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칼럼] 비합리라는 사악함 | 백지은 |

[11월의 칼럼] 비합리라는 사악함 | 백지은 |

baekjieun   대통령의 “순수한 마음” 때문에 “민주주의 국가가 샤머니즘 국가로 전락한 대한민국”을 통탄하던 중, 문득 얼마 전 겪은 어떤 심정이 여기에 겹쳐지는 느낌에 휩싸인다. 누군가는 나라가 ‘내부자들+곡성’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던데, 내게도 영화 <곡성>의 한 요지와 관련된 뭔가가 어른거리는 것 같다. 나는 그 영화를 보면서 놀라고 무섭고 아프고 화내다 극장을 나올 때는 거의 울다시피 한 표정으로 다리를 후들거리며, 급기야 욕인지 탄성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주문처럼 웅얼대기까지 했던, 그런 관객이었다. <곡성>에 대한 무수한 리뷰들의 분석과 해석, 옹호와 비판에 구태여 해석을 덧붙일 마음은 없지만, 영화를 보면서, 또 보고 나서, 얼마간 나를 괴롭혔던 이상한 심정이 지금 새삼 떠오른 것을 좀더 생각해보기로 한다.
   <곡성>은 기이한 이야기를 하는 영화다. <곡성>에 대한 비판 중 가장 흔한 것은 ‘영화가 우리를 속였다’는 것인데, 그것은 이 영화의 스토리가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죽고 죽이는 범죄가 나왔으면 그게 누구의 소행인지 왜 그랬는지는 최소한 밝혀져야만 한다고 믿어서일까? 누가 뭘 어쨌는지, 누구랑 누구랑 한 편이고, 왜 그랬는지를 확실히 해주지 않는데다, 드러난 것들을 가지고 나머지를 맞춰보려 해도 앞뒤가 안 맞는 것 투성이다. 어떤 이야기가 이렇다는 것이 ‘틀렸다’거나 ‘나쁘다’고 할 수는 없는데, 왜냐면 이 점은 이야기하기의 능력 부족이 아니라 이야기하기의 특별한 의도를 반영한 조작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야기가 합리적이지 않은 경우 일단은 그것이 어떤 의도의 반영이라고 보는 편이 맞다. 요컨대 <곡성>의 기이한 이야기는 서사의 무능이라기보다 서사의 입장으로 여겨야 한다.
   어떤 입장인가? 수많은 리뷰들 중 정성일의 말에 동의하는 뜻을 담아, “우리의 논리를 부수고 으깨고 갉아먹으면서 비합리적인 설명의 승리를 향해 나아가도록” 하려는 입장이라고 말해 보겠다. 그런데, 정성일은 이 영화에서 모순들이 교환되는 사이에는 “세상에 대한 시험을 하는 순간들”이 있음을 지적하고, “매번 그 결정적인 순간들은 저항의 계기를 억압의 신비주의로 몰아넣은 다음 침묵한다”고 비판하며, 그 ‘기술(技術)’이 “거기서 멈추지 말고 그 할말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까지 나아갈 때에만 비로소 자기 자신도 모르게 껴안은 사악한 힘과 싸울 수 있을 것”이라는 ‘윤리’를 요구한다. 동의하진 않지만 이것을 풀어 말해 본다면, <곡성>은 “나쁜 것과 더 나쁜 것 사이에서 나쁜 것의 기회에도 불구하고 항상 더 나쁜 것을 선택”하면서 그것이 마치 “인간적인 선택”인 양 오해하게 만들고 그럼으로써 윤리적 포기의 순간이 윤리적 선택인 것처럼 꾸며낸다는 얘기다.
   왜 동의하지 않느냐고? <곡성>의 시퀀스들은 꿈과 현실, 환각과 실제의 영상을 구별하지 않고 의심과 범죄, 금기와 죄의식 사이를 헤매는 무질서한 정신을 노출한다. 이 영화의 스토리를 요해한답시고 ‘그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누가 착한 귀신이고 누가 악마로 변했는가, 왜 어떤 죄가 누구에 의해 저질러졌는가…’ 등을 판정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반복컨대 이 영화는 이성이 마비되고 생각이 멈추고 미신을 물리치지 못하는 어떤 “비합리적인” 흐름을 될 수 있는 한 극단으로 밀어붙인 서사가 되고자 했고 그 의도를 전혀 감추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때문에 나는 <곡성>을 ‘악’의 위력에 굴복한 윤리적 포기의 순간과 그 (전멸)이후의 침묵을 품은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없다. 나쁜 것과 더 나쁜 것을 앞에 둔 순간을 “저항의 계기”라고 한다면, 그 저항을 ‘악’에 대한 저항이라 말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곡성>의 “비합리적인” 폭주 속에서 ‘악’과 악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선’이 이항적으로 대결이나 타협의 양상을 드러낸다고 보기 어렵거니와 악과 선을 따로 이름 지을 필요조차 없어 보인다. ‘악’이라면, 영화의 후반부에 진짜 악마(로 변신한 것)처럼 표상된 일본인과 그와 한패였음이 드러난 무당, 그 둘을 가리키는가? 분노와 두려움으로 범인을 잡겠다고 무모하게 날뛰는 종구와 그의 친구들은 악에 저항하는 ‘선’일 것인가? 어느 쪽도 아니겠고, 그렇다면 나쁜 것과 더 나쁜 것 중 더 나쁜 쪽이 덜 나쁜 쪽보다 더한 악이라 할 수도 없다. 이 영화에서 ‘악’은 ‘나쁨’의 양으로 생성되는 게 아니라, 어느 쪽도 나쁠 수밖에 없는 윤리적 포기의 상황을 윤리적 선택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그 이상한 사태의 비합리성, 즉 나쁨에 대한 저항을 차단하는 “억압의 신비주의”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윤리’가 물어지는 것은, 조금이라도 나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 선택의 ‘좋음’에 대해서가 아니라, 파국이 아닌 결과를 기대할 수 없는 가능성들에 직면한 선택 포기의 ‘나쁨’에 대해서여야 한다. 좋음과 나쁨 중 좋음을 가려내는 것이 아니라 나쁨과 나쁨만 있는 상황의 나쁨을 가리키는 것으로도, ‘윤리’는 말해진다. 이때 사악함은 좋음과 나쁨 중 나쁨인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나쁨에 당착한 무지와 무기력 혹은 (윤리적 선택의) 포기에 다름 아니다. 바꿔 말하면, 악에 대해 인간이 무지하고 무기력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무지와 무기력과 포기가 바로 악이고, 이 영화의 “비합리적인 흐름”은 그런 악의 재현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착각하지 말자, 비합리적인 것은 자연 혹은 세계의 질서가 아니라 인간의 판단, 인간의 행동이다. <곡성>에서 들끓는 의심과 공포, 몽매와 주술, 폐쇄성과 무능함 들 중에 ‘선’은 없을 것이다.
   악에 대해 인간이 무지하고 무력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무지와 무력이 곧 악이라는 사실을 목도한 심정에 대해 얘기해보려다 멀리 돌았다. 처음 “국정농단 의혹”이 제기되어 ‘대통령이 사교(邪敎)의 교주 격인 민간인의 사주를 받아 국정을 운영했다’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을 때 누군가 “(최순실이) 정말 용한 점쟁이면 어쩌려고”라고 한 말이 회자되었던 게 생각난다. 이 나라에 점보는 사람이 한둘인가? 대통령의 종교 자유를 보장하라? 광기, 최면, 주술에 인간이 무너지는 게 아니라 인간이 무너지는 것이 곧 광기, 최면, 주술이다. <곡성>에 대한 리뷰 중에 “우리는 벌써 과학적이지만 국가와 민족과 사회가 제 일에 끼어들기 시작하면 비과학적 사고가 용납된다고 생각한다.”(황현산,[폐쇄서사])는 문장이 있었다. 나라의 기강이 붕괴된 오늘의 사태에는 대통령의 몽매한 악과 최순실의 주술적인 악 말고도 집권과 영화를 위해 이들을 꼭두각시로 이용한 수구 세력의 부정부패 같은 더 복잡하고 심각한 문제가 한없이 잠복해 있을 테지만, 오랫동안 괴이쩍었던 대통령의 ‘악함’이 바로 비과학적, 비합리적 사고의 정체임을 확언하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문학평론가. 1973년 서울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했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7년 『세계의 문학』을 통해 등단했으며 평론집 『독자시점』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