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한국 정치와 말 | 김태환 |

[특별기고] 한국 정치와 말 | 김태환 |

kimtaehwan2   내가 어렸을 때 학교에서 자주 들은 말이 있다. 빨갱이는 말을 잘 한다는 것이다. 선생님들은 공산주의자들은 이론이 번드르르하고 귀가 솔깃하게 옳은 말을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허황된 거짓말을 늘어놓을 뿐이라고 늘 강조했다. 이러한 논리는 심지어 말을 잘하면 빨갱이로 의심받을 수 있다는 주장으로까지 비약되었다. 한국 문화에서 말을 잘 하는 것이 미덕이었던 때가 있었을까? 그것을 장려하는 문화가 존재한 적은 있었을까? 학교에는 웅변대회라는 것이 있었지만, 그것은 학생들의 말하기 능력 배양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이때 웅변이란 고대 그리스의 수사학적 전통과는 전혀 관계가 없고, 학생들에게 반공 이데올로기를 세뇌시키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달달 외운 원고를 얼마나 더 과격한 제스처와 목소리로 전달할 수 있느냐를 평가하는 대회였다.
   위계적이고 권위적인 문화일수록 수사학은 중요성을 상실한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굳이 말을 잘 할 필요가 없다. 누구를 설득해야 자기 뜻을 관철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힘이 없는 자들, 그런데도 저항하고 자신의 자유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말이라도 잘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의지할 수 있는 다른 수단이 없으니까 말이다. 그것이 권력자에게는 당연히 불편하고 못마땅하다. 그래서 말 잘하는 것 자체를 불온하다고 몰아붙인 것이다. 허황된 거짓말을 하는 자의 이론과 말솜씨가 번드르르하다면, 그리고 그것이 사회에 먹혀드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스스로 더 공부를 하고, 더 말을 잘 해서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민주적인 지도자, 정치가의 태도일 것이다. 하지만 한국을 지배해온 우파는 그런 실력을 쌓을 필요가 없었고, 도리어 말 잘하는 것을 빨갱이로 몰아감으로써 스스로의 말없음을 정당화하며, 모든 것을 힘으로 밀어붙이는 데 익숙해 있었다. 그런데 상당히 탈권위화된 오늘날까지도 한국 사회에서 전통적인 권력과 저항 세력, 우파와 좌파의 정치적 대결 구도는 이러한 비대칭성을 특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사실 1987년 민주 항쟁으로 정치 체제가 민주화되면서 상황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했다. 하지만 독재 체제의 권력이 비교적 민주적으로 진행된 선거에서 집권에 성공함에 따라 불행하게도 말이 필요 없는 우파와 말 잘 하는 좌파의 기본 구도는 계속 유지된다. 민주적 선거에서는 말을 못하면 실패를 겪어야 하지만, 말 잘하면 수상하다는 전통적 이데올로기는 독재 체제가 사라진 후에도 계속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였고, 우파는 그러한 특별한 문화적 환경 속에서 안주할 수 있었다. 우파 진영에서 이론적으로 밝고 말을 잘 하는 것은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는 최소한의 요건이 되지 못했다. 우파와 좌파의 사이의 애매한 포지션에서 결국 우파 진영에 합류한 김영삼 대통령 후보는 1992년 선거에서 TV 토론을 회피하면서 자신의 어눌함을 변명하기 위해 “머리는 빌릴 수 있지만 건강은 빌릴 수 없다“고 둘러댔다. 그렇게 하고도 선거에 당선될 수 있었으니, 말을 싫어하는 우파의 태도가 크게 바뀌지 않은 것도 이해할 만한 일이다. 집권당의 후보가 그런 구차한 변명이라도 하게 된 것이 민주화의 성과라면 성과라고 할까.
   1998년에서 2007년까지 본격적으로 좌파가 한국 현대사에서 처음으로 집권 주도 세력이 되면서 우파는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우파가 좌파와 대결하기 위해 그나마 공부도 하고 말하기 연습도 한 때가 바로 이때이기도 하다. 그들은 권력이 없었고 할 수 있는 건 말뿐이었기 때문이다. 뉴라이트라는 이념적 운동이 이 시기에 생겨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운동도 실은 과거 좌파 운동권에서 말 잘 하던 사람들의 전향에 크게 힘입은 것이었다. 하지만 우파는 10년 만에 권력을 회복하자마자 다시 옛날 습성으로 돌아간다. 말을 잘 해서 마음을 얻기보다, 그냥 밀어붙이는 태도가 계속되었다. 뉴라이트 운동 안에서 나름대로 명민함을 보여온 이데올로그들이 그러한 정권에서 어떤 큰 역할을 할 수 없었던 것은 자명한 일이다.
   역사 교과서 파동에서도 이런 경향이 극단적인 형태로 표출되고 있다. 지금의 역사 교과서가 틀렸으니 국정 체제로 바꾼다고 결정한 뒤, 정부와 여당은 이에 대한 어떤 의미 있는 토론도 생략한 채, 모든 것을 기정 사실로 만들어버렸다. 현재 역사 교과서가 아무리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한들, 그것이 지금까지의 모든 제도와 법적 절차에 따라 만들어진 것인 이상, 이런 식으로 체제 자체를 일방적으로 뒤흔들어버리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민주주의적 정치는 합의한 절차를 존중하고, 그 안에서 말로 자신의 입장을 설득하려고 노력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런 일을 제일 잘 하는 사람이 당 내에서 지지를 받아 대표도 되고 더 나아가 대통령도 되는 것이 온당하다. 지도자는 제일 현실 공부를 많이 하고, 제일 말을 잘 하는 사람, 가장 많은 비판에 정면으로 직면하는 사람, 하지만 그러한 비판도 말로써 제압하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민주적 지도자라면 말이다. 민주적 체제에서 권력을 가진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가장 불편하고 힘들게 계속 노력해야 하는 위치에 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편하게 보호받는 자리에서, 말도 최소한 만 하면서,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고 싶다면,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나는 지금 대통령이 그토록 역사에 관심을 기울이고 미래 세대의 역사 인식에 대해 노심초사하고 있다면, 과연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고 있는 역사학자들과 기꺼이 공개 토론이라도 하고,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국민의 마음을 움직일 자신을 가질 만큼 공부가 되어 있는지 묻고 싶다. 교과서 정책에 개입하여 의지를 관철시키고 싶다면 적어도 그런 노력은 보여야 할 것이 아닌가.
    한국 정치에서 우파의 구태의연하고 안이한 태도는 좌파에게도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공부하지 않는 우파는 좌파도 긴장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우파 정권은 좌파가 우파 정권에 대해 가지고 있는 고정 관념을 재확인시켜줄 뿐이다. 좌파는 별 고민 없이 우파 정권의 비민주성, 퇴행적 유신 회귀 정책을 규탄하면 된다. 이보다 더 쉬운 비판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다보니 현대사에 대한 인식을 둘러싸고 존재하는 갈등이 어떤 진지한 문제제기와 토론을 통해 더 발전적인 인식과 더 넓은 사회적 합의로 나아갈 가능성은 처음부터 차단되어버렸고, 친일독재 교과서와 종북 교과서 사이의 사생결단식 싸움만이 남았다. 독재 체제 하에서 우파 정권은 비판자들의 개인적 생존 자체를 좌우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휘둘러댐으로써 역설적으로 그들을 단련시키고 노력하고 공부하고 말 잘하는 사람들로 키워주었다. 하지만 지금의 우파 정권은 비판자들에게 비웃음과 패러디와 조롱의 대상이 될 뿐, 어떤 실존적, 지적 도전도 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태는 한국 정치 전체의 수준을 저하시키고, 장기적으로 국가적인 손실로 귀결될 것이다. 우선 집권자들에게 간곡하게 부탁하고 싶다. 독재 시절에 비하면 너무나 보잘것 없는 한시적 힘을 뽐내면서 밀어붙이려 하지 말고, 불편하고 힘들더라도 제발 공부하고 진지하게 토론하는 것을 자신의 무기로 삼으라고 말이다. 말 잘 하는 것이 빨갱이의 속성이 아니라 최고 지도자의 필수 덕목이 되는 날이 올 때,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한국 정치를 두고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 독일에서

서울대 인문대 독문과 교수, 문학평론가. 1967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대학원 독문과 및 오스트리아 클라겐푸르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평론집 『푸른 장미를 찾아서』『문학의 질서』등과 다수의 번역서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