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칼럼] 가장 잔혹한 말 | 천희란 |

[10월의 칼럼] 가장 잔혹한 말 | 천희란 |

cheonheeran   노출이 많은 옷을 입거나 밤늦게 다니는 여성이 성범죄의 대상이 될 위험이 높다는 인식은 그 자체로 여성혐오이다. 여성의 행실은 가해자의 범죄를 정당화하지 않으며, 여성에게는 일말의 책임도 없다. 너무 뻔해 보이는가. 그런데 정작 피해를 당하게 되면 이 뻔한 논리로 자기 자신을 설득하기가 지독히도 어렵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남성은 이해하지 못한다. 물론 꾸준한 학습과 훈련을 거듭하면 불쑥 다가와 내 다리를 평가하는 취객이나 내려주지 않겠다는 위협을 농담으로 일삼는 택시 기사, 지하철에서 칸을 옮겨 다니면서까지 따라붙는 젊은 남자를 심판하는 것까지는 크게 어렵지 않다. 무시하거나, 도망치거나, 신고하거나, 도움을 청하거나, 따져 묻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저런 새끼들 다 감방에 처넣어야 해. 그러나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그런 낯선 이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성적 폭력에 있어 상대가 낯설 때라면 가차 없이 대처하고 단죄할 수 있는 일들도 그보다 가까운 관계 안에서는 냉엄하게 판단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안다. 나는 스물한 살에 처음으로 지인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그는 어두운 건물 뒤편에서 나를 강제로 끌어안고 제 머리를 내 목덜미에 묻은 채 더러운 숨을 몰아쉬었다. 그를 밀치고 울며불며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나를 사로잡은 것은 분노가 아니었다. 내가 너무 쉬워보였던 것이 아닐까하는 질문이었다. 내가 그의 말에 웃어주지 않고 그의 술잔에 술을 따르지 않았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만 같았다. 그러자 의심이 시작되었다. 내가 그에게 이성적인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래서 그 호의가 지닌 의미를 얼마만큼은 의식적으로 계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제법 오랫동안 알고 지내왔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술에 취해 내 뺨을 만졌을 때에도 그랬다. 그는 내게 예뻐졌다고 말했는데, 나는 농담으로 그 상황을 웃어넘겼다. 그러자 그는 그 다음 번에도 한두 번쯤 더 내 뺨을 만졌다. 내가 그에게 성적인 관심이 없었다는 게 분명한데도 왜 그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걸 지적하지 않았을까. 혹시 나는 그의 관심을 적당히 즐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러한 자기 의심은 사건이 일어난 순간 확실하게 불쾌한 감정만을 느꼈을 경우에도 예외 없이 반복되고는 했다. 내가 그곳에 가지 않았다면, 내가 그 차를 타지 않았다면, 내가 더 완강히 거절했다면. 나는 그들 중 단 한 사람도 고발하지 못했다.
   가볍게 알고 지내던 사람과의 사이에서 일어난 폭력 앞에서도 이러했으니, 그보다 내밀한 관계에서 느낀 죄책감은 비할 데 없이 컸다. 이십 대 중반, 나는 한 남자와 사귀는 내내 그로부터 정신적인 학대를 받았다. 그때의 일을 구구절절 털어놓고 싶지는 않다. 결과적으로 나는 무딘 식칼을 들고 죽지도 못하는 자신을 책망하며 한동안 정신과 상담을 받아야 할 지경이 됐다. 그런데 그가 내게 행한 일을 정말로 학대라 말해도 괜찮은 걸까. 나는 일찍이 그가 나를 사랑하는 방식이 존중과 배려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러면서도 이별통고를 받을 때마다 매달린 것도 나이고, 그의 폭력적인 언행을 사랑이라 믿은 것 또한 나였다. 나는 정말로 죽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괴로웠지만, 파괴적인 사랑의 감정에 도취되어 있기도 했다. 감정적으로 벼랑 끝에 몰리면 나 또한 악다구니를 썼고, 때로는 나도 모르던 폭언을 일삼는 자신과 마주쳤다. 나는 어렸고, 야심찬 젊은 예술가였고, 불행과 절망이 예술적 재능과 등가를 이룬다는 착각에 빠져 있기도 했다. 그때 나는 그와의 관계에서 오는 고통을 낭만적으로 유희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구차하게 변명을 시도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가 나를 함부로 대할 때보다는 내게 다정한 순간이 좋았고, 그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믿었으며, 어떻게 해서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 변명이 아무리 설득력 있다 하더라도 다음의 질문에서는 여전히 자유롭지 않다. 그때 나를 해친 것은 정말로 그 사람일까. 진짜 가해자는 나 자신이 아니었을까.
   내가 이런 이야기를 시작하기로 결심한 계기는 최근의 여성혐오 이슈와 무관하지 않으며, 그중에서도 문단에 만연한 여성혐오 폭력을 지적한 김현 시인의 글과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김현 시인은 이번 계절 발행한 『21세기 문학』에 게재된 산문의 말미에 “문단에서 벌어진 여성혐오, 범죄 기록물을 ‘독립적으로’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요?”라고 적었다. 그리고 곧 그가 발행인으로 참여하고 있는 독립잡지 『더 멀리』가 문단 내의 여성혐오 폭력 사례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고발과 폭로라는 형식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여성혐오 폭력을 중단시킬 수 있을지, 그 과정에서 피해자들이 겪어야 하는 법적 분쟁이나 2차 가해의 가능성은 없는지에 대해 신중히 검토할 부분이 남아 있겠으나, 대체로 나는 이러한 시도를 환영하고 지지한다. 그리고 그 시도는 이미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 같다. 억눌려 있던 목소리들이 터져 나오고 있는 것을 실감하는 중이다.
   『더 멀리』가 문단 내에서 일어난 여성혐오 폭력에 관한 제보를 받는다는 공지를 낸 이후 작가, 습작생, 출판관계자인 친구들로부터 그들이 감추어왔던 경험을 은밀히 전해 들었다. 그 대부분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과 그렇지 않은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가해자가 여전히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는 사실이 그들의 발언을 가로막고 있었고, 지금의 발언으로 인해 끝나버린 과거의 관계가 복원될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컸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들을 망설이게 하는 것은 폭력의 피해자가 된 순간을 자책하고 부끄러워하는 그들 자신이었다. 그들의 고백에는 늘 단서가 달려 있었다. 내가 내 이야기를 털어놓은 게 실수였지, 내가 술을 마신 게 잘못이었는데, 따라간 나도 잘한 건 없지만, 내가 그 관계를 끊을 기회를 놓치지만 않았다면……. 모두가 스스로에 혐의를 제기하고 있었다. 그간 나는 여성혐오를 둘러싼 뜨거운 논쟁들을 지켜보면서도 특별히 의미 있는 발언을 할 자신이 없어 입을 다물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고백을 들으면서야 비로소 내게도 할 수 있는 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 또한 그들과 똑같은 두려움을 견뎌왔다는 고백 말이다.
   언젠가 화장실까지 뒤따라와 일방적으로 내게 입을 맞춘 한 남자에게 왜 그런 짓을 했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나보다 한참 나이가 많았던 그는 학생을 가르치듯 내게 말했다. 앞으로 이런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이 훨씬 더 많이 있을 거야.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 말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고, 그도 무슨 대단한 깨달음을 주기 위해 그런 말을 했을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지금에 와서는 학대와 폭력을 경험한 수많은 여성들이 가해 남성에게 빈번히 듣는 말과 그 말의 논리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네가 먼저 시작했잖아. 네가 가만히 있었잖아. 너도 방금 전까진 좋았잖아. 그들은 어째서 모두 폭력을 행한 사람이 아니라, 폭력을 당한 쪽에 더 큰 결정권이 있다는 양 말하는 것일까. 그런데 우격다짐 같은 그 말은 놀랍게도 폭력을 당한 피해 여성을 주문에 걸리게 만든다. 그리고 주문에 걸린 여성이 누군가의 호의를 받아들인 자신, 곧바로 불쾌를 표현하지 못한 자신, 자신을 학대하는 사람을 사랑했던 자신을 그 스스로의 마음속에서 최초의 가해자로 낙인찍은 채 살아가도록 만든다. 나를 괴롭혔던 질문들의 출처도 조금씩 선명해진다. 나는 그들과 결별한 이후에도 내 머릿속에 들어앉은 그들과는 헤어지지 못했던 모양이다. 도통 계몽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나의 분열된 상과 싸워야 하는 운명도 거기에서 시작되었던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현재의 나는 앞선 질문들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게 살아가는 중이다. 그 모든 일들이 이십 대에 벌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덧 삼십 대가 되었고, 완력에 의한 물리적인 폭력이 아니라면 제법 많은 상황을 통제할 수 있으며, 내가 느끼는 불쾌함을 즉각적으로 표현할 줄 알게 되었다. 그 때의 경험을 스스로 명명하고 정리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시간을 지나왔고, 내가 과거의 경험을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와준 친구들이 곁에 있었다. 그리하여 내가 내린 결론은 간명하다. 무엇도 내가 당한 폭력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대체 왜 여기에 도달하기까지 그토록 먼 길을 돌아와야만 했던 것일까. 폭력을 경험한 여성들이 빠지는 도덕적 딜레마는 가해 남성으로부터 학습된 여성혐오 없이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다. 많은 경우 폭력에 노출된 여성은 즉각적인 대처를 하지 못해 사후적으로 사건을 판단하는데, 변화한 관계와 상황에 따라 당시의 경험을 명명하려 하면 그가 겪은 폭력 자체의 실감은 완화된다. 그때 판단에 개입하는 요소 중에는 피해자 자신의 취약한 감정이나 심리 또한 포함된다. 사건을 당한 순간의 피해자와 시간상 사건으로부터 멀어진 피해자는 결코 같은 존재가 아니며, 사건을 복기하는 과정에서 피해자는 과거의 자신을 타자화하고 심문한다. 따라서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를 제대로 인지하려면, 자신의 경험을 둘러싼 다른 모든 요소를 덜어낸 채 폭력의 실체만을 바라 볼 필요가 있다.
   그러한 시각에서 본다면 내가 던져온 질문의 답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나는 한 시절에 스스로의 내면에 교정되지 않는 보바리가 살고 있다고 여기고 싶어서 내게 일어나는 불행들을 가엾게 지켜만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연애가 내 인생을 망치는 걸 조건으로 시작된 게 아니고서야, 내가 그의 폭언과 학대를 유발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화장실까지 날 따라와 강제로 입을 맞춘 남자는 그 다음엔 나를 화장실 빈 칸으로 끌고 들어가려 했다. 그것은 명백한 폭력이었다. 설령 내가 그의 뜬구름 잡는 소리에 홀려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해도 그가 내게 행한 것은 여전히 폭력이다. 물론 나는 내게 그런 짓을 한 남자를 고발하지 않고 좋아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격렬한 수치심을 느낀다. 그러나 그건 멋있어 보이기 위해 모르는 단어를 함부로 주워다 썼던 소설의 한 구절을 다시 읽어 보는 정도의 수치심일 뿐이다. 누군가와 나눈 신의와 우정, 그리고 사랑의 대가가 폭력일 수는 없다. 이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이다. 각자의 경험 속에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말을 전하고 싶었다. 당신은 절대로 폭력의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다. 아니, 애당초 폭력의 원인을 제공하는 사람 같은 건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당신이 머뭇거렸거나, 흔들렸거나, 하물며 당신이 그를 사랑했다 하더라도 그 명백한 진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문단의 일이 이 발언의 계기가 된 만큼 문단의 일에 관해서도 잠시 이야기를 해야겠다. 지금껏 내가 해온 이야기 중 일부는 내가 문단의 테두리 안에서 겪은 일이다. 나는 작년에 갓 데뷔를 한 신인이지만, 내게 문단의 여성혐오 폭력은 낯설지 않다. 이십 대 초반의 나는 정신을 차려 보니 문단의 주변부에 있었고, 그곳에서 굳이 겪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일들을 수차례 겪었다. 아주 사소한 일들이 더 많지만, 생살을 도려내서라도 지울 수만 있다면 지우고 싶은 기억도 존재한다. 특정인이나 특정 사건을 고발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내게는 너무 오래된 일들이기 때문에 내게 폭력을 가한 사람들을 이제와 심판하고 싶은 마음도 없거니와 그때 내가 겪은 일들을 증명할 여력도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부를 문단 내의 사건이라 특정하지 않고서라도 써야만 했던 이유는 그 또한 내가 겪고 극복해온 폭력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의 나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크고 작은 폭력의 대상이 되었지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보통 내게 나쁜 일이 일어나는 순간, 그곳에 문단 외부의 사람이라고는 오직 나 하나뿐이었다. 더구나 나는 종종 내가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불편하게 여기는 시선을 느껴야 했는데, 이유야 명백했다. 나는 등단을 하지 않은 습작생이었고, 어린 여자애였다. 나를 경멸에 찬 눈으로 바라보던 몇몇 사람들이 가진 편견이야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어린 습작생 여자애여서 그 자리에 초대 받았고, 또한 같은 이유로 눈총을 샀다. 나는 그 의혹에 찬 시선으로부터 결백해지고 싶었지만, 단 한 번도 완전히 결백했던 적은 없다. 스스로 결백하다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내가 겪은 일들을 친구 몇 명에게 털어놓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작가가 되기를 꿈꾸는 내가 호기심과 선망을 가지고 그 자리에 있었다한들, 그 사실이 그들이 내게 추잡한 농담을 일삼고 내 몸을 만져도 좋다는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습작생들이 문단의 언저리에서 겪는 여성혐오 폭력은 그 밖의 일상적 폭력들과 절대로 다른 논리를 가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폭력의 무게만이 더욱 무거울 따름이다. 습작생들의 어리고 취약한 감정, 작가들과 어울리려 했던 허영심에 대한 죄책감, 작가 자신의 문학적 권위가 폭력에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습작생들은 작가들과 무람없이 어울리며 자신의 문학적 관점을 공유하고 있을 때에도 그들과 대등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하다. 자신은 아직 작가가 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있으므로, 그는 언제나 스스로를 외부인으로 규정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한 작가의 권위는 결코 가볍지 않다. 피해자는 자신이 경험한 사건이나 관계가 밝혀지면 스스로의 꿈이 좌절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붙들린다. 가해자가 문단 내에서 실질적인 결정권을 가진 경우가 아니라 해도 마찬가지다. 피해자는 그를 둘러싼 편견과 멸시의 시선에서 그 가능성을 감지한다.
   나 또한 그것이 두려워 자발적으로 글쓰기를 중단하고 싶었던 순간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덧붙이고 싶다. 당시에 나를 미래의 동료가 아니라 손쉽게 착취 가능한 여성으로 여겼던 사람들, 남성 작가들의 관심을 받으며 스스로를 그들의 뮤즈라 여기는 허영심에 찬 습작생쯤으로 취급했던 사람들은 이제 나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또한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아무런 편견 없이 내 글쓰기를 응원해준 작가들이 분명히 있었다. 이제 그들이 나의 동료가 되었으며, 그들처럼 진심으로 손을 내밀어줄 사람이 현재에는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미약하지만 나도 내 작은 두 손을 거두지 않고 기다리겠다.
   어떤 경우에도 폭력의 피해자가 된 자신을 자책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써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발을 독려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작금의 분위기를 환영하는 한편으로, 가해자를 색출해내는 것에 집중된 것 같은 분위기가 다소 우려스럽다. 정작 더욱 중요한 것은 폭력을 경험하는 순간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피해자들의 두려움을 이해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아닌가. 물론 피해자는 참아왔던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만으로 당시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기반을 얻는다. 그러나 고발이나 폭로는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절대로 고결해질 수 없고, 뜻밖의 커다란 생채기를 내기도 한다. 따라서 용기가 필요하며, 용기를 내는 것은 멋진 일이지만, 용기를 내지 못한 것이 잘못은 아니다. 지금 발언을 망설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또한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만일 지금 우리가 하려는 일들을 어떠한 연대로서 명명할 수 있다면 이 연대는 관념의 연대가 아니며, 증오의 연대도 아니고, 고발의 연대도 아닐 것이다. 이 연대는 매번 새롭게 맞닥뜨리는 생생한 고통의 연대이다. 그러니 다시는 꺼내보고 싶지 않은 순간을 기억해내며 끝없이 분열하는 자신과 싸워온 사람 모두를 이 연대의 구성원이라 부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나는 문단을 둘러싸고 형성되고 있는 이 연대가 특정 인물을 사회적으로 매장하거나 추방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난 일이라 할지라도 책임을 져야 하고, 무거운 범죄가 있다면 형벌도 피할 수 없겠지만, 대부분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는 그 누구도 여성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할 수 없게 하고, 그러한 폭력 앞에서 아무도 입을 다물지 않아도 좋은 환경을 만드는 것이야 말로 이 연대의 본래 목적일 것이다. 나는 그저 자신이 성범죄에 상당한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무반성적으로 페미니스트이기를 자처하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본다. 그러나 그들이 적어도 가혹한 폭력에 맞서서 함께 싸워 줄 것을 믿는 한 그들을 포용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마땅하다 생각한다. 다만 나는 여전히 여성혐오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한 여성으로서, 그들이 외부를 향한 투쟁과 마찬가지로 자기 내부의 투쟁을 시작해주기를 간곡히 부탁한다. 폭력의 피해자들이 내뱉는 고백조차 그들에게는 당당한 고발이 아닌 고통스러운 내적 투쟁의 결과물일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분명 이 연대가 증오의 연대가 아니라고 썼다. 그러나 연대에 속한 한 개인일 뿐인 나는 나약하고 어리석은 탓에, 지금의 불안과 분노를 냉정히 다스리기가 쉽지 않음을 고백한다. 나는 스스로를 비난해온 자신과는 화해에 가까운 지점에 도달했지만, 내가 경험했던 크고 작은 폭력들과는 아직 화해하지 못했다. 친구들의 경험을 전해 듣는 내내 그것이 마치 내게 일어난 일인 양 고통스러웠고, 잊고 싶은 기억이 떠올라 몸이 떨렸으며, 참을 수 없는 저주의 말들이 떠올랐다. 참을 수 없기에 참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두렵다. 두렵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단어와 문장을 허비하고 나서야 겨우 여기에 도달했다. 하지만 이젠 더는 홀로가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 고통의 연대가 나를 보호할 것을 믿기에, 내게서 스스로 빼앗아야만 했던 목소리를 되돌려주려 한다.
   누구도 쉽사리 당신들의 이름을 적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당신들이 언제든 자신의 민낯이 드러날 수 있다는 두려움 속에 숨죽이기를 바란다. 이제 당신의 폭력은 저지될 것이고, 더 이상 변명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추악한 자신의 얼굴을 견뎌야만 할 것이다. 부디 그러기를, 나는 간절히 빈다. 내가 애써 떠올린 가장 잔혹한 저주의 말이 이토록 정중하다는 사실에 안도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지금껏 당신이 가한 어떠한 폭력도 나의 존엄을 훼손하지 못했다는 증거일 뿐, 내가 이미 일어난 일들 앞에 너그럽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당신이 폭력을 선택했으므로, 용서는 영영 당신의 것이 아니다.

1984년 경기도 성남 출생. 2015년 『현대문학』 으로 등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