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칼럼] 말과 글 |김성중|

[8월의 칼럼] 말과 글 |김성중|

l_2012080601000578600044781서글프게도 나는 말이 많은 축에 속한다. 눌변의 아름다움을 숭상하는 나로서는 내가 참 멋이 없다. 부끄러운 버릇을 고쳐보고자 묵언을 결심한 적 여럿이나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말무더기를 밀어내는 혓바닥에 흠칫 놀라는 것이다.
헤아려보니 내게는 생각을 말로 옮기는 좋지 않은 버릇이 있다. 혼잣말을 하진 않지만 누군가가 앞에 있으면 반드시 내 생각을 말로 꾸려보는 경향이 또렷했다. 딱히 들려주려고 하는 말이라기보다 상념에 가지를 뻗고 논리를 추리기 위해 지껄이는 종류다보니 우왕좌왕 길을 잃을 때가 많다. 특히 술이 보태지면 말의 숲은 열대우림처럼 무성해져 젠장, 나는 뇌가 입에 달린 사람인가 좌절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나는 말과 말의 부딪침, 누군가 툭 던진 말을 다음 사람이 보태고 그러다 와그락 커지고 유희에 참가한 사람들이 재빨리 허공 속 구름에 다녀오는 순간을 즐거워한다. 혓바닥을 서핑보드 삼아 정신없이 파도를 타는 느낌이랄까. 수준 높은 서퍼들의 펼치는 일종의 공연에 감탄도 잘한다. 뭐든 기세 좋고 풍성한 것들에는 마음이 끌린다.
다만 험구가의 혓바닥만은 질색이다. 남 흉보기를 좋아하는 사람치고 콤플렉스 없고 공격적이지 않은 치들을 보지 못했다. 소문을 부풀리거나 뒷담화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발산하려 드는 이에게 호되게 데이고 난 끝에 내린 결론이다. 이런 풍경에 끼어 있으면 다음날 아침에 찜찜한 채로 일어나야 한다. 건성으로 대꾸한 것조차 험구에 일조한 기분이 들기 때문에 이런 치들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 각설하고,

최근에 나는 내가 말이 많은 이유에 대한 전혀 새로운 해석을 찾았다. 소화제를 달고 사는 탓에 한 날은『동의보감』을 넘기다가 이런 구절을 읽었다.
“……비장과 위장이 허약하면 공상, 망상이 지나쳐 쓸데없는 근심을 만드니 그 이유가 설명됩니다. 공상과 망상이 지나친 것은 위장의 활동이 지나쳐서 과도할 만큼 사려 깊은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위장은 아는데 비장은 잘 몰랐던 나는 그게 어디 달린 것인지, 무슨 기능을 하는지 까지 인터넷에서 검색한 후 ‘확실히 내가 비장이 좋지 않구나’ 라고 중얼거렸다. 다음 순간 충격적인 대목이 이어졌다.
“……혀에 에너지가 공급되지 않아 허전하므로 자신도 모르게 혀를 움직이려 하고 흥얼거리려 해 말이 많아지게 됩니다. 심한 경우는 잠잘 때만 제외하고 온종일 중얼거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 상념이 태어난 곳은 머리가 아닌 뱃속이란 말인가? 자의식이 강한 게 아니라 내장이 허약한 것이고? 그 결과 미끄러운 혀를 갖게 되었다니 정말이지 비장한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명의는 나의 슬픔에 이런 처방을 내려 주었다.
“아침저녁 공복에 꿀을 듬뿍 먹는다. 찹쌀, 귤피, 기장, 양배추, 단호박 등을 먹는다.”
오호라, 그러니까 나의 콤플렉스는 달콤한 꿀이나 단호박으로 몰아낼 수 있는 것이구나. 저 원자폭탄 구름 같은 망상은 장기간의 인절미 복용으로 날려버릴 수 있단 거구나 치렁치렁한 말들이 밀려나오는 이 혓바닥이 사실은 허전해서 그랬구나. 양배추 따위를 삶아 먹으면 입 닥치고 조용히 살 수 있겠구나. 그렇구나.
탄식 끝에 웃음이 나올 도리밖에 없었다.

뜻밖에 글 쓰는 사람이 되었다. 말이 범람하다 못해 글까지 쓰느냐, 그건 아니다. 혀끝에 밀려나오는 말들은 내 말이고, 내 생각이다. 그런데 글은 그렇지 않다. 반쯤은 내 생각이지만 반쯤은 전혀 딴판의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어쩌다 마음이 툭 불거져 종이를 찾을 때, 종이 위에 글자가 한 방울씩 똑똑 떨어질 때, 그것이 내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아닌 것으로 보이기도 할 때, 그 순간들 때문에 대부분 고통스러운 이 작업이 좋다. 한국어는 얼마나 물방울 같은 글자인가. 자음과 모음의 조합으로 한 글자가 되기 때문에 철자를 옆으로 길게 쓰는 언어와 달리 정말 한 방울씩 똑똑 떨어지는 응결체 같다.
쓰다보면 드물게 찾아오는 이 순연한 감각 때문에 나처럼 책상에서 벌떡 일어나 뛰쳐나가기 좋아하는 인간이 끙끙거리며 글을 쓰는 듯싶다.
내 것 아닌 내 것, 혀로는 결코 수신할 수 없는 전파, ‘부지불식간’이라는 대륙. 물론 완성한 글을 보면 재단과 바느질 솜씨가 형편없어 솔기자국 다 드러난 옷을 보는 것처럼 참담하지만 그래도……
‘혓바닥 말고 말간 맨드라미처럼 도로록 올라오는 다른 빨간 것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하다가도, ‘이것도 허전해서 하는 것은 아닌가’ 도로 골똘해지는 것이다.

구불구불 끝나지 않는 걸 보니 이 글이 말처럼 되어버린 듯하다. 인절미는 밥 대신 가끔 먹는데, 공복에 꿀을 퍼먹거나 양배추를 장기 복용하긴 쉽지 않다. 누가 내 혓바닥 좀 말려주세요. 아무래도 단호박을 사러 가야겠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