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맞이 신작시] 명백한 나무 | 박성준 |

[봄맞이 신작시] 명백한 나무 | 박성준 |

명백한 나무는 명백하게 서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은 부분만큼
노래를 부르는 자리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만
유독 명백한 나무는 혹독하게 명백하다
돌을 태우면서 돌을 모르려고 했던 불꽃과
공기가 빛나면서 숨을 놓치고 싶던 햇살과
적막한 구름의 힘줄
유일하게 실패해 본 적이 없는 나무의 곁에서
실패로 태어난 나무의 유일했던 그늘 곁에서
움직임이란 움직이지 못하는 저 직립에서부터
직립이 되지 못한 나무를 둘러싼 시간에서부터
명백한 나무는 명백하게도 서 있다
나의 취미가 굶주림이라고 말할 때
나의 사랑이 왼손으로 쓴 글씨처럼 보일 때
피어나면서 사라지는 오해의 낱말들과
오해하면서 붙잡고 싶었던 명백한 그늘들과
나무는 알지 못하는 나무의 텅 빈 속사정과
그런 줄도 모르고 명백하게 서 있는 저 나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나무에게
아무것도 해본 적이 없는 나무에게
나무는 나무가 아닌 만큼의 나무
나는 명백하게 나무 곁에 서 있다
아무렇지 않게 나무 곁에 서 있다
명백한 나는
명백한 나무 곁에서
명백해지고
태어나지 말아야 할 기분은 태어나는 동안에만 기분
태워버린 밤하늘이야 품을 줄인 공기처럼 속죄는 기분
나무는 나이를 먹으면서 더 나무이려고 하고
나는 나무의 나이를 모른 채 나무를 만지고
나무는 나의 나이를 묻지 않고도 나를 안다는 듯이
나를 다 안다고 했던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떠났듯이
나무가 명백해지는 동안에만 나무는 서 있다
명백하게 서 있는 나무는 명백하려는 나무
명백하게 살아있는 나무
명백하게 죽어가는 나무
명백하게 빛이 많은 나무의 입장에서라면
명백하게 죄가 많은 나의 변명에서라면
나이 먹지 않고도 언제나 어린 거울들이여
언제나 멍들어 있는 나의 어린 과거들이여
나무는 무너지지 않으려고 나무
나는 무너지지 않으려고 나무
나는 명백하게 서 있다 명백한 나는 명백하게
서 있다 명백한 나는
움직일 수 없고 꿈꿀 수 없고 사랑할 수 없고
병들 수 없고 살아갈 수 없고 귀신도 될 수 없게
서 있다 명백한 나무는 명백한 나처럼
서 있다
나는 명백한 나무
나는 없는, 명백한 나무
나무에게 해준 만큼 나에게 해준 것들이
나에게는 그림자로 돌고 나무에게는 그늘로 돌고
나는 움직이려고 움직이지 않는다
명백한 나무는 명백하게 서 있다
나무는 서 있다는 움직임
그런 나무를 본 적이 있다면
그런 나무는 아주 조금 더 명백해지는
그런 동안에만 나의 나무
나무는 명백하게 서 있다

1986년 서울 출생. 2009년 『문학과사회』를 통해 시인으로, 2013년 『경향신문』을 통해 평론가로 등단. ‘는’ 동인으로, 시집 『몰아 쓴 일기』『잘 모르는 사이』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