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말] 불연속성의 선물, 소설 | 박혜상 |

[4월의 말] 불연속성의 선물, 소설 | 박혜상 |

parkhyesang   영화 <컨택트>를 보았다. 테드 창의 중편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가 원작인 이 영화는 지구 곳곳에 출몰한 외계인과의 소통 과정이 여성 언어학자 루이즈 뱅크의 나레이션으로 전개된다. 영화와 소설이 어떻게 다를까 궁금해 소설을 읽었는데, 생각보다 크게 다르지 않았고, 두 가지 모두 영화와 소설의 각 형식이 지니는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영화 속에서 외계인들이 긴 다리를 뻗쳐 흩뿌려 쓰는 검은 원형의 형상은 과거 현재 미래가 동시에 모두 들어 있는 어의문자이다. 외계인들의 문자처럼 작가는 서사를 과거와 현재, 미래가 뒤섞인 입체처럼 제시하고자 한다. 불연속성의 원이라는 말이 가능할까? 말하자면 외계인들의 문자는 하나의 이야기인 셈이고, 작가는 뒤섞인 서사를 시작과 결말을 결합하는 수미쌍관식으로 봉합한다. 이 봉합은 그들의 언어 형상처럼 닫혀 있는 것이 아니고 열려 있다.
    특히 영화에서 혼동을 야기하는 아이에 대한 기억 장면이 회상이 아닌 미래의 사건임을 보여주는 결말은 소설에서는 전혀 반전의 효과를 주지 않는다. 아이를 향하여 건네는 미래형의 서술 시제는 특별하게 읽히지 않았다. 영화를 미리 봤기 때문인지, 아니면 시제가 명확하지 않은 우리말의 특성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현재와 과거, 미래가 동시에 서술되고 있는 상황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생각해 보니 소설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무엇보다 존재 자체가 그러하다. 시간이라는 개념은 인간의 존재 형식과 동의어가 된다. 그런 면에서 이 이야기가 주는 메시지로는 원제인 이 더 어울린다. 일차적으로는 미래를 상징하는 외계인의 도착이겠지만, 도착, 당도 라는 말은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품고 있는 인간 그 자체, 혹은 시간 그 자체를 드러내주는 말이기도 하다. 서사의 주체란 말도 이를 의미할 것이다.
    무엇보다 작가가 밝힌 대로, 이 소설의 모티브이자 주제라 할 ‘미래의 기억’이라는 형용모순은 소설이라는 형식을 보여준다. 이야기는, 인간이라는 현존재에게 미래란 이미 와 있는 죽음과 같은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향하여 살아가는 인간의 숭고함을 제시하는 것 같다. 그러한 존재론적인 인식이 깔려있는 이 이야기는 내게 작가의 언어학적 고찰이나 과학적 이론의 흥미보다는 죽음에 관한 힐링 서사로 다가왔다. <인터스텔라>와 유사한 아날로그적 감성이라고 할까. 하긴 SF적 상상력이야말로 고전적인 주제, 즉 시간적 존재인 인간의 불가능성과 가능성을 사유하는 대표적인 방식일 것이다.
    결코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는 인간에게 시간을 되돌릴 유일한 방법은, 달리 말하면 시간의 연속성을 깨고 그 흐름을 멈추게 하는 것은 허구인 소설이라는 불연속의 형식밖에 없다. 이 일상의 비가역성이 우리를 꼼짝없이 비통하게 하는 것은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을 겪을 때이다. 사건이 벌어지기 전의 시간으로 되돌아가는 상상을 반복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그 상실감의 심연을 알 것이다. 온전히, 오로지, 온종일 그 상상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무엇인지… . 우습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그 표상은 사랑하는 연인을 잃고 온힘을 다하여 지구를 거꾸로 돌아 사건이 일어나기 전으로 시간을 돌리는 슈퍼맨의 얼굴이다.
    영화에서 결국 외계인은 신과 같은 존재이다. 의미를 한꺼번에 도형의 형태로 표현하는 그들의 문자는 미래를 포함하고 있으며, 루이즈는 그들의 언어 습득을 통해 미래를 보는 능력을 지니게 된다. 과거 현재 미래의 순차적 시간 인식이 아닌 동시적이고 종합적인 인식 능력은 인간에게 선물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선물은 그다지 달가운 것이 아니다. 불행한 미래를 알고 있을 뿐이니, 오히려 가혹하다. 결과적으로는 지금의 인류의 처지와 별 다를 것이 없는, 달리 말하면 죽음을 향해 가는 현존재의 처지를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를 잃고 비탄에 빠진 사람이라면 그를 다시 만나게 되는 일인데 그것이 어찌 선물이 아닐 것인가. ‘그 아이’의 죽음을 알면서도 다시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그 아이를 향한 나의 온전한 애도를 말하는 것이리라. 수천 번 수만 번이라도 반복할 그 아이를 향한 나아감이 가능하다면, 그것이야말로 상실의 심연을 향한 유일한 실체적인 선물일 것이다.
    얼마 전에 종영한 <도깨비>라는 드라마도 그렇게 보았다. 죽음의 반복과 일상화를 통해, 조금이나마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건네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보였기 때문이다. 요즘 드라마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타임 슬립의 테마는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일시적으로 지나가는 트렌드만은 아닌 것 같다. 아니어야 한다가 맞을 것이다. 기억으로 존재하는 미래의 아이를 향한 루이즈의 이야기는 죽음을 안고 살아가는 현존재 형식에 대한 은유로 읽는 것이 더 나은 해석이겠지만, 그것이 아이의 죽음 이라는 실질적인 비극적 사건으로 읽히는 것은 아마도 ‘그날’의 사건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그 세 음절의 말이 오늘 저 광장을 떠들썩하게 하는 데에는 적용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분명 알고 있다. 이 사태의 중심에는 ‘그날’, ‘그것’, ‘그일’… , 온갖 지시대명사로 수식해도 모자랄, 절대 받아들여지지 않는, 저 물 속 깊이 가라앉아 있는 그 사건이 있다는 것을.
    사건의 진실은 존재한다. 하지만, 사건의 사실과 전후관계가 명백하게 밝혀져도 끝내 드러나지 않는 진실은 존재하고 또 그 진실은 아무도 모르는 것일 수 있다. 우리가 가는 방향은 진실을 밝히기 위한 과정,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숭고한 과정일 것이며, 소설은 불가해한 삶의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 그 자체이다. 그것이 말짱 허구인 소설에서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진실을 찾는 이유일 것이다.
    소설 쓰고 있네 라는 말이 어떤 위력을 발하는지 보여주고 싶기도 한 요즘이지만, 여전히 나는 그 사건을 어찌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다만 어떤 형식으로도 말하기 쉽지 않은 그 사건이 ‘지금-여기’의 심연에 놓여 있음은 분명하다.
    묻고 싶다. 혹시 당신도 시간을 ‘그날’로 되돌려 본 적이 있는지.

소설가. 2006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다. 소설집 『새들이 서 있다』와 『그가 내린 곳』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