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칼럼] 문제기(問題記)에 관한 13개의 테제 |조효원|

1. 오직 문제만이 중요하다. 인격과 자격과 품격 따위의 미장센(mise en sc ne)이 꾸며내고 주체-대상/원인-결과의 조명등이 눈부시게 연출하는 허튼 수작, 같잖은 연극판을 깨부수어야 한다. 오로지 문제에 집중함으로써, 놀랍도록 그럴싸하게 꾸며진 생-애(生-涯)의 무대를 박살내야 한다.

2. 전기(傳記)와 전기적 사고 이것은 인간-인물-주체 중심적 사고를 총칭한다 는 종말을 맞이해야 한다. 전기는 참된 역사 이해[역사관]와 역사 기술(Historiography)의 가장 큰 적들 중 하나이다.

3. 전기의 부작용, 아니 치명상을 치료할 수 있는 강력한 처방, 아니 수술은 문제기(Problemography)를 통해서 가능하다. 문제기는 실증주의적 역사학이 아니라 섭리주의적 연대기학(providential annalogy)에, 인과-목적론적 역사철학이 아니라 초월-경우론적 역사신학(transcendental-casuistic Histotheology)에 복무한다.

4. (아직 존재하지 않는 혹은 잠복하고 있는) 문제기는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문제기는 물질-정신/자연-인간의 이분법(dichotomy)을 해체-구성하는 힘-관계-짜임새의 삼원 구도(trinity)로 이루어져야 한다.

5. 물리적 힘을 부분집합으로 포함하는 힘 일반의 개념이 인간과 주체 그리고 인과관계 따위의 오도하는 개념들을 대체해야 한다. 세계는 합리적으로 움직이는 행위자들이나 연산에 따라 추정, 확정할 수 있는 이유들이 아니라, 결코 예측할 수 없는 방향과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강도로 작용하는 다양한 힘들로 이루어져 있다. 세계는 힘들에 의해 생성 지속 변형된다.

6. 힘이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곳, 힘이 조작 변형 갱신시키는 것은 다름 아닌 관계이다. 관계는 힘의 배치 혹은 대치 구도를 이용하여 정적인 상태(status quo)를 역동적인 상황(situation)으로 지양 변모시킨다. 그러나 거꾸로 관계는 아주 미세한 접합(junction) 혹은 비논리적 이접(disjunction)만으로도 엄청난 규모의 물리적 정신적 힘을 능히 압도하거나 가뿐히 능가할 수 있다. 그러니까 관계는 잠재력이다. 다시 말해 힘과 관계의 관계는 구불 불가능한 안팎의 관계와 같다.

7.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짜임새(configuration/constellation)이다. 힘과 관계가 물리적 상태-세계를 포섭하면서 배제하는 범주라면, 짜임새는 힘-관계의 영역을 가장 내밀한 지점에서부터 조직해 나가는 동시에 가장 먼 바깥에서부터 해체해 들어오는 무(無/武)적 존재태이다. 짜임새는 오직 이념으로만 존립한다. 따라서 짜임새는 인식되거나 구성될 수 없고 다만 믿어질 수만 있는 존재, 또한 심지어 존재 전체를 괄호 치는 (비)존재이다(문자 및 텍스트의 차원과 결부시켜 보자면 짜임새는 쉼표와 괄호에 상응한다).

8. 기존의 역사와 역사쓰기(Historiography)는 여전히 (그리고 어쩌면 의도적으로) 인간과 인격의 주술에 붙들려 있다. ‘작인(agent)’이라는 유용하고도 포괄적인 개념이 언제나 이미 무력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 이것이다. 그러나 이 속박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진 해방적 통찰들 역시 (보편적) 주체 개념의 손아귀로부터는 도무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주체 개념이 드리우는 가장 크고 넓은 그림자는 세계 개념이다. 다시 말해 가장 물리치기 힘든 주체는 세계라는 주체이다. 희한하게도 인간들이라 불리는 존재는 근거 없이 세계(의 존재)를 믿는다.

9. 문제기를 쓰는 손은 세계-주체/주체-세계를 파괴하(려)는 제스처이다. 이 제스처가 말하는 바는: 세계는 없다. 오직 문제만이 존재할 뿐이다. 역사 또한 그것이 문제인 한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따져볼 때 세계사는 역사가 아니며, 하물며 보편사로서의 세계사만큼 허황된 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10. 정확히 말하자면, 문제기는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쓰여질 수만 있다(그러나 이 후자의 사태는 수동태가 아니라 중동태로 이해되어야 한다!). 세계 개념에서 정점에 다다른 주체의 어설픈 연기가 이제까지 득세할 수 있었던 것은 다만 잘못된 언어 사용, 오염된 문법 덕분이다. 니체와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가장 커다란 공적은 그것들이 문법 교정을 위한 교본으로 쓰일 수 있다는 점에 있다.

11. 쓰여질 수만 있는 문제기는 중동태(中動態)로서의 삶과 같다. 이러한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성과와 보상, 실패와 처벌(혹은 책임), 조작과 영광 따위의 행위쌍이 아니라 부딪침과 만남과 헤어짐, 만(져)짐과 상처와 성찰, 기적과 (그 기적의) 기록 및 갱신이라는 신비로운 짜임새이다.

12. 기적 같은 짜임새로서의 삶은 마치 자모가 엮여 글자가 만들어지고 텍스트가 생산되듯 만남과 상처와 기적이 엮이고 성찰되고 또한 갱신됨으로써 존립하는 것이다(그러나 자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쉼표 등의 구두점들과 괄호이다). 정확히 이런 의미에서 문제기는 삶으로서 쓰(여지)는 것이며, 삶의 무늬로서 짜여져가는 것이다. 문제기는 존재의 무늬,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궁극적인 의미에서의 존재태(存在態)를 표상한다.

13. 그러나 짜여져가는 무늬보다 풀어져가는 무늬야말로 중요한 것이다. 무늬의 자가 생산 혹은 중동태적 생성 과정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생겨나는 오해, 통념, 판결 따위의 찌꺼기는 오직 무늬 자체의 풀어헤쳐짐을 통해서만 일소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낮에 짠 천을 밤에 다시 풀었던 페넬로페는 문제기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물론 궁극의 상징은 아니다. 실로 문제기에 대한 하나의 형상(figure)이 존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 성서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깨어진 석판일 것이다. 모세는 하느님께서 주신 석판을 깨트렸던 것이다!! 하느님의 글자마저도 깨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 이 사건은 그야말로 가장 깊은 비밀을 잠그고 있는(!) 열쇠이다. 가장 중요한 무늬는 부서진 무늬, 산산조각난 무늬, 완전히 풀어헤쳐진 무늬, 그러니까 결코 대답될 수 없는 문의(問議)이다. 따라서 문제기는 어떤 경우라도 공공연히 쓰여질 수는 없고, 다만 암흑의 핵심 속으로 끊임없이 깊어져 가지만 또한 동시에 가장 밝은 햇빛 아래를 활개치는 열린 비밀로서만 가능하다.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