그가 ‘첫사랑’을 했던 친구와 ‘첫사랑’의 대상이 되었던 제자였다. 진희(이자 이모)의 자리가 파트너의 시선을 통해서 다시 결합된다는 사실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어린 진희에게 이모는 엄마+언니였다. 그러니까 이 경우는 둘이 아니라 세 쌍둥이다. 어린 진희(동생), 언니, 엄마. ‘그’의 눈에 비친 진희와 여동생도 셋이다. ‘사랑받는 나’(언니), ‘사랑하는 나’(동생), 제자. 이 소설에서 구조적 동형성을 빈번하게 발견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세 번째이자 무수히 많은 배니싱 트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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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들이 사는 집의 구조(17-18쪽)도 대칭을 이룬다. 우물을 중심으로 왼쪽 집, 오른쪽 집이 있고, 앞뒤로 북적대는 가겟집과 빈 방이 있다. 집의 평면도란 늘 인물들 간의 관계도이기도 하다. 이 집 역시 쌍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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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라는 분리는 사실은 서술자(그는 소설 속 인물이지만 실제로는 내포작가이기도 하다)와 체험자(서술자가 직접 겪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한 허구적인 장치)를 동시에 구현하고 있다는 말, 다시 말해 이 소설이 1인칭 주인공시점으로 씌었다는 사실에 대한 간단한 설명에 불과하다. 시점이란 그다지 유효하지 않은 정보만을 제공하는 허구적 구성물에 불과하다. 실제로 은희경의 소설이 90년대식 냉소, 비참여, 사소한 일상에 대한 탐닉을 보여준다는 평가가 있었지만, 이 가운데 어느 하나도 진실에 적중한 적이 없다. 은희경의 소설이 냉소적인가? 거기서 냉소를 읽는 시선이야말로 남성적 시선이 아닌가? 저토록 무너져가는 여성의 삶이 어떻게 사소한 디테일에 불과하단 말인가?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은희경이라는 작가가 최초로 자신의 목소리를 갖게 된 여성적 주체를 소개한 작가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것도 통시적(通時的)인 쌍둥이, 즉 배니싱 트윈을 통해서 여성의 안팎을, 존재와 부재를, 현실성과 잠재성을 동시에 보여준 작가라고 말이다.

문학 평론가. 2006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 평론집 『포즈와 프러포즈』(문학동네, 2013)가 있음. 고려대 기초교육원 초빙교수로 재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