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칼럼] 가장 멀리에 있는 것에게로 |서효인|

좋아하는 것 둘을 꼽으라면 세계 지도와 세계 역사였다. 세계 지도를 펼치면 어디엔들 내가 있을 수 있었다. 나는 특히 거기에 세상에 진정 있는 것인지 의심이 들만큼 생소한 곳을 좋아했는데, 파푸아뉴기니, 과테말라, 부르키나파소 등이 그렇다. 이사를 자주 다녔지만 세계지도는 늘 고이 접어서 상하지 않는 곳에 잘 챙겨두었다. 그리고 새로 생긴 방에 펼쳐서 압정이든 테이프든 벽지를 상하게 만들었다. 월세집의 세입자인 부모와 그런 부모를 맞아들인 집주인 모두에게 천방지축인 아이였겠지만 특히 벽에 하는 장난질은 심했다. 세계지도, 한국지도, 유럽지도, 미국지도를 차례차례 구해서 어떻게든 벽에 붙였다. 물론 파푸아뉴기니, 과테말라, 부르키나파소의 지도를 구할 수는 없었다. 나는 세상에 없는 지명을 상상하며 멋대로 놀았다. 살기 좋아 뵈는 위도와 경도 어느 곳을 손가락으로 짚어내어, 나의 땅으로 삼았다.
흰 도화지에 그럴싸한 세계지도를 눈을 감고 그릴 수 있게 될 즈음, 그를 만났다. 조악한 30권 세트 세계사 만화를 빠르게 완독했다. 낡은 회색 양복을 입은 아저씨가 초인종을 울리고 책 묶음을 들고 나타났을 때 난 이미 만화 세계사를 손에 얻어야겠다고 다짐했으며, 어머니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책 사. 책을 사. 저 책을 사란 말이오. 세계사는 승자의 이야기였다. 한국사를 읽을 때 어쩔 수 없이 느껴지던 핑계와 딴청이 거기에는 없었다. 지배자는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며, 서양의 왕은 멋들어진 성을 만든다. 문명은 자연을 기필코 이겨내고, 더 발달한 문명은 다른 대륙에 닻을 내린다. 나는 이질적인 그것들을 크게 부르며 친밀하게 만들었다. 훈족, 쿠빌라이 칸, 카를로스 대제, 아비뇽 유수, 십자가 원정, 30년 전쟁, 사라예보 권총 테러 등이 그렇다. 죽음에서 새로운 역사는 탄생했다. 주여, 그를 죽여. 그를 죽이란 말이오.
이렇게 공간과 시간이 완성되었고, 세계를 주유하는 몽상 속에서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 사이에 부모님은 따로 떨어져 살았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할머니가 아팠고, 학교에서는 매일 같이 맞았다. 나는 이 땅에 살기가 싫었다. 지방 소도시는 지긋지긋하게 더웠고, 사정없이 추웠다. 추억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으리라 생각했다. 개 같은 추억이었다. 학교 뒤에서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고 나오는 길에 보이는 비행구름이 유독 선명했다. 누가 날아간 흔적일까. 나는 거인처럼 커지고, 세계는 대축적지도처럼 졸아들어서 한걸음에 이곳에서 저곳으로 움직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맞고 때리는 일에 익숙해지라고 지나가는 모든 공기가 귀엣말을 해주었다. 네가 도망갈 곳은 없다. 네가 살아갈 곳은 여기다. 너는 너일 뿐이다.
멀리에 있는 타자를 내 것으로 삼은 건 도망자의 욕구였을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국경선은 죽은 자의 시체를 이어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마치 텔레비전에 가끔 나오는 전투기와 군함에 열광하는 열 살 꼬마의 열정처럼, 나는 멀리에 있는 모든 것을 사랑했다. 가까이에 있는 모든 것을 경멸했다. 사랑하는 멀리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몽돌이 되어 눈을 가늘게 떴다. 근시가 되는 고통을 자랑스러워했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도 아무것도 아니니까. 머리가 더 크면 되면 되도록 멀리에 가서 새로운 이름으로 새로운 언어를 쓰며 사리라. 다짐했다. 머리는 컸으나 그리 하지 못했다. 내가 간 곳은 교수를 모시고 갔던 중국의 작은 도시였고, 중국어보다 한국어를 더 많이 들어야 했다.
나는 더 멀리, 더 옛날로, 더 시커멓게, 더 아득하게 변하기 위해서 글을 썼다. 더욱 그렇게 하기 위해 더욱 노력할수록 더 크게 실패했다. 멀리에 있는 것을 그릴수록 가까이에 그것들은 존재했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내 손과 발의 끝에 매달려서 떨어지지 않았다. 피부였다. 속살이었다. 세포이면서 피였다. 쓰면 쓸수록 분명해지는 빨강색. 그것이 무엇으로 변할지 모르겠다. 모른다는 말을 하는 것이 부끄럽지만, 세계의 지명은 모두 부끄러움으로부터 비롯되었으니, 나는 여행 중이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가장 멀리에 있는 나를 내 옆자리로 호출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지나가는 공기가 말한다.
실패하리라.
실패하리라.
그러나 계속되리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