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말] 빵을 씹으면 귀신이 보이는 풍경 | 최하연 |

[1월의 말] 빵을 씹으면 귀신이 보이는 풍경 | 최하연 |

choihayeon2016   자정이 넘으면 귀신을 찾는다. 부르는 쪽은 내가 아니라 귀신이다. 딱딱한 바게트를 씹으며 부엌 쪽창을 열어 귀신을 찾는다. 만날 수 없으니 찾는다. 찾을 수 없으니 부른다. 부를 수 없으니 씹는다.

    부엌 쪽창을 열면 팔작지붕을 올린 한옥 한 채가 고스란히 내려다보인다. 잘 자란 가이즈카향나무 두 그루와 홍단풍이 정원을 지키는 이 집은 한때 이 땅의 정부 수반이 살던 자리였다. 그 덕에 한옥, 일본가옥, 현대가옥 세 채가 마당과 함께 나란히 문화재로 남았다.

    부엌 쪽창으로는 정오와 오후 6시 정각에 늘 혜화동성당의 종소리가 들려오는데, 그 성당은 검은 얼굴의 사내가 군대를 이끌고 서울로 들어왔을 때, 이 한옥의 주인이 도망가 숨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틀 만 자고 나면 해가 바뀌는 올해는 그가 세상을 뜬 지, 50주년이 된 해이자, 그를 쫓아낸 검은 얼굴의 사내가 낳아 기른, 얼굴 하얀 딸이 이 쪽창이 등진 뒷산의 서쪽 자락에서 아직 살고 있던 해이기도 했다.

    장면가옥의 바로 이웃집으로 이사를 왔으나, 나는 아직 2년째 장면가옥을 관람하지 못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

    내려다보이는 가옥의 대청은 전시실처럼 보이는데, 한가운데 유리 테이블이 하나 달랑 놓여 있고 그 옆에 의자가 한 개 우두커니 서 있다. 오래된 나무 바닥은 관리가 잘된 덕인지, 반들반들하고 윤이 난다. 밤이 되어, 바람이 불면 지붕 위로 불꽃 모양으로 자라는 가이즈카향나무의 그림자가 너울거린다.

    이 가옥엔 비밀이 하나 있다. 나만이 아는 비밀이니, 다른 이에겐 비밀이 아닌 비밀을 알게 된 것은 이사 오고 나서 며칠 지난 뒤였다. 새벽이 다 되어가는 시간인데도 대청의 불은 켜져 있었다. 그럴 수 있었다. 그러나 며칠 뒤, 한 새벽에도 불 켜진 대청의 마루는 붉고 검게 빛났다. 어느 날은 불빛 아래 묵상하는 유리 테이블을 오래 지켜보기도 했다.

    반년 간 지켜본 결과, 모든 밤은 모두 환했다. 불을 끄지 않는 이유가 궁금해졌고, 상투적인 상상력을 발휘해보다가, 찾아가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일 년이 지나고 또 6개월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우연히 빵을 씹으며 창을 내다보다가, 그만,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볼 뻔했고, 듣지 말아야 할 부름을 들을 뻔했으며, 찾지 말아야 할 것을 찾게 되었다.

    여기까지 쓰고, 이 글을 쓰기 위해, 영화를 한 편 보았다. 영국의 좌파 노인 감독이 만든 영화 <나, 다니엘 브레이크>를 보는 내내, 나는 25년 전에 본 <파업전야>를 떠올렸다. 학교 강당에서 <파업전야>가 상영되는 동안, 나는 필름을 빼앗으러 온 백골단과 쇠파이프를 들고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 내가 그 영화를 제대로 본 것이 언제였는지는 정확치 않다. 백골단 대신, <나, 다니엘 브레이크>의 상영 때 나를 막은 것은 지루하고 무감각한 광고 몇 편이 전부였다. 아마도, 25년이 더 지나, 일흔이 되었을 때, 나는 또 한 편의 영화를 볼 것이다. 그러고는 앞의 두 영화와 비교할 것이다. 그때 나를 가로막는 것은 아마 노안이거나, 난청이겠지만. 그때까지도 장면가옥의 불은 꺼지지 않을까. <나는 알 수 없다.>

    <나, 다니엘 브레이크>는 사실 위험한 영화일지도 모른다. 세계화의 어두운 병폐를 세계화의 종주국 중 하나인 영국 사회의 중산층 이하 계급의 비루한 현실에서 찾아내는 감독의 혜안이 고맙기도 했지만, 이 영화는 어쩌면 이민자를 몰아내고 ‘일자리’와 ‘시민 복지’를 성취하자는 유럽산 나치의 프로파간다에 이용당할 가능성도 엿보인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다 해도.

    찾지 말아야 할 것을 찾을 수밖에 없는, 어떤 장면이 중첩될 때마다, 내가 씹는 빵은 딱딱해진다. 빵을 씹으면 대청을 오가는 귀신이 보이고, 아니 보이지 않고, 불 꺼지지 않는 대청이 (저 대청의 불빛이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게 뭐든 그게 뭐 아니든, 이뤄지기를…) 내려다보이는 쪽창 안의 세계는, 빵을 씹는 세계이자, 보이지 않는 귀신을 찾는 세계인데, 요 며칠, 나는 내 몸의 물리적 대칭축이 난데없이 기울어, 빵을 천천히 씹고 있다.

시인.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나, 2003년 계간『문학과사회』를 통해 등단했고, 시집 『피아노』와 『팅커벨 꽃집』을 펴냈으며, 현재 반연간 문학지 『쓺 – 문학의 이름으로』의 편집주간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