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칼럼] 가능세계 | 백은선 |

[5월의 칼럼] 가능세계 | 백은선 |

paikeunsun     나는 너무 슬프다. 너무 슬퍼서 뭘 말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밤늦은 시각 겨우 글을 쓰려고 책상에 앉으면 윗집에서 여자는 울고 남자는 소리를 지른다. 물건이 부수어지는 소리도 난다. 나는 너무 무서워져서 멍하니 백지만 보고 있는다. 나는 슬프고 무섭고 막막해진다. 나는 내가 뭘 말해야할지 전혀 모르겠는 상태에서 겁에 질려 쓰기 시작한다. 쓰다보면 무언가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아무 것도 말해지지 못하고 문장만 나열하다가 말 수도 있다.

    이런 불안에 휩싸일 때면 작은 돌을 생각한다. 작은 돌을 생각하고 그 돌을 꼭 쥐고 있는 상상을 하다보면 차갑고 부드러운 표면을 만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면 그 돌의 단단함에서부터 조금씩 내가 복원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돌은 주먹에 들어올 정도의 작은 크기이면서 삼켜버리고 싶을 만큼 완전히 둥글고 조금 납작하며 연한 회색이다. 그걸 만지고 있으면 한기가 든다. 그리고 부유하던 것들도 차차 가라앉을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나의 의지와는 관계가 없다. 오래된 버릇이다.

    돌. 한밤의 토끼처럼 돌을 지키면서, 코를 벌름거리는 이상한 리듬으로. 나는 자주 과거나 이전에 있었던 이해되지 않는 일을 곱씹어 생각해본다. 결코 통과할 수 없을 것 같은 일들을. 주저하면서도 자꾸 생각한다. 그러면 그 일들은 현재가 되고 나는 그것들을 다시 겪는다. 그런 과정은 고통스럽다. 그러니까 나는 너무 슬펐다가 너무 무서웠다가 너무 막막했다가 너무 고통스럽고 결국에는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어서, 두 귀를 늘어뜨린 토끼처럼. 빨간 눈으로 쿰쿰거리며 조금씩 적는다.

    통유리 카페에 앉아 교토를 생각했다는 어떤 시인에 대해 생각해보고 오늘 읽은 책이나 신문 기사도 생각해보고 음악을 들으면서 가사를 해석해보기도 하지만. 나는 대체로 어렸을 때 일이나 가족들에 대해 자주 생각하는데. 이건 계획이나 형식의 바깥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불현듯 그렇게 될 것인데. 그건 내가 어떤 과거에 계속 살고 있어서 현재의 내가 온전해지려고 나를 되찾아 오려는 노력과도 같다. 막 걸음을 멈춘 사냥꾼이 어둠 속에서 총구를 가만히 휘젓는 것. 그리고 조용해 질 수 없을 만큼 더 조용해지고 싶어서, 숨을 참는 일.

    그렇게 적은 잿더미 같은 문장들을 다시 읽어보고 대부분 지운다. 한 문장이나 두 문장, 아니면 한 단어만 남는 경우도 있고. 전부 삭제할 수도 있다. 이 일련의 과정을 고통의 확장이나 발굴이라고 한다면 웃기겠지만. 몇 번이고 그 과정을 반복한다(너무 슬픈 것부터 기진맥진까지!). 물론 그때쯤에는 윗집은 조용하다. 처음부터 조용할 때도 있다. 그래도 너무 무섭다. 그 이웃은 자꾸만 내 유년을 환기하는 촉매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이라는 말을 천 번 적을 것이다. 그리고 용서에 대해 생각하고 내가 생각한 용서란 무엇인지도 적을 것이다. 아마 나는 용서 불구인 것 같다. 때문에 나는 계속 아플 수 있고 계속 아플 수 있어서 그걸 너무 열심히 다시다시 겪는다. 용서하는 사람들은 어느 순간에는 과거를 넘어서고 더 이상은 자신의 기원 같은 것을 찾으려고 과거의 주변을 얼쩡거리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용서할 수 없음ㅡ가장 오래된 것도 언제나 새롭게 증오할 준비가 되어 있는ㅡ은 불행이지만 겨우 뭔가 쓸 수 있는 상태를 도래시킨다.

    생각. 텅 빈 설원에서 눈이 빨간 동물이 픽 쓰러질 때. 목이 졸린 채, 빨개진 얼굴로. 나는 너무 아프고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다. 아버지, 선생님, 개새끼들. 친구들. 연인들. 눈은 열린 채 눈을 잠그고. 눈 속에 누워 숨을 쉬는 것처럼 점점 희박해지고. 눈은 끝없이 내리고. 그 리듬으로 쿰쿰대며. 막 눈물을 쏟으려는 것처럼. 되돌아오는 손을 볼 수가 없다. 눈을 감고. 여기 남은 것은 중력뿐이고. 개새끼들.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때, 마음의 진공이 진공을 안고 빽빽해질 때, 더 빨개진 얼굴로. 아버지 살려주세요. 애원할 때. 축 늘어진 두 귀.

    자주 이런 것을 잔뜩 적어 놓고는 마지막엔 설원과 두 귀만 남겼다. 지워진 부분은 진공 속에서 견고하게 박재되어있었다. 언제든 다시 복원할 수 있도록. 그런 기진맥진 속에서 설원과 두 귀 사이의 썰렁함을 극복하고자 영화 얘기 소설 얘기 시 얘기를 많이 했다. 다른 비극에 접속하여 단결하는 일도 좋았다. 많고 많은 이야기들은 할 말 없음의 위장일 수도 있다. 그래도 많은 이야기는 적은 이야기보다 옳다. 그리고 다시 불러들일 많은 얼굴들을 잊지 않았다.

    나는 너무 슬프다. 너무 슬프다는 말 뿐이라 너무 슬프다. 이 일련의 과정을 계속해서 견디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종종 생각한다. 끝없는 내적 파열만이 이곳에 남아, 그곳에 두 발과 두 귀만 남겨질 때. 가능세계가 열릴 때. 너무 슬퍼서 결국에는 너무 슬프다는 말 뿐일 때. 가능세계는 적히지 않고 지워진, 진공 속에 남겨진 죽은 토끼들의 산이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을 때. 아무런 사건도 없이 작명이 시작된다.

    나는 오늘 생각이라는 말을 천 번 적을 것이다.

    하얀 것, 따듯한 것

    위에 회색빛을 둥근 돌을 올려둔다.

    용서를 생각한다.

시인. 1987년 서울에서 출생하였고, 2012년 『문학과 사회』를 통해 등단. 시집 [가능세계]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