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언(廣言)의 시학

광언(廣言)의 시학

bitter_write5― 제3회 김현문학패 선정의 말(시 부문: 강정)

   1992년 스물 한 살의 이른 나이에 시인으로 등단한 강정은 지금까지 여섯 권의 시집을 펴냈는데, 새로운 시대적 징후로 관심을 끌었던 첫 시집 『처형극장』(1996)과 두 번째 시집 『들려주느니 말이라 했지만,』(2006) 사이에는 만 9년의 시간적 간격이 놓여 있다. 이 시간적 간격은 말을 다루는 시인으로서는 힘겨웠을 침묵과 그 자기 유배 속에서의 어떤 모색을 짐작케 하는바, 그 과정이 차후 참으로 강정다운 시세계를 확립해가는 데 유의미했다는 진단으로부터 우리의 평가는 시작된다.
   『처형극장』은 “혁명과 사랑을 노래하던 시절”이 지난 뒤 “세상을 폐허로 인식하는 게 / 나에게는 습관적이다”라고 고백하는 한 젊은 시인이 새로운 시대적 상황 속에서 마주하는 불안․반항․방황․몽환들이 다층적으로 토로되고 있는 시집이다. 그 밑바탕에는, 폐허가 역설적이게도 ‘죽음’과 ‘자유’가 맞물린 공간이라는 인식이 깔려있다. 기존의 의미가 붕괴된 세상에서 그는 자유지만, 새로운 의미를 찾지 못하는 한 자유가 구가할 수 있는 것은 “죽음의 삶, 영원한 반복”밖에 없다. 세상은 마치 자유에 처형된 인간이 죽음의 연극을 반복하는 극장과도 같다. 다분히 실존주의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이 상상 체계 속에서, 자기 존재를 드러내고 모종의 투기(投企)를 모색하는 유일한 실체로 떠오르는 것은 ‘몸’이다. 그러나 몸은 성적(性的) 정체성 문제로 인해 태생적으로 반쪽이라는 한계를 안고 있다. 그것을 넘어서야만 완전한 자유의 길, “절대적 정화(淨化)의 길”이 열리지 않을까? 여기서 시인은 ‘꿈’이라는 “지독한 자유”에 기대어, “양성(兩性)을 다 노린다.” 남성과 여성이 완전한 한 몸이 되는 성적 결합(“不二”)이나 양자를 넘나드는 성 전환(“내가 여자가 되는 상상”)의 욕망들이 격렬하게 쏟아져 나오는 것은 그 때문이며, 여기서 ‘죽음’은 그 꿈의 매개이자 활로가 된다. 요나의 신화처럼 죽음—혹은 자궁으로의 회귀—을 통해 거듭거듭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꿈은 과연 그가 처음 꾼 꿈일까? “어떤 조작된 신화 속에서만 피가 도는 내 일생”을 언급하는 걸 보면, 시인에겐 이미 이 문제에 대한 어떤 자의식이 내재되어 있었던 듯하다. “나는 자유다, 내가 외칠 때 나의 아버지는 내 머리 위에 계셨다”는 자백은, 그의 상상력 또한 “아버지의 집을 떠받치는 옹이 많은 서까래 한 토막”에 불과하다는 절망감 내지는 자괴감의 노출일 수 있다. 더구나, 일면 낯설어 보였던 시적 어법도 자세히 곱씹다보면 자주 기시감을 느끼게 한다. “오랜 서적과 그 헤지지 않은 책갈피들의 단호한 가르침 사이로” “곧고 마른 소리들을 내지른다”지만, 그게 그냥 절박한 의지만으로는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실 이 시집은, 그가 읽었음이 분명한, 그에 앞선 시인들의 어떤 언어들이 거의 그대로 섞여 흘러나오는 양상을 여기저기서 보여준다.
   그래서일까, 9년 만에 나오는 두 번째 시집의 제목이 『들려주느니 말이라 했지만,』인 것은. 이 시집은 ‘말’에 대한 반성과 성찰로 가득 차 있고, 말이 몸과 어떻게 하나로 유기체로 작동하는가를 세심히 탐색하고 있다. 시인은 이제 “목청껏 다른 말들을 웅얼거리는데 / 이 다른 말이란 것도 / 듣고보니 말이라 했지만 / 책에 쌓인 먼지라거나 / 같이 있다 방금 자리를 뜬 사람의 미진한 온기 따위인지도 모른다”고 읊조린다. 나아가, “내 몸이 되어버린 노래의 한 구절”이란 표현에서 보듯이, 말은 몸에 간직되는 타자이자 “또 다른 나”이다. 더 적나라하게, 말은 내가 먹어치워 내 살이 된 남의 살과 같다. 그러므로 말하는 순간, “수천 마리 내 육신의 이형(異形)들이 터져나온다.” 그 ‘이형’은 점차 지상의 모든 짐승, 생명체, 심지어 무기물로까지 확산되지만, 그것은 하나의 깨달음일 뿐, “다른 인간이 태어나야 한다”는 소망—‘다른 말’에 대한 소망이기도 하다—을 충족시키지는 못한다. 시인의 두 번째 꿈이 작동되는 지점이 여기다. 폐허의 지상을 초월해 우주 같은 허공 속에서 사는 존재가 되는 것. 그 구체적 이미지는 ‘거미 인간’이다. “내 몸이 낳은, 새로운 몸의 거처”로서 “전혀 다른 시간의 얼개를 펼치는, 시간의 동력줄 같은” 거미줄 위에, “고체로 눌어붙은 바람의 껍질”로 덮고 사는 삶. 그것이 정녕 “미래의 별빛들”과 조응할 수 있을까?
   세 번째 시집 『키스』(2008)에서, 거미 시인은 “인간의 바깥으로 떠돌아 짐승의 마음을 허공에 쓴다.” 그리하여 “몸소 비장함을 체현한 노트가 허공에 나부”끼지만, 그에게 치명적인 점은 그것이 “당신이 한사코 거절해버린 / 귀여운 벌레들의 미래 도시를 상상임신”하는 짓이나 다름없으며, 그 결과 그의 시쓰기는 “혼자만의 긴 울음을 저작하는 일”에 불과해진다는 것이다. ‘당신’이 허공 즉 거미줄 위에 살기를 거절한 탓이다. 이 ‘당신’은 누구인가? 강정의 시적 서술 속에는 “당신이라는 또 다른 차원”이 존재해 왔는데, 필경 이 “당신이라는 안테나”는 곧 시를 수신하는 독자를 지칭하는 것이리라. 이 호칭은, 시 안의 화자인 ‘나’의 짝으로서의 ‘너’와 구별되는, 시인으로서의 ‘나’의 짝을 가리킨다(물론 ‘당신’과 ‘너’는 겹쳐져 나타날 수도 있다). 네 번째 시집 『활』(2011)에서 “당신이 존재하였기에 당신을 부르는 건 아닙니다 / 다만, 당신이라 부를 수 있는 / 무언가를 믿고 싶었을 따름입니다”라고 말해지는 것을 보면, ‘당신’은 언젠가 시를 통해 하나 되고 완전해져야 할 미지의 대상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런 ‘당신’은 여전히 지상의 말-몸을 사는 존재로 허공의 시를 알아듣지 못한다. 허공의 “책갈피가 빗물에 녹”아 지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동시에, 허공에서 “우주의 중심을 사로잡았다고 믿었”던 시인은 다시 지상으로 추락하여 절뚝이며 “목발을 짚은 광대”가 된다(마치 ‘저주받은 시인’처럼!). 이 상황에서 그는 어떻게 허공에서 저작한 “긴 울음의 엄밀한 정도(正道)”를 “흙 속에 새겨” ‘당신’과의 시적 소통 혹은 합일을 얻을 것인가? 그가 시를 통해 ‘당신’과 공유하려는 것은 그가 하늘의 “검은 별밭 사이 숨은 길로 드러나는 세계의 축도(縮圖) 속에서” 체험한 “무소불위의 착란”이다(랭보의 “전감각의 조직적 착란”을 떠올리게 한다). 돌이켜보면, 이때까지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꿈꾸며 낡은 살을 짓이기고 새 살을 돋게 하기 위해 ‘나’와 ‘너’가 행해온 저 광폭한 사랑도 그런 착란의 의도적 실험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서로의 고통을 갈취하려는 노역”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결과, ‘당신’이 거절했듯 “네가 떠났다.” “늘 종말과 닿아 있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꿈속”에서의 투기와도 같은 그 직선적 노역이 무모했다면 그 대안은 무엇일까? 그때 떠오르는 세 번째 꿈이 휘는 활과 같은 실존 방식이 아닐까? “생의 모든 순간을 단번에 탄주하는 바람” 속에서 “대숲의 휘어짐에 따라” “스스로에게서 빠져나오는 자유를 얻는” 것. 이는 “지난 광태의 오욕들”이 담긴 “어두운 괄호”를 빠져나와 “깨끗한 적막”을 획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적막을 구하려면 실명(失明)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시여, 등을 굽혀라”라는 자기 명령은 “눈을 찔러라” “고요히 실명하라”로 이어진다. 밖을 향한 시선을 차단하고 세계를 오로지 자기 몸 안에 내재화함으로써, 시인은 다섯 번째 시집 『귀신』(2014)에서, “무소불위의 착란”을 “부드러운 착란”으로 변화시킨다. 앞선 시집에서, 착란은 “중심이라 믿었던 것들의 비틀림을 고발하기 위해” “허공에 목발을 디딘 채 / 광대가 몸을 거꾸로 일으킨다”는 데서 시작되었다. 이제 그 자세는 “거꾸로 우뚝 선 무상(無常)”에 가까워지고, “거꾸로 쏟아지는” 혹은 “엉덩이로 하는” 말들이 그리는 “제멋대로의 그림”도 “세상 밖의 풍경인 듯” 관조적으로 읊어진다. “다른 원근법”에 의해, 없으면서도 있는 귀신의 그림자 혹은 기척 같은 언어로. 특유의 가학적/자학적 혹은 변태적 성행위가 그려질 때조차도 그렇다. 거기엔 “세계가 자신의 몸 속 같”고 “절멸은 몸 안에 숨은 눈을 다시 밝히는 일”이라는 인식이 밑받쳐져 있다. 그것은 죽음을 통해 실제의 “세계로부터 자신을 덜어내 다른 땅을 핥겠다는 소망”의 다른 경지다.
   이제 마지막 시집 『백치의 산수』(2016)의 시인은 “장님”이 되어, “폐광 속에” “스스로 폐광이 되어” 사는 “광부”다(허공 속에 제 몸으로 제 집을 짓고 사는 거미와의 대비!). 이 광부 시인이 저 홀로 “나는 나의 다른 입에게 / 말을 걸고 키스한다”는 자존적인 존재 방식은 그를 폐광이라는 “침묵의 영화관”에서 “어둠을 사역하는 영혼의 영사기사”로 만든다. 이 말은 요컨대 그가 자기 기억의 총체를 영화처럼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뜻한다. 과연, 이미 죽은 여러 ‘나’들이 등장하고 그들로 인해 ‘나’를 떠나버린 ‘너’ 역시 여러 각도에서 재조명된다. 이 과정에서 “병신춤”을 추는 자신의 “자화상”을 제시하고 “괴이해 보일수록 진심이 되는 춤”이라며 자신을 정당화하기도 하지만, 그 둘레를 더 크게 감싸고 있는 것은, “착각의 거울”을 들여다 본 것에 대한 자기 단죄, “거울에 갇혀 죽은 말을 읊조려대던 / 그 시절의 환몽”에 대한 후회, “동강 난 거울의 대륙이 / 내가 원하는 세상의 지도를 그려 줄 수 있을까”라는 회의, “뒤집힌 말들이 그려 놓은 이생은 한 번도 살 붙여 보지 못한 뼈다귀들의 공장”이었다는 회한들이다. 요컨대 이 시집은 10년 전의 『들려주느니 말이라 했지만,』과 쌍립을 이루는 반성의 시집, 중요한 기로에 선 시집이라 할 수 있다. 그 다음에 다시 어떤 꿈이 다가올 지는 아직 예측할 수 없지만 말이다.

   강정은, 그의 시를 그 자신의 언어로 재현하며 그 속에 집요하게 반복되는 강박적 요소들을 포착한 뒤, 그 조각조각을 재구성하고 종합함으로써 전체를 이해해나갈 수밖에 없는, 그런 시인 류(類)에 속한다. 그의 언어는 여과 없이 뱉어지는 대로 뱉는 듯 시종일관 무질서해 보인다. 쉽게 유추되고 조합되지 않는 이미지들이 천방지축으로 날뛰고 생경한 한자 관념어들이 예측하기 힘든 자리에 날아와 박힌다(1950년대 한국시의 어떤 실험을 되살리고 확장하듯이, 혹은 비의적인 박상륭 소설에 대한 시적 대응인 듯이). 그런데, 그 서툴고 거칠어 보이는—아마도 의도적이었겠지만— 언어들이 쌓이고 회오리치며 생성하는 것은 가히 우주적 카오스라 부를 만한 공간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언어의 무정부주의 상태로서(그는 짐짓 “사랑의 무정부주의”를 말했었다), 우리가 살아온 언어 질서가 얼마나 조잡하고 초라한 것인가를 역설적으로 깨닫게 하는 혼돈이다. 이에 대해 시인 자신은 “광언(廣言)만 요란했었다”(『백치의 산수』 머리말)고 자책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이 한국시의 언어를 혁신하는 단서가 될 수 있음을 높이 평가한다.

[『쓺』 5호, 2017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