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말] 2인용 즉흥낭독을 위한 언어악보 |김효나 |

[2월의 말] 2인용 즉흥낭독을 위한 언어악보 |김효나 |

kimhyona<아니의 오후>_ 1장
(inspired by Taku Unami)

표기
(( ))는 ‘꼭 표기내용을 따를 필요는 없음’을 의미한다.
“ ”는 ‘두 목소리가 동시에 읽음’을 의미한다.
/ /는 ‘네 글자씩 끊어 읽음’을 의미한다.
^^ 은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단어를 발화하거나 무의미한 소리를 냄’을 의미한다.
취소선 은 ‘읽지 않음’을 의미한다.

일러두기
두 목소리 모두 성별, 나이 무관하다.
낭독자들은 전문배우나 성우가 아닐수록 좋다.
순서나 역할을 정해 번갈아 읽을 필요 없다.
단락과 단락 사이 두 줄의 공백은 4.7초씩 침묵한다.

 

***

등이 깊게 파인 옷을 입고 있었어 그녀는.
아니야.
커튼처럼 무겁게 늘어지는 긴 천으로 가려져 있던 어둡고 침울한 등이,
아니야.
보드랍고 매끄럽게.
아니야.
거의 유리처럼 눈부시게.
아니야.
거의 ((아침햇살을 받은 유리처럼)) 눈이 멀게.
아니야.
영혼이 멀게.

 

아니야. 멀지 않았어. 오히려 가까웠다. 실은 턱없이 가까웠지. 그 모든 불행.
아니.
뒤돌아서니 불행이었어^^ 뒤돌아서면 불행일 것이다, 누군가 예견한대로.
아니야.
뒤돌아서지 말 걸 그랬나? 만약 그때 뒤돌아서지 않았다면? 평생을 웅얼거렸지.
아니야.
꿈속에서도 웅얼거렸어^^ 뒤돌아서지 않은 채 뒤돌아가는 채로.
아니야.
아니라고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면서 절대 절대 안 흔들리는 채로.
아니, 아니야.
“아니, 아니.”
아니, 너의 이름은 아니.
아니.
프랑스 여인 아니.
아니.

 

난 세 명의 아니를 알고 있어. 첫 번째 아니의 머리 위론 비만한 갈매기들이 요산을 뚝 뚝 떨어“뜨리며 지”나간다. 두 번째 아니의 머리 위론 보잉 747기들이 누런 기름방울을 뚝 뚝 떨어“뜨리며 지”나가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아니의 머리 위론 수천 볼트의 전봇대 줄이 혈액종양암 유발성 전자파를 뚝 뚝 떨어“뜨리며 지”나가. 너는 그중 몇 번째 아니지?
하나 둘 셋 모두의 아니.
아니의 모두.
아니의 오후.

 

아니의 오후는 어때. 아니는 무엇을 “하”지?
아니, 무엇을 “하”지 않는다.
아니야.
아니, 무엇을 “한”다.
아니야.
아니, 무엇을 “하”거나 “하”지 않는다.
아니, 아니는 그 모든 경우를 배제한다.
아니의 배제.
배제된 아니.

 

((배제“된 아니는” 어때. 속상한가.))
눈감는다.
((눈감은 “아니는 어”때. 아름다운가.))
희미하다.
((희미한 아“니는 어때.” 사라질까.))
사라졌다.
((사라진 아니“는 어때. 떠”도는가.))

 

“사과.”^^

 

사과를 먹는다. 사라진 아니는 사과를 먹는다. 사라진 모두는 사과를 먹을 수 있다. 사라졌다하여도, 누구든 사과를 먹을 수 있는 것이다. 빨갛고 둥근 것, 혹은 파랗고 약간 각진 것, 바로 그것이 사과이고, 그런 사과를 먹는다는 것은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어 끊어지지 않게 껍질을 깐 뒤 고르게 등분하여 은빛 포크로 찍어먹는 것이 아닌 사과를 구한 그 자리에서 옷에 대충 문질러 “닦거나 닦지도” 않은 다음 입을 쩍 벌려 가능한 커다랗게 와작 베어 무는 것이며, 와작 베어 물어 과즙을 뚝 뚝 떨어뜨리며 우걱우걱 씹는다는 것은 자신이 아직 지상에서 사라지지는 않았음을 확인하는 마지막 “/수단이므/로 아니도/ 사라지고/ 오랜 시간/이 지난 어/느 날 해 저/무는 거리/에서 그렇/게 한다. 그/리고 멈춘/다. 한 입 베/어 물고 멈/춘다. 패였/기 때문이/”다. 무엇이?/((^^ 사과의 한쪽이. 깊게 패였다. 너무도 깊게 패였다. 상상할 수 없이 깊게 패여 돌이킬 수 없다. 그대로 아니는 바라본다. 무엇을?^^ 사과의 깊게 패인 부분을. 해가 저물고, 사과의 속살이 붉게 변색될 때까지 바라본다. 무엇을? 깊게 패인 부분의 깊은 패임을. 해가 완전히 저물고, 사과의 속살이 새카맣게 부패될 때까지 바라본다. 무엇을? 깊은 패임의 거대한 구덩이를. 구덩이를 채운 완강한 공허를. 죽음을. 죽음을 손에 쥔 자신을. 죽음을.)) 죽음 자신을^^
아니야.
물론, 아니지.
아니는 단지 ‘자초하다’라는 동사에 대하여 생각해보았을 뿐이야. 생각 속에 잠시 드러누웠을 뿐이지.
아니는 피로하니까.
피로의 얇디얇은 막이, 아니의 표면을 투명하고 부드럽게 뒤덮고 있다. 마치 양서류의 미끈하고 촉촉한 피부막처럼. 아니는 그 피로막 아래 평온하고 공허해. 불안하고 충만하다. 마치 이러한 형용사들처럼. 이러한 형용이 가능한, “형”용불가의 여인들처럼.

 

((“그렇다면 아니는 나탈리 그랑제와 무엇이 다른가.
아니는 외판원에게도 담배를 권한다. 그리고 한 잔의”)) 메독.
((“그렇다면 아니는 파괴하라고 말했던 그녀와 무엇이 다른가.”))
얼룩지라, ((“고 아니는 말했다.
그렇다면 아니는 릴케의 어머니와 무엇이 다른가.
아니는 차오르는 기쁨으로 숨을 고르며, 노란 래커칠을 한 작은 서랍에서 비단 종이에 싸인”)) 레이스 뭉치((“를 꺼내지 않는다. 대신 VHS 테이프를 꺼낸다. 꼭 문고판 책만 한 크기의, 중앙의 투명한 부위를 통해 두 개의 릴에 감긴 필름이 들여다보이는 고전적인 비디오테이프 그것을.”))

 

그리고 필름을 천천히 풀어나가기 시작했나?((^^)) 천천히 풀어나가며 컷과 컷이 펼쳐지는 것을 바라보았나?((^^)) 한 가지 씬이 끝날 때마다 매번 깜짝 깜짝 놀라곤 했나?((^^)) 씬들은 언제나 갑자기 끝나버렸기 때문에?((^^))

 

/아니, 아니/는 비디오/테이프란/ 현대의 문/물을 손에/ 쥔 어느 현/대인과도/ 다를 바 없/이 그것을/ 비디오플/레이어에/ 넣는다. 살/짝만 밀어/ 넣었을 뿐/인데 한순/간 돌이킬/ 수 없이 강/하게 빨려/ 들어가는/ 그 감각을/ 아니는 좋/아할 수도/ 있다. 혹은/ 철컥, 하고/ 테이프가/ 안착하는/ 소리를 더/ 좋아할 수/도 있다. 마/치 이미지의 금속벨트에 잠금 되는 것만 같아, /라고 어딘/가에 끄적/거렸을 수/도 있다. 끄/적거린 쪽/지는 눈에/ 띄지 않도/록 손에 닿/는 책의 책/장 사이 아/무렇게나/ 끼워 넣었/을 수 있는/데 그 책은/ 매번 부영/사였을 수/ 있다. 부영/사란, 그 자/체로 비명/이므로, “오”/로지 그 비/명을 감내/할 수 있을/ 때에만 읽/을 수 있으/므로, “부영/사를 잊은/ 어느 날 그/것이 부영/사인 줄 모/른 채 혹은/ 그것이 부/영사인 줄/ 모르는 의/식으로 부/영사를 펼/쳤을 때 알/ 수 없는 수/십 장의 쪽/지가 후두/두 떨어지/며 바람을/ 타고 온 방/안에” 흩어/졌을 수 있/고 그곳이/ 거리라면/ 거리 위에/ 흩어져 적/나라하게/ 드러난 자/신의 문장/들을 스스/로도 낯선/ 눈빛으로/ 바라보다/ 모른 체 밟/고 지나갈/ 수 있는 아/니는,

 

그 비디오를 스무 번 보았다. 그중 열아홉 번은 뱃속에 L을 가졌을 때였다.
아니야.
비디오를 스무 번 보았다. 그중 열아홉 번은 뱃속의 L과 함께 보았다.
아니야.
비디오 를 스무 번 보았다. 그중 열아홉 번은 거꾸로 자신이 L의 뱃속에 있다고 느꼈다.
아니야.
그 비디오를 스무 번 보았다. 그중 열아홉 번은 L의 환영을 대신 보는 것 같았다.
아니야.
비디오를 스무 번 보았다. L의 환영 속에선 늘 비가 내리고 그림자가 짙었지만,
아니…
“그 비디오를 스무 번 보았다. 그림자는 더 짙어져도 좋다고 생각했다.” 필름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짙은 어두움을,
아니.
끌고 다니는 개의 그림자가 되고 싶다고 속삭였다. L이 고개를 끄덕이며 빙 빙 삼백육십 도 회전을 했다. “바로 그 때,
아니!
안드레아!
아니!
안드레아!
부름이 들렸다. 부르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언제나 목소리로만 들리는 부름이.
아니야.
“아마도 그것은 감독의 목소리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속삭였다. 생각과 속삭임이 구분이 가지 않았다. 뱃속의 L이 대답하는 것도 같았고 화면 속의 안드레아가 대답하는 것도 같았고 뱃속의 L의 환영의 안드레아가 대답하는 것도 같았으며 결정적으로 안드레아의 커다란 검은 개, “말없는 그 검은 개가 대답하는 것도 같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어두움은,”
아니야.
이 어둠보다 짙은 어두움은 검은 개의 “그림자 속이 아닌가,” 내가 보는 것은 뱃속의 L의 환영도 아닌 뱃속의 L의 환영의 안드레아의 커다란 검은 개의 환영은 아닌가.
아니야.
“내가 품은 것은 그렇다면 검은 개가 아닌가,”

아니…

나는 검은 개의 어미가 아닌가. 늘 비를 맞아 축축한,

아니.

늘 개를 낳아 고단한,

아니!

지리한!

아니!

멸렬한!

아니!

찬란한!

아니!


착란한!

아니!


출구 없는!

아니!


구출 없는!

아니!


이미지!

아니지!


이미지!

아니지!


이미지!

아니지!


((^^))! 

((((^^))))!

((((((^^))))))!

 

검은 개를 스무 마리 낳았다. 그중 어디에도 L은 없었다. 아무래도 그림자가 너무 짙었던 걸까, 이제 그림자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많게 되었다.
그러므로 더는 아무 되었다.
((2장에서 계속))

1982년 서울에서 출생. 2016년 『쓺—문학의 이름으로』를 통해 등단했다. 첫 소설집 『2인용 독백』이 출간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