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말] 여성과 문학 | 이경진 |

[3월의 말] 여성과 문학 | 이경진 |

leekyungjin   지난 겨울방학에 <여성과 문학>이라는 교양수업을 처음 맡게 됐다. 사실 불과 몇 해 전까지였다면 이 수업명에 너무도 자연스럽게 들어가 있는 저 접속어 ‘과’를 관성적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런데 소위 ‘넷페미’라 불리는 이십대 여성들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온라인 페미니즘의 성공(많은 새로운 지지자들을 끌어 모으고, 다양한 사회 영역에 이전보다 대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치운동이 되었다는 의미에서)을 피부로 느끼면서, 나 역시 처음 페미니즘을 접했던 대학 새내기 시절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되었고, 그때의 진지함과 과격함에 부끄럽지 않은 커리큘럼을 짜야 한다는 의무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다시 말해, 나는 저 ‘여성’과 ‘문학’의 결합이 가리키는 여러 가지 의미들(여성들이 쓴 문학, 여성들의 문제를 다룬 문학, 혹은 문학에서 여성 재현의 문제, 여성 작가의 정체성과 사회적 역할, 여성의 언어와 여성적 글쓰기, 문학사에서 여성 독자의 역할, 소수자문학과 여성문학 등)을 새롭게 열어준 ‘페미니즘 문학’의 의미를 다시 고민하게 되었고, 20대 초반의 수강생들에게 현재적인 의미로 다가올 수 있는 페미니즘 소설의 리스트를 업데이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작업은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적어도 2000년대 중반부터 ‘페미니즘 문학’이라 부를 수 있는 한국소설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여성주의에 대한 고민을 멈추기 시작했던 시점이 딱 그때쯤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이때가 공교롭게도 한국 사회에서 여성주의 운동이 활력을 잃기 시작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어쩌면 문학장 내에서 ‘페미니즘 문학’이나 ‘페미니즘 비평’의 필요성 자체에 공감하는 분위기가 사라졌던 시점도 이때 즈음이 아닌가 싶다. 이것은 어떤 측면에서는 나쁜 징조라 보기 어려운데, 이미 많은 여성작가들이 한국 문단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고, 그들이 다양한 여성들의 문제를 언어화한 바 있기에 여성작가들이 굳이 여성적 정체성을 내세우거나 스스로를 여성으로 의식하면서 글을 쓸 필요가 없어진 시대가 온 것일 수 있다. 그러다보니 여성적 감성이나 여성적 글쓰기를 탐구하는 것 자체를 과거의 유산으로 느꼈을 수 있고, 오히려 선배들이 개척해 놓은 ‘여성적’ 언어 자체를 본인들이 깨고 나가야 할 감옥으로 여겼을 수도 있다. 여성작가들은 이제 딱히 누구를 대변하거나 선도할 필요도 없고,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언어와 주제의식을 탐구하면 되는 좋은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2016년 가을에 나는 그런 내 생각이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편리하게 작용하는 시각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문단 내 성폭력을 둘러싼 온갖 발화들에 부딪치면서 지금까지 문학장에서 강력하게 통용되어 왔던 문학의 많은 논리들에 ‘여성혐오’가 보이지 않는 전제로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목도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성폭력을 성폭력으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문학의 여러 논리들을 낙후한 것으로 폐기하기 위해서든, 혹은 이로써 지금까지 가능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 드러난 문학의 ‘순수성’이나 ‘자율성’을 새롭게 구성하기 위해서든, 이제 문학을 말하기 위해서 현재의 문학성 개념을 비판적으로 점검하고 탈해체하는 작업을 선행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문학에서 페미니즘은 여전히 할 일이 많고, 그것은 한국 문학에서 곧 비평이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애초의 나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페미니즘 소설의 리스트를 업데이트하면서 나는 왜 이렇게 막막함과 곤란함을 느꼈던가? 그것은 단지 지난 10년 간 나의 무관심을 비롯하여 문단에서의 페미니즘의 위축을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새로운 페미니즘 문학이 있는가 묻는 것은 현재 문학이 어떻게 정치적으로 새로우면서도 문학적으로 새로울 수 있는가, 라는 어려운 물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현재 페미니즘 문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문학에서 페미니즘적 문제의식을 현재화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가? 페미니즘적 실험과 문학의 실험을 동시에 수행하는 작품이 있는가. 앞으로 새롭게 구성되어야 할 문학성은 작품을 바라보는 시각에 어떤 변화를 요구할 것인가, 등등 나로서는 너무나도 어려운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 질문들은 구체적인 작품 읽기의 과정에서 더욱 혼란스럽게 제기되었다. 예컨대 내가 보기에 박민정 작가의 소설들은 ‘동시대’ 페미니즘 소설로 논의해볼 만한 점이 분명 있었다. 작가의 첫 소설집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민음사, 2014)에서는 최근 한국사회를 뒤흔든 페미니즘의 경향과 평행하는 무언가가 감지된다. 이 페미니즘은 그 에너지가 ‘여혐’이라는 단어에 응축되어 있고, 이슈 자체도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서의 ‘성폭력’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특징인데, 박민정 소설의 서사적 관심의 중심에는 언제나 ‘성폭력’이 있다. 「기념일들」에서 구타를 일삼으며 중절 수술을 종용한 남편은 엘리베이터에서 초등학생 여자아이를 강간하고 사라지며,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에서 절름발이 남자는 형의 사주를 받아 형의 아이를 임신한 여성과 동거하며 그 아이를 뗄 기회를 노린다. 「옛날옛적 미국에서」는 부모가 자신의 딸이 사촌오빠들에게 성추행 당하는 것을 방관한다. 소설집의 해설을 쓴 윤경희 평론가는 박민정 소설이 “기원적 폭력”(234)에서 시작된다고 적확하게 지적하였는데, 이 소설집이 2015년 이후에 나왔다면 이 폭력은 ‘성폭력’이라고 보다 분명하게 언명됐으리라.
    물론 많은 소설에서 ‘성폭력’이 일어나며, ‘성폭력’이 묘사된다. 하지만 ‘성폭력’을 ‘성폭력’으로 진술하는 작품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성폭력적 사건들은 무수히 벌어지지만 이는 성폭력으로 규정되기보다는 다른 것을 말하기 위한 알레고리로 쓰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성 구타나 강간에 대한 재현은 인류의 죄와 타락이라든가 반시민적인 일탈과 광기, 반문명적이고 반규범적인 것으로서의 원시성과 토속성, 식민지배 또는 탈식민적 저항, 지식인의 속물성과 위선, 세계 멸망과 인간의 종언 등등의 은유로서 오랫동안 문학성(예술성)을 구성해 왔다. 박민정 소설에 나오는 성폭력 사건들이 어떤 의미 부여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남성작가들의 작품에서 흔히 그러하듯) 저러한 끈적끈적한 의미들이 들러붙어 있지 않다는 것은, 성폭력을 은유가 아니라 폭력으로 바라보게 한다. 또한 소설 곳곳에서 이것을 폭력으로 알려주는 시각이 (다소 거칠게) 들어가 있다. 특히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2011)와 「버드아이즈 뷰」(2015) 같은 소설은 2010년대 한국사회에 등장한 ‘일베’로 상징되는 새로운 남성성을 주제화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박민정은 이명박 정권 이후 한국 사회에서 보다 첨예해지고 극심해진 계급 갈등과 세대 갈등의 문제를 꾸준히 젠더 갈등의 구도에서 바라본 몇 안 되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아니, 방점은 반대로 찍혀야 한다. 박민정은 계급 갈등과 세대 갈등의 구도 속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벌어지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의 문제에 천착해온 작가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몇 가지 평가를 계속 망설이게 된다. 이러한 문제의식이 정말로 첨예하게 표현되어 있는가. 혹은 이러한 문제의식이 첨예하게 표현됐다고 하여 이 소설은 자동적으로 페미니즘 문학이 되는 것인가? 작가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발화하기 위해서 새로운 언어를 구사하고 있는가? 내가 동시대 페미니즘 소설을 빨리 찾아내고 싶은 욕망으로 성급하게 문제의식을 덧씌우고 있지는 않은가? 나의 문제의식이 오히려 소설의 울퉁불퉁한 의미층들을 평면화시키고 있지 않은가. 종국에는 다시 한 번 시와 정치, 그리고 그것을 규정하는 비평에 대한 물음으로 돌아간다. 결국 페미니즘 문학의 리스트를 현재로 연장하는 작업은 짧은 수업 준비 기간에 허겁지겁 시도해 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 아마도 지난 10년간 지겹도록 제기되고 또 제기되었으나 뾰족한 답을 찾지 못했던 문학비평의 모든 근본적인 물음이 다 들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제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앞으로 당분간 페미니즘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평론가. 2008년 창비 신인상에 평론이 당선되어 등단. 현재 <문학과사회> 편집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