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벼룩시장은 어디 있는가

문학의 벼룩시장은 어디 있는가

— 대중문화 시대의 ‘소수 문학’

sifl2017   나는 혼자인 것도, 남에게 자리를 내주고 쫓겨나는 것도, 그리고 떠나버려야만 하는 뭔가를 그게 무엇이든 떠나버리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 제임스 조이스, 『젊은 예술가의 초상』

    작년 봄, 프랑스의 파리도서전에 갔었다. 주최 측에서 한불수교 120주년을 기념해 주빈국으로 삼은 한국의 여러 작가들을 초대한 덕분이었다. 처음엔 쓸데없이 의례적인 행사들에 여기저기 끌려 다니기나 할까봐 망설였다가, 그래도 세계문화를 선도해온 프랑스라면 뭔가 새롭고 도발적인 면모를 보여줄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발길을 뗐던 것인데, 나는 곧 실망했다. <파리 엑스포>의 거대한 전시관을 둘러보자마자 그곳 역시 그저 그런 출판 무역시장에 불과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파리도서전은 다른 국제도서전에 비해 다국적 문화교류에 신경을 많이 쏟는 도서전으로 알려져 있지만, 나 자신도 참여했던 이런저런 교류 행사라는 게 실제로는 장사를 위한 장식적 이벤트 이상은 아니라고 여겨졌다. 그렇게 보자니, 전시장 한가운데 “새로운 지평”이란 구호를 내걸고 있는 한국관은 공허한 중심이나 다름없었다. 한국관을 빙 둘러 포위하고 있던 것은 프랑스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만화나 대중적인 추리․과학․환상소설 등과 아동물을 비롯한 특정 관심 분야의 기획 전시 공간 및 세계적 대형 출판사들의 거대 부츠들이었고, 언제나 그곳들이 더 붐볐다. 외국문학이나 어떤 특정 분야의 번역서를 주로 펴내는 소형 출판사들—한국문학의 대부분은 그런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의 부스는 가장 구석진 자리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한가했다. 한국관은 그때 국제정치적 명분 아래 일회적이며 상징적으로 정중앙에 위치해 있었지만, 한국문학의 실제 위치는 제일 외진 곳이었다고나 할까.
    파리도서전에서 돌아온 뒤, 서울시내의 대형 서점 몇 곳을 둘러보았다. 언제부턴가 책을 주로 인터넷을 통해 구입해온 나로선 꽤 오랜만의 나들이였다. 돌이켜보면, 우려와 기대가 복잡하게 교차하는 가운데 탄생했던 기업형 대형서점은 어쨌든 묘한 특성을 가지고 시작됐었다. 태생기의 대형서점은 대의명분에 맞는 구색을 갖추기 위해 시판중인 거의 모든 책을 전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법 그럴듯한 도서관 역할까지 했던 것이다. 그곳에 가면, 가령 어떤 특정 분야의 책들을 모두 비교 열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전혀 다르다. 우선 도서 전시 공간 자체가 갈수록 축소되고 있으며, 그 자리를 계속 잠식하고 있는 것은 각종 문방구류, 선물용 팬시 제품들, 시디와 디브이디, 컴퓨터와 모바일 기기들에 연관된 전자제품이나 액세서리들이다. 책 전시 공간에서도, 제일 시선을 끄는 자리는 당연히 최신 베스트셀러 몫이고, 그 곁엔 요즘 잘 나가는 자기개발․처세․재산관리 등에 관한 서적들, 흥미 위주의 가벼운 교양지식서들이 앞 다투듯 얼굴을 내민다(더 좋은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선 자릿값을 지불한다고 한다). 보행로 옆에 배치된 실용적 안내서—요리․여행 등의 각종 취미 관련—들의 개별 코너들 역시 화려하다. 조금씩 안쪽으로 밀려나고 있는 문학 코너로 가면, 여기서도 인기 ‘장르 소설’들이나 ‘청소년 소설’들이 먼저 눈에 띤다. 소위 순수문학으로 분류되는 책들은 대개 그 뒤쪽 서가에 세로로 꽂혀 있다. 거기라도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안 보이는 책이 있어 직원에게 물으면 따로 주문하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왠지, 그 책이 거기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부터가 민망해진다고나 할까.

    작년 가을엔, 밥 딜런(Bob Dylan)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었다. 그거 참 별일이긴 하지만 그런 일이 생기지 말란 법도 없겠다—라는 게 나를 가볍게 스친 첫 느낌이었는데(노벨문학상이라고 해서 무거운 느낌을 가져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으므로), 의외로 그 파장과 논란이 꽤 컸던 모양이다. 그것도 범세계적으로. 얼핏 훑어봤더니, 표층에 떠오른 시빗거리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되는 것 같았다. 첫째는 노래가사가 과연 문학일 수 있느냐는, 문학의 본질을 따지는 차원에서 제기된 반론이다. 둘째는 작품의 가치를 따지는 차원에서 약간은 감정적으로 제기된 반론으로, 상업적 대중가요가 예술의 이름에 값할 수 있느냐는, 그런즉 기껏해야 대중문화 수준에서 쓰인 노래 가사가 진정한 문학적 가치를 가질 수 있느냐는 것이다. 좀 더 깊이 들여다보니, 이 두 가지 반론의 심층에는, 이 시대의 여러 문화양식들을 가르고 묶는 미학적 ‘경계’가 어떻게 설정되어 있느냐, 그리고 그것이 미학적 ‘평가’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느냐는 문제가 깔려 있었다.
    첫번째 논란의 근거는, 문학을 문학으로 성립시키는 고유한 존재방식이 문자로 표현된 텍스트를 쓰고 읽는다는 데 있다. 그것이 다른 예술들과 미적 체험의 질을 구별 짓게 만드는 문학만의 물리적 소통방식이라면, 이번 노벨문학상 선정사는 “귀로 듣는 시”를 강조함으로써 문학의 근본적 토대에 대한 혼란과 오해를 불러들였던 셈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비교적 빠른 정리가 가능해보인다. 노래 속에서 가수의 목소리를 통해 발현되는 가사와 문자 텍스트로서의 가사를 분리해 양립 가능한 것으로 이해하면 별로 어렵지 않게 풀릴 문제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연극공연과 희곡의 관계를 참조하면 그 실마리를 찾을 법하다. 배우의 목소리에 담겨 극장에 울려 퍼지는 청각적 대사는 연극이라는 공연예술을 구축하는 다층적 기호들 중의 하나로 기능한다. 그것은 문학과는 다르게 존재하는 음성언어다. 반면 문자언어로 읽는 희곡은 시나 소설과 똑같은 방식으로 독자에게 작동하는 문학에 속한다. 이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면(고대 그리스 이래의 전통으로 인해 극작가들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데 대한 거부감은 없다), 노래가사도 마찬가지로 받아들여져야 하지 않겠는가. 텍스트로 읽는 노래가사는 얼마든지 시로 간주될 수 있다.
    두 번째 논란은 다분히 집단 무의식적 선입관과 관련되어 있는 듯하다. 밥 딜런은 평생 대중음악의 범주 안에서 활동해왔다. 그러나 그는 대중음악 안에서 기존의 대중음악—자신의 뿌리인 전통적 폭(Folk) 음악까지도—을 거부하고 혁신함으로써 대중음악사에 획기적 전환점을 마련해준, 가히 혁명적인 존재였다. 그 자신이 말하는바 “아직 존재하지 않은 것이 존재하도록 뭔가를 변화시키는 기회”로서의 노래들을 통해 전혀 새로운 음악적 감각과 사유방식을 대중에게 제공했고, 그들의 취향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특히 1960~70년대엔 ‘반(反)문화’ 운동의 정신적 선도자로 받아들여졌고, 지금도 저널리즘의 표현을 빌면 “세상을 바꾼 가장 뛰어난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남아 있다. 한마디로, 그는 대중음악계의 “창조적인 거인”이자 “살아있는 전설”이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찬사는 대개 그쯤에서 멈춘다. 다시 말해, 그를 대중음악이나 대중문화의 테두리를 넘어선 ‘예술’의 차원에서 평가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에게 노벨문학상을 수여한다는 것은 그를 순수한 시인 즉 예술가로 인정하겠다는 하나의 시도였을 텐데, 이에 대한 반발이 거의 자동적으로 표출된 게 또한 엄연한 현실이다. 대중문화와 예술의 분리․차별화가 뿌리 깊게 작동하고 있는 현실.

    대중음악 장르에 속해 있으니까 곧 대중문화라는 위와 같은 범주적 분류는, 그런데 대중문화를 보다 구체적으로 접할 때의 실제 상황과는 꽤 차이가 있어 보인다. 오래 전부터 내 머릿속에도, 그 둘을 분리하고 차별화하는 의식 장치가 내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장치가 한결같이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텔레비전에서 막장 드라마의 어떤 장면과 마주칠 때, 그 의식은 날카롭고 빠르게 반응하며 그걸 머릿속의 쓰레기 칸으로 밀어 넣는다. 그러다가 어떤 때는, 이건 잠깐 머리를 식히기 위한 용도라고 미리 괄호를 쳐놓고, 가치 판단을 배제한 채 요란한 액션 영화를 즐기기도 한다. 그런 경우와는 전혀 다르게, 때로 마음에 드는 대중가요를 들으며 거의 좋은 시를 읽는 것과 맞먹는 감상 분위기에 젖을 때는, 그런 구별의 의식 자체가 스스로 어디론가 숨어버린다. 대중문화가 워낙 폭이 넓고 종류도 다양해졌기 때문에, 비교적 확고하게 의미화되어 있는 예술과의 구별이나 가치 부여가 매우 상대적이며 유동적일 수밖에 없는 듯하다. 그러다보면, 도대체 어디까지가 대중문화이고 어디서부터가 예술이란 말인가 하는 의문이 고개를 쳐들기도 한다. 그 관계를 따지기가 너무 복잡한 물음이지만, 다만 한 가지, 적어도 그 둘 사이에 넘어설 수 없는 벽이 가로놓여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일단 역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본보기는 다름 아닌 문학, 그중에서도 소설이다. 역사적으로 관찰해보면, 근대소설의 전반기 역사는 대중문학으로부터 순수문학으로 이행하는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텐베르크 혁명’과 더불어 대량 복제 공급이 가능해진 최초의 근대적 대중매체로서 인쇄-책이 등장한 이후, 그 최대의 수혜를 입은 것은 바로 소설이었다. 산문으로 쓰인 근대적 소설은 원래 문학으로 취급받지 못했었다(우리나라에서도 조선시대에는, 소설이란 저잣거리의 ‘잡문’에 불과했다). 고전주의적 관점에 의하면 문학은 일단 운문이어야 했거니와, 그 ‘정수’에 도달하기 위한 이성적 원리와 규칙을 지녀야했다.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나 있던 소설은 그런데 역으로 그 자유로움을 구가하여, 인간적 욕망과 세계에 대한 상상을 거침없이 드러내며 독자들의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당대의 중심문화였던 연극 등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공적 장소인 극장으로 거동해야 했지만, 휴대 가능한 책을 매개로 했던 소설은 혼자서나 소수 모임을 통해 은밀히 즐길 수 있다는 장점마저 갖추고 있어서, ‘살롱’을 중심으로 한 사교계의 귀족과 대-부르주아 계급부터 점차 소-부르주아 계급이나 문자를 못 읽어 낭송으로 듣는 하층민까지, 광범위한 파급력을 발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오늘날 말하는 대중문화의 선행 모델이나 다름없었다(그 규모는 물론 지금과 비교해 매우 작았다). 프랑스 문학사를 참조하자면, 16세기의 라블레(Rabelais) 이후 몇몇 주목할 만한 작가들이 있긴 했지만, 17세기까지도 소설은 “즐겁게 시간을 때우는 데만”—17세기 당시, 한 문학이론가의 표현이다— 이용되는 오락물로 간주되고 있었고, 그 대부분은 실제로도 그러해서 미학적 관심이나 평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계몽주의 시대를 맞아 산문이 계몽의 효율적 도구가 되면서, 소설은 사상적 실험의 거처로서 “18세기에 진보한 유일한 예술 장르”—20세기 초, 한 문학사가의 표현이다—가 된다. 그리고 대혁명을 거쳐 19세기에 이르러 전 계급을 관통하는 문학이 된 소설은 점점 더 자기 정체성을 확립해가면서, 낭만주의․자연주의 등 시대적 사조를 이끌어가는 중심 장르로 부상한다. 가존의 대중소설류를 하위 장르로 밀어내고, 예술로서의 소설이 확고한 “문화적 정당성(légitimité culturelle)”—부르디외(Bourdieu)가 말하는—를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예술과 대중문화의 관계에서 기억해둬야 할 역사적 국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 역사는 어쩌면 지금으로선 시효 만료된, 그 옛날의 추억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본격적인 대중문화의 시대가 열린 20세기 이후에도 과연 그런 식의 진화가 재현될 수 있을까? 비록 그 역사가 매우 짧긴 해도 그 진화 속도는 더없이 빠른, 우리 시대 대중문화의 총아인 영화를 소설과 비교해 보면 중요한 차이점이 발견된다. 20세기 벽두에 “활동 사진”이라는 완전히 다른 매체의 발명과 함께,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형태의 대중문화로 출발했던 영화는 아주 일찌감치 “제7의 예술”로서의 야심을 드러냈었다. 그 야심은 1920년대의 독일 ‘표현주의’ 영화에서 시작해 1950~60년대의 프랑스 ‘누벨 바그(Nouvelle Vague) 운동에 이를 때쯤엔, 그 나름의 한 완성을 이루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영화사의 치명적인 문제는, 그 후에 예술로서의 영화가 대중문화로서의 영화를 이겨내지 못하고 급격히 뒤로 밀려난다는 점이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문화적 현실을 둘러보는 즉시, 이 사태의 심각성을 실감할 수 있다. 어디선가 이른바 예술영화라는 것이 만들어지고 있기는 한데, 그걸 보기가 너무 힘들다. 마치 별종들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라는 듯 저 구석자리 어딘가에 별도로 마련된 소규모의 예술영화 전용 상영관—일종의 ‘인디언 보호구역’?—을 힘들게 찾아가거나, 인터넷을 뒤지거나 어디선가 디브이디를 구해 혼자 봐야만 하는 것이다.
    물론 영화는 그 창작의 조건이나 규모부터가 소설과는 사뭇 다르다. 그래서 처음부터 자본을 필요로 하고, 그래서 수지를 맞추려면 대중취향적 요소를 배제하기가 쉽지 않고, 그래서 과거와 같은 개념의 온전한 예술—미학적 독창성과 완성도를 추구하는—을 지향하고 성취하기는 더욱이나 어렵다. 그런 차원에서, 과감하게 생각하자면, 영화는 자본에 입각한 제3의 문화 형태—대중문화와 예술의 변증법에 의한—의 가능성을 실험해나가는 장르가 될 수도 있을 터인데, 그런 기대 역시 백일몽에 불과한 듯싶다. 한층 강화된 할리우드 시스템이 갈수록 공룡처럼 커지는 영화산업화의 외길로 미친 듯이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시스템은 언제부턴가 영화관까지도 자신들의 통제 아래 거느리고, 생산․유통․소비의 전 과정을 완벽하게 장악해가고 있다. 동시에, 예술 지향적 영화의 생산과 소비는 그 시스템 밖으로 배제되고 있다. 생존을 위해, 그것은 이제 스스로 최소한의 자본을 마련해야 하는 ‘독립 영화’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 이는 비단 영화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미처 대처할 틈도 없이, 어느새, 예술의 이름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거대한 문화산업의 기류가 세계 전체를 뒤덮어버린 것이다. 넋을 잃고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에.

    이제 와서 넋을 추스른들, 그러한 현실을 피할 도리도 돌이킬 도리도 없다. 그러니 일단, 이 현실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서부터 다시 시작해보자. 우리는 지금, 대중문화가 상시적으로 도처에서 누구에게나 압도적인 지배력을 발휘하는 환경 속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하지 않는다(또는 못한다). 몸으로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즐길 때조차, 머리로는 그것을 용인하지 못하는 모순된 처지에 빠져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대중문화의 현실적 실효 체제와 우리 머릿속에 담겨져 있는 문화에 대한 관념 체계 사이에 파인 괴리를 그대로 반영하는 현상이리라. 문화의 척도였던 전통적인 고급문화 혹은 순수예술은 점차 그 상징적 권위를 상실해가고 있는데, 이를 대체하겠다는 듯 맹렬하게 지배력을 확장해나가는 대중문화는 정작 그 위세에 걸맞은 사회적 합목적성과 의미체계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무슨 까닭일까? 예측과 의미화가 힘들 정도로 변화무쌍하게 진행되어온 대중문화의 빠른 전개 속도 탓이었을까? 아니, 혹시 대중문화 자체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정당화하는 명분 따위엔 애당초 관심조차 없었기 때문은 아닌가? 만약 그랬다면, 무엇이 이토록 어마어마해진 대중문화를 여기까지 이끌어온 추동력이었단 말인가? 오로지 경제적 이익을 취하기 위한 시장 논리?
    되돌아보면, 대중문화와 상업주의—더 나아가 산업주의—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어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더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겠지만 대략 20세기로 진입하던 시기에, “각종 대중매체를 통해 대중과 광범위하게 접촉하는 일상 속의 여가문화”라는 의미의 현대적 대중문화가 시작될 때부터, 이미 그랬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삼는 대중매체는 투자형 기업이 될 수밖에 없고 돈을 들인 만큼 돈을 뽑아야 유지되니까, 상업적 경쟁은 불가피하다. “낙양의 지가”를 올리고 시청률을 늘리고 등등. 더욱이, 그새 우리가 겪어왔듯, 그 매체들은 무수히 증식해왔으며(신문․잡지․음반․라디오․텔레비전, 그리고 영화관 화면과 극장 무대, 운동장이나 클럽, 나아가 컴퓨터나 모바일 기기 같은 디지털 매체에 이르기까지), 그것이 실어 나르는 대중문화의 형태들 역시 다양하기 그지없어졌다(연재소설․사진․만화․가요․영화․드라마․쇼 등에서 각종 공연물이나 스포츠, 컴퓨터 게임까지, 어쩌면 광고까지도). 문화학자들은 모두들, 대중문화가 20세기 과학․기술의 혁신적 발전과 광대한 대중 소비사회의 형성이 결합하여 빚어낸 새로운 사회적 풍경임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갈수록 더 기술 의존적인 대량 생산 산업의 경향을 띨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대중문화 산업은 통상, 독립된 감상자로 하여금 그 감상 대상과 1:1로 마주하며 심미적 관심을 집중하게 만드는 예술 ‘작품’과는 정반대로, 최대한 많은 다수가 동시에 즉각적인 감각 반응을 보이며 그 반응의 즐거움을 한껏 소비하도록 유도하는 오락 ‘제품’들을 대량 복제와 공급이 가능한 방식으로 생산한다. 이 생산 과정은 대략 이럴 것이다: 1) 시기나 상황에 따라 소비자 기호가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하고 있는지에 관한 시장 조사를 바탕으로, 2) 그에 부응하는 소재․주제․성격․정서 등을 면밀하게 선별하여 그것들을 조립하고 종합하는 맞춤형 이야기나 시청각적 형식을 구성한 뒤, 3) 세부 항목별로 계산된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필요한 전문적 작업들을 분업 및 협업의 방식으로 진행한다. 그런 관점에서, 주류 대중문화산업의 산물들은 대부분 일시적 기획 상품이라 할 수 있다. 요즘에 익숙한 K-pop 댄스 뮤직을 예로 들자면, 정해진 대상과 목표에 맞춰 정교하게 고안한 특정 프로그램에 따라 구성된 곡들은, 그 프로그램이 입력된 그룹 멤버들—인격까지도 만들어져 부여된 인간 로봇들—에 의해 뮤직 비디오에서나 공연 무대에서나 기계적인 리듬과 멜로디 그리고 목소리와 춤을 반복해 팔아먹다가, 시효 만료되면 즉각 폐기된다.
    그런 식이다 보니, 대중문화의 효율적 상품화를 위해서는 기본 질료부터 제작 방법론에 이르는 모든 것들의 표준화․도식화가 필수적이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유명한 비판들이 떠오르는 대목이기도 한데, 영화의 경우에 우리가 흔히 접하는 하위 장르 분류(애정․역사․추리․공포․폭력․과학․환상…)가 웅변하듯이, 그것은 코드화된 유형적 세계(최근엔 가령 좀비 이야기)를 반복하고 확대하며 재생산한다. 영화에서 어디선가 본 듯한 ‘데자-뷔’ 현상이 자주 일어나는 이유가 거기 있다. 대중음악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수집하고 축적한 모든 정보들이 저장된 데이터 창고에서 그때그때 필요한 조각 자료들을 몇 가지 명령어로 끌어내 표절 시비를 살짝 피해가며 그럴 듯하게 재조립하는 방식, 이것이 필경 대중문화 산업의 전형적 운영 체계일 것이다. 예전에 바르트(Barthes)가 “절단과 정돈”이라는 “두 가지 전형적 조작”을 통한 “구조주의적 활동”이라 부른 것이 아주 실용적인 형태로 대중문화 판에서 실천되고 있는 꼴이다. 대중문화가 함의하는 ‘창의력’이란 그런 ‘조작’을 더욱 더 잘 행하는 것 이상일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결국 자기만의 “닫힌 세계”—홉스봄(Hobsbawm)이 우려한—를 구축하고 고착화시키는 방향으로 치달려 가는 것이리라.
    갈수록 산업화되어가는 대중문화는, 정치적 용어를 쓰자면, 일종의 문화 ‘제국’을 지향하고 형성해가면서 전체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띠고 있다. 최대한 많은 대중을 “닫힌 세계” 속에 가두고 충성심 강한 소비자로 만들어 우려먹으려는 대중문화의 기본 전술은 단순하고 직선적이다. 요컨대, 대중을 온갖 재미들만으로 구성된 환각적 세계에 중독시켜라! 특히 디지털 매체의 발명 이후 대중의 감각을 사로잡는 기술력이 가속적으로 발전하면서—‘가상현실’을 넘어 ‘증강현실’까지 등장했다—, 이 노선은 더욱 노골화되고 있다. 디지털 기술력이 인류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문화혁명이라도 되는 듯 문화의 장(場) 전체를 흔들고 있지만, 그리고 그 가능성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지금 그것이 실제로 초래하고 있는 현실은 게임 중독자들을 양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즈음의 대중문화는 스스로 반성하는 법이 없다. 무엇에든 ‘포스트’라는 수식어가 앞장서는 시대를 맞아, 인간적 반성 장치 같은 건 언제부턴가 완전히 제거되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거기엔, 어떤 ‘상징적 가치’를 찾아 저 옛날의 소설이 그랬던 것처럼 예술이 되고자 매진해보겠다는 진정성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경제적 가치’를 창출해 시장을 지배하고 시장의 논리로 모든 것을 재단하려는 거대한 괴물 기관처럼 보인다. 이게 너무 지나친, 극단적인 판단일까?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의 실존적 상황을 자기 뜻대로 조성해가고 있는 막강한 대중문화의 위세 앞에, 우리가 지금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생존 그 자체마저 위협 받는 풍전등화의 신세나 다름없다. 과연 예술의 미래는 무엇일까? 희망을 품자면, 새로운 문화 환경에 적응하며 그것을 혁신하는 새로운 예술 양식의 탄생이 예술의 맥을 이어줄 수도 있다. 예컨대 대중문화의 근거인 대중매체의 기능을 전복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은 없을까? 우리는 그 전조를, 텔레비전의 기존 기능을 제거하고 거기에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시각적 능력을 부여했던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에서 이미 목격한 적이 있다. 최근의 디지털 매체를 통한 ‘뉴 미디어 아트’란 것도 그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는 바, 아마도 그런 것들은 마치 돌연변이처럼 기습적으로 태어날 가능성이 높다. 대중문화가 상업주의에 기초해 있는 한 그 ‘제국’ 내부의 경쟁도 불가피해질 텐데, 그 경쟁이 초래하는 균열의 틈새에서 파괴와 창조를 동시에 수행하는 전위적 활동이 개시될 수 있다는 말이다. 소비의 측면에서, 재미란 것도 그렇다. 눈앞에 온통 재미만 있다면 재미의 자극도 한계에 이르고 재미 자체가 재미없어지게 마련이다. 그것이 자폐적으로 닫힌 시선을 세계 전체를 향한 열린 시선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된다면, 창조와 향유가 맞물린 새로운 예술의 길이 뚫릴지도 모르겠다.
    자본의 놀라운 통제와 변신 능력을 고려할 때 그게 얼마나 지속 가능할지 예단하기 어려우나, 아무튼 한편에 위와 같은 희망이 어렴풋이나마 열려있다면, 기존의 원형적 예술 양식—문학․미술․음악 등—들은 어떻게 될까? ‘원형적’이란 표현은 그것들이 거의 인간의 역사와 함께 해온 유전적 자질에 가깝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거기엔 보존해야 할 무엇인가가 담겨있을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즈음 그것들을 도서관이나 박물관에서 끄집어내 써먹고 있는 것은 오히려 대중문화 쪽이다. 아마도 자신의 일천한 역사를 보충하는 자양분이 필요한 까닭이리라. 예를 들어 어떤 동영상을 연출할 때, 한 장면을 그럴듯한 그림으로 구성하고 그 배면에 멋진 소리 효과를 깔기 위해선 미술과 음악이 여전히 유용할 것이다. 재미의 가장 큰 원천인 ‘이야기(story)’가 무궁무진하게 축적되어 있는 문학은 말할 것도 없다. 물론 대중문화를 포장하거나 장식하기 위한 이런 짜깁기 활용은 본질적 보존이 아니다. 더구나 그저 보존하는 게 중요한 것도 아니다. 누누이 암시해왔지만, 문제의 핵심은 그것들이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사회의 진화에 동력을 제공하는, 살아 움직이는 문화적 실체가 될 수 있느냐는 데 있다.
    이제 그 의문을, 의사소통의 근본인 언어를 질료이자 방법으로 사용하는, 그래서 명목상으로는—허울일 뿐일지라도— 아직도 가장 중심에 위치한 문화인 문학을 통해 잠깐 더듬어보겠다. 문학은 인류 최초의 대중매체인 인쇄-책과 더불어 한동안 번창했지만, 20세기를 가로지르는 동안 보다 파급력이 강한 새로운 대중매체들이 연속적으로 등장하면서 실질적으로는 거의 쇄락의 단계에 이르러 있다(더 이상, 굳이 부인하려들지 말자!). 문학은 문자를 소통 기호로 사용하는 특성상 명백한 한계를 안고 있다. 누구나 느끼듯, 문자 문화는 시청각 문화에 비해 전달 속도가 느리고 전달 효과 또한 직접적이지도 광범위하지도 못하다. 이는 단지 전파나 디지털 매체를 타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 ‘전자-책(E-Book)’이 생겨난 지 꽤 되었어도 약간의 편리성 외에 이전과 다른 특별한 변화를 유발하지 못하는 이유는 문자가 인간의 두뇌나 감각에 작용하는 방식에 있다. 시청각 기호가 생각을 개시하기도 전에 우리의 육체적 감각에 즉각적이며 집단적인 자극을 가하는 반면, 문자 기호는 그것을 해독하고 이해하고 종합하는 일련의 정신적 활동을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이르는 어떤 지각, 사유, 상상도 일차적으로는 독자 개인의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그것이 다시 사회적 의미가 되려면 개인들 간의 대화와 토론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작가와 독자가 1:1로 대면하면서 시작되는 문학의 소통 구조는 곧바로 그 생산과 유통 규모의 한계로 이어진다. 책 한 권의 생산량을 아무리 늘려도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 한 편의 수익성을 따라갈 수가 없다. 문학은 오랫동안 예술로서의 문학과 대중문화로서의 문학이 양립해왔는데(순수문학/대중문학), 그간 무력감에 빠져있던 대중문학이 최근 흘러가는 방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거의 대중문학이 순수문학의 태를 내며 둘의 경계를 흐리려는 전략을 선택했었다면, 지금의 대중문학은 순수문학과 결별해 대중문화의 대세에 합류하는 쪽으로 물꼬를 트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만화처럼 하위 장르들의 특성화를 추진하는 게 금방 두드러져 보인다. 그 연장선에서 더욱 눈 여겨 보아야할 현상은 이른바 ‘웹 소설’ 같은 것이다. 이것들은 솔직히 그 구성이나 서술 방식 등을 따지면 소설이라 부르기조차 민망한 수준에서 과거의 신문 연재소설 형태가 웹 페이지에 재현되는 것으로, 이것들은 애초부터 문학에 대한 자의식도 미련도 없는 듯하다. 여기서는 오로지 수익과 직결된 조회수가 중요한데, 그것으로 측정된 대중적 인기도는 영화나 드라마 등의 ‘컨텐츠’가 되느냐 못되느냐 하는 지표이기도 하다. 글쓰기 스타일부터가 ‘대본’에 가까운 ‘웹 소설’들은 실상 그런 경로를 통해 주류 대중문화의 한 부분으로 편입되는 게 궁극적 목표라 할 수 있다.
    대중문학의 노선이 노골화되자, 순수문학 즉 예술로서의 문학은 더욱 고립되고 있는 형국이다. 문학이 자리 잡고 있던 문화의 옛 중심지는 독자들의 발길이 뜸해지고 쇄락하면서, 동공화(洞空化) 현상이 뚜렷하다. 그리고 그 둘레를 포위하고 있는 대중문화는 금방이라도 문학을 수몰시킬 듯 점점 더 압박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절망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거기에 맞서 순수문학이 내세울 수 있는 특단의 대책은 없어 보인다. 저 자신의 정체를 직시하며, 오로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성찰하며 길을 찾는 것 외에는! 그러려면 먼저, 책이 유일한 대중매체였던 시절에 누린 문학의 명성과 영예, 그로 인해 아직도 문학에 덧씌워져 있는 과대망상의 거품을 걷어내고, 이 시대의 전체적인 문화 지형도 속에서는 문학이 거의 수공업에 가까운 소형의 문화 생산 양식—다시 부르디외의 용어를 쓰자면 “제한 생산 부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순수문학은 더구나 그렇다. 이제 순수문학은 언어를 한 뜸 한 뜸 짜나가는 작업을 통해 “대규모 생산 부문”인 대중문화와 그 근본부터 차별화되는 고유의 역할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대중이라는 무정형의 거대 집단에 대한 환상을 벗어나 개인과 개인이 언어 그 자체를 일깨우며 대화하는 관계의 문화로서, 대중문화의 숨 가쁜 속도전에서 비켜난 느림의 문화로서. 그러나, 그에 앞서 일단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순수문학은 이 대중문화의 와중을 시급히 탈출해야 하는 게 아닐까?…

    여기까지 끌고 온 산만한 상념들을 마무리 짓기 위해, 마지막 초점을 예술로서의 순수문학에 모아보도록 하겠다. 바로 위의 “(순수문학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도”라는 표현이 과장되게 들린다면, “위상을 바꾸기 위해서라도”라는 표현으로 대체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그 둘은 한 뜻으로 수렴되겠지만, 아무튼 문학은 자신이 놓여 있는 이 상황으로부터, 그리고 이때까지의 제 모습으로부터 과감히 떠나야 한다는 게 나의 판단이다. 막다른 곳에 선 순수문학은 어떤 결단의 시점에 처한 것이다. 내가 이 발제문 첫머리에, 지금부터 101년 전에 발설된 한 ‘젊은 예술가’의 고백을 인용해 놓은 것도 그 때문이다. 그것은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1916) 거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한 구절로, 그때 조이스의 분신이라 할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일랜드라는 억압적 상황을 벗어나려는 한 주체적 예술가로서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행한 실존적 ‘투기(投企)’는, 지금의 순수문학—이건 개인적 주체가 아니라 집합적 주체지만—이 범세계적 문화 현실 속에서 취해야 할 결연한 태도를 예시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1세기 전의 ‘젊은 예술가’의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해보자고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취해야 할 그 결연함은 위 인용 구절의 몇 줄 앞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조이스의 분신은 “내가 더 이상 믿지 않는 것을 섬기지 않겠다”면서 덧붙인다. “나는 어떤 삶이나 예술의 방식을 통해, 가능한 한 자유롭게, 그리고 가능한 한 완전하게 나 자신을 표현하려 노력할 거야. 나를 방어하기 위해 내 자신에게 허용한 유일한 무기들인 침묵, 유배, 그리고 계략을 사용하면서 말이야.” ‘자유롭게’와 ‘완전하게’에 밑줄을 그어두자. 그리고 ‘나 자신’에는 이중의 밑줄을 긋자. 나 자신에 철저하고 정직해야 진정한 문학적 소통이 시작될 테니까. 나를 방어하는 무기에 대해 말하자면, 침묵은 주류 언어로 변명하지 않고 외로움을 견디는 것, 유배는 기꺼이 주류 언어로부터 저 자신을 이탈시키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계락은? 그것은 주류 언어의 질서를 흩트리는 글쓰기의 어떤 전략이 아닐까? 그런 뜻이라면, 이 계략의 실패는 작가로서의 모든 시도의 실패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실패를 두려워해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단호하다. “그리고 나는 어떤 잘못을 저지르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게 설사 커다란 잘못, 평생을 따라다닐 잘못, 어쩌면 영원히 이어질 잘못이더라도.”
    그렇다면 이 자기 유배의 목적지는 어디인가?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불행 혹은 저주를 각오해야 한다. 더욱 정교해진 대중매체와 대중문화의 그물망이 세상을 뒤덮어가는 상황 속에서, 순수문학의 이 유배에는 어떤 고정된 유배지 혹은 피신처가 따로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유배는 곧 유랑이다. 때때로 엿보이는 대중문화의 빈틈을 찾아 스며들었다가 다시 빠져나오기를 거듭해야 하는 언어의 유랑. 그렇다면 그 유랑이 꿈꾸는 것은 무엇인가? 대중문화의 질곡을 벗어난 소수의 문학적 떠돌이들—작가로서나 독자로서나 마찬가지로—이 사방을 헤매다 서로를 알아보며 잠시 모여들어 그들만의 관계를 얽는 허공 속의 섬, 부유하는 소통의 섬들을 끝없이 만들어 가는 게 아닐까? 그 섬은 어쩔 수 없이 문학적 소수 집단의 일시적 결합체이자 정처인 아주 작은 섬일 것이다. 이때의 ‘소수(집단)’ 개념은 들뢰즈(Deleuze)의 카프카론에서 빌려온 것인데, 안 소바냐르그(Anne Sauvagnargues)의 해설에 따르면 그것은 “한 사회의 주류 규범의 균형을 깨트리는 소수의 실행 혹은 소수화의 실행을 특징적으로 규정한다.” 주류 대중문화의 외곽지대로 밀려나 있는 ‘비주체적’ 소수로서의 ‘주체적’ 실행, 그리고 기꺼이 스스로 소수에 속하고자 하는 능동적 소수화의 실행이 동시에 도처에서 벌어질 수 있다면, 언젠가 문화의 시야는 다시 달라질 수 있을지 모른다. 무수한 섬들이 각양각색으로 펼쳐지며 이루어내는 아름다운 다도해 풍경처럼.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 그 섬에 가고 싶다”는 정현종 시인의 「섬」을 문득 다시 읊조리게 된 건 작년 봄의 파리도서전에서였다. 그때, 나는 처음 만나는 외국 작가들과 함께 공개 좌담회 비슷한 행사를 마친 뒤 한국관 바로 옆 통행로에 마련된 개인 사인회 자리에 한 시간 동안 앉아 있어야 했다(초청의 의무사항이었다). 말이 사인회지, 그때 느낌으로, 나는 거의 현대식 슈퍼마켓 안에 조그만 좌판을 펼쳐 놓은 구식 수공예품 장사나 다름없었다. 사람들은 통행로를 오가며 힐끔힐끔 내 프랑스어 번역판 책들과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스쳐갔다. 그 사이에 내 책들의 표지가 예뻤는지 내 한국적 얼굴이 신기했는지 다섯 권의 책이 팔리긴 했는데, 저들이 내 책을 읽기나 할까 혼자 궁시렁거리던 나에게 충격을 준 한 순간이 따로 있었다. 거의 한 시간이 다 되었을 무렵, 아까부터 저쪽에 서 있던 웬 중년의 사내가 주춤주춤 다가오더니 가방 속에서 이미 때가 낀 내 소설책 한 권을 꺼내들고는 거기에 사인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어떤 기회에 그 책을 읽어 좋았고 우연히 이번에 내가 온다는 것을 알게 되어 사인을 받아 간직해두고 싶다는 뜻이었다. 나는 뜻밖의 사태에 반쯤 멍해지고 반쯤 감동 받았던 것 같다. 아, 프랑스에서 최소한 한 사람은 분명히 내 소설을 다 읽었구나.
    금년에도 어김없이 파리도서전은 열렸지만, 아무도 어떤 언론도 그 소식을 전해주지 않았다(뒤늦게 웹 사이트를 찾아보니 금년도 주빈국은 모로코였단다). 뭐, 그런 게 지금의 시장이란 것이다. 자기 이익이 관련되지 않으면 금방 관심을 꺼버리는 것. 그럼에도 진정한 문화 상품이 유통될 수 있는 뭔가 다른 시장은 없을까? 가령 문학이 소수화를 추구할 때 열릴 수 있는 시장은 어떤 것일까? 작년도 파리도서전이 끝나던 날, 일요일, 나는 <파리 엑스포> 전시관으로 가는 대신 후배 작가 두 사람과 몽파르나스 묘원을 산책했었는데, 보들레르 ․ 사르트르 ․ 베케트 등의 묘지를 순례하고 나오자, 묘원 앞의 길쭉한 광장 한 편에는 임시 천막들로 설치된 일종의 미술 벼룩시장이 열려 있었다. 천천히 그 가운데를 가로지를 때, 웬 조그마한 조각품 하나가 내 눈을 찔렀다. 처음엔 허기를 달래는 게 더 급해 그냥 지나쳐 식당으로 갔지만, 허기를 달래도 그 눈엣가시가 빠지지 않아 다시 그 천막을 찾아갔다. 당연히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길래 나는 그것을 구입했고, 그건 지금 내 집의 거실에 놓여 있다. 고개를 숙인 채 온몸이 흘러내리는 듯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세라믹 인물상. 그걸 볼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너는 나다.” 그리고 혼자 묻는다. 너를 내게 보낸 미술의 벼룩시장 같은, 문학의 벼룩시장은 어디에 있는가? 아직 없다면, 어디에 어떤 형태로 있어야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