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칼럼] 부력에 대하여 | 윤해서 |

[11월의 칼럼] 부력에 대하여 | 윤해서 |

yoonhaeseo    나는 언제나 옆이 되고 싶었다. 언젠가 글렌 굴드가 남긴 이런 말을 읽다가 생각했다. “나는 어느 곳에서도 혼자가 될 수 있다.” “음악의 어떤 작은 부분이라도 내 마음을 파고들어오면, 나는 기묘한 형태로 내 자신과의 접촉을 끊어버린다. 대화로부터, 그리고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로부터 동떨어져버리게 된다.” 굴드가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아니 연주에 끼어드는 굴드의 기묘한 흥얼거림, 콧소리 같은 것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나는 어딘가로 떠오른 나를 발견하게 된다. 아니다. 방금 전까지 어딘가에 속해있던 나는 사라지고 귀만 남는다. 굴드의 말을 이해하게 된다. 귀는 음악을 만나면 언제, 어디서든 나를 밤으로 이끈다. 모든 것과의 접촉을 끊어버리고, 완전히 동떨어져서 나는 오로지 귀로서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모든 것이 사라졌다고 느끼는 바로 그 순간에, 우주가 아주 가까이 다가온다. 매일 우주에 속해 있으면서도 우주를 떠올리면 저 멀리 떠있는 희미한 별과 아득한 암흑이 떠오르는 것과 달리, 갑작스럽게 나는 내가 우주의 일부라는 것을 몸의 떨림으로 느낀다. 모든 것과의 접촉을 끊고, 혼자로서 혼자. 나는 언제나 옆이 되고 싶었다. 굴드의 옆, 음악의 옆, 밤의 옆, 우주의 옆. 나는 지금 내 옆에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나의 옆들에 대해.

□ 보다

   내가 가장 즐겨보는 TV프로그램은 당구 선수권 대회 중계방송이다. 요즘은 케이블에 당구채널이 따로 있어서 거의 언제 틀어도 파란 당구대에서 흰공과 빨간공, 노란공이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당구 중계 시청의 묘미는 공이 갈 길을 예상해보는 짧은 순간의 초조, 깔끔하게 처리된 공이 자로 잰 듯이 두 번째 공에 다가갈 때의 긴장, 공과 공이 부딪혔을 때 나는 맑은 소리, 뒤이어 나오는 나의 탄성이 이루는 조화에 있다. 당구는 거의 음악에 가까워서 멍하니 파란 화면을 보고 있으면 어쩌다 내가 어떤 리듬에 실린 당구공이 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아무튼 내가 처음 당구 중계를 보기 시작했던 것은 한 십 년쯤 전인데 그때는 자려고 누우면 천장에 당구공이 돌아다닐 때였다. 늦게 배운 당구가 너무 재미있어서 누구든지 만나면 당구를 치러가자고 조르곤 했었다. 정작 당구는 잘 치지도 못하면서 당구장 자장면 맛에 눈을 뜨고 만 것이다. 나는 자장면에 고춧가루를 뿌려 먹으면 맛있다는 것도 당구와 함께 당구장에서 배웠다. 뭐든지 하나에 빠지면 정신을 못 차리는 나는 그렇게 한동안 당구에 빠져있었는데. 얼마 뒤 당구를 가르쳐준 사람과 헤어지면서 의식적으로 당구장에 가지 않게 되었고, 당구는 언제 그렇게 좋아한 적이 있었나 싶게, 그 사람과 함께 잊혔다. 당구는 자장면의 옆으로, 그는 당구의 옆으로 기억에 남았다. 사랑과 이별이 그런 것처럼 기억은 언제나 옆을 동반한다. 진짜 길 하나는 기막히게 본다. 어쩌면 그 사람이 해주는 칭찬이 좋아서 당구가 좋아졌는지도 모르는데. 그는 사라졌고 문장은 남았다. 너 길 하나는 정말 기막히게 본다. 그래서 나는 때로 이런 문장의 옆이다. 내 옆의 문장과 문장들. 문장과 문장 사이. 기왕에 길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 길

   나에게 모든 도시는 새벽으로 기억된다. 내가 30년 넘게 살고 있는 우리 동네의 새벽은 둥글고 고요하다. 나는 새벽마다 작은 공원을 걷는데 아주 천천히 한 바퀴를 도는데 5분이면 충분한 크기의 공원이다. 그래서 우리 동네의 새벽은 둥근 것이 되었다. 아직 잠이 깨지 않은 고요한 공원에는 새벽 손님이 많은데 어둠 속에서 걷다보면 사위가 밝아오고 익숙한 새소리가 들려온다. 어느 가지에 앉아있는지 소리의 주인을 찾으려고 고개를 들면 가까이 앉아 있던 다른 새가 울기 시작한다. 귓가에 새 한 마리의 소리가 얼마나 선명한지 그 소리의 의미를, 옆의 의미를 알아들을 것만 같다. 새벽에 이렇게 가까이 찾아오는 것들은 물론 이런 새소리만은 아닌데 그것들은 대부분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거나 어느 순간 서늘하게 느껴지는 것들이다. 그래서 새벽을 걷고 있으면 아직 깨지 않은 어떤 사람의 꿈속을 걷는 기분이 든다. 그 꿈속에서 나는 유일하게 어떤 길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사실은 단지 일찍 눈이 떠지는 습관 때문에. 나는 어느 도시에서 아침을 맞이하든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이 꿈속의 길을 나선다. 몇 번인가, 캄캄한 거리에서 이방인을 반길 리 없는 개들의 공격을 받기도 했지만 새벽의 산책을 멈추지는 못했다. 한 번은 어떤 도시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는데 어두컴컴한 새벽길을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 작은 묘지에 길이 막혀 더는 앞으로 가지 못하고 묘지 앞에 한참을 서 있었던 기억이 난다. 어슴푸레 밝아오던 새벽의 검푸른 하늘과 그 하늘을 배경으로 선 커다란 나무들, 나란한 묘비들과 그 새벽을 감싸고 있던 부드러운 고요가 한꺼번에 떠오른다. 새벽은 길을 잃기에 더없이 좋은 시간이다. 그날 알았다. 길눈이 밝아 인간 내비게이션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나는 그날 이후 새벽 산책에서 갈림길을 만나면 의도적으로 모르는 길, 좀 더 낯선 길, 여행객들이 다니지 않는 길을 선택하려고 한다. 기어이 더 많은 길을 잃고 싶다고 생각한다. 길을 잃었을 때만 나는 내가 길의 옆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길로부터 떠올랐을 때에만. 잔뜩 긴장하고 사방을 두리번거릴 때에만 나는 길을 온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그건 잠에서 깼을 때, 꿈에서 돌아왔을 때에야, 꿈이 내 안에 있었던 어떤 것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것과 비슷하다. 죽음 앞에서 삶이 가장 가까이 다가오듯이. 길은 꿈의 옆이고, 나는 꿈의 옆이라 길과 꿈은 밤을 지나 나란히, 함께 온다.

□ 기타, 그 밖의 다른 것

   발버둥, 몸부림, 지랄. 쓸데없이. 쓸데없는 것들에 마음 쓰는 게 습관인 나는 기타 등등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계속 발버둥, 몸부림, 지랄에 대해 생각했다. 지랄 같은 세계에서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발버둥과 몸부림뿐인가. 지랄 맞게도. 그러니까 때로 나는 발버둥, 몸부림, 지랄의 옆이었고 발버둥, 몸부림, 지랄은 또 하나의 내 옆이었던 것인데. (1,2년 사이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이 말이 자꾸 떠오른다. 다 같이 기타 등등이 되어가고 있는 기분이 드는 탓이기도 하고 모든 것이 기타 등등일 뿐인 걸까, 두려운 생각이 들어서 이기도 한데. 기타 등등. 기타 등등의 이유로 나는 최근 몇 년을 기타 등등의 시간이라 부르고 있다.)
   그 사이 여름에서 가을로 계절이 몇 번인가 바뀌었고 잎이 물들었고 낙엽이 떨어졌다. 작년에 왔던 제비와 올해 온 제비가 같은 제비인가? 올해 왔던 제비와 내년에 올 제비가 같은 제비일까? 또 한 번 쓸데없는 것들에만 마음을 빼앗기면서.

   오늘 하늘 좋다.
   바람이 차.
   그러게.

   기타 등등의 시간. 우리는 줄곧 화해와 자해를 반복했지만.
   그것은 현기증의 반복이었을 뿐. 우리는 아무것도 극복하지 못했다. 회복은 거의 불가능한 것 같았다.

   영원히. 그래, 영원히.

   우리는 툭하면 맹세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인 것처럼 너무 쉽게 맹세했고 또 다른 맹세로 또 다른 맹세를 잊었다.

   낮과 밤, 낮과 밤, 낮과 밤.
   열매들이 툭, 툭, 떨어지는 동안.

   이런 문장들은 아무 의미도 없는데. 내가 이런 낙서들을 끄적거리는 사이 카페 테라스에 앉아 하느님의 뜻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목소리를 높여. 하느님의 뜻대로. 네가 생각하는 가치가 너의 위치를 결정할 것이다. 네 몸의 위치와 네 사유의 위치가 너무 멀면 자꾸 이런 말을 듣게 될 거야. 너 대체 무슨 생각하니? 또 무슨 생각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 아주 가까이. 속삭이듯이 비는 내리는데. 창밖으로 우산 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보인다.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 눈으로 가만히 그 사람의 발끝을 따라가는데 카페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또 우르르 몰려 들어온다. 귀가 사람들의 말소리에 다시 한 번 끌려간다. 귀가 사람들에게 붙들린다. 내가 또 다른 옆에 붙들린다.
   “하늘의 높이는 어떻게 결정되나요?”
   무리 중의 한 여자가 묻는다.
   “하늘의 높이는 어디까지를 하늘로 규정하는 가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하늘은 어디까지입니까? 어디까지가 하늘입니까?”
   무리 중의 한 남자가 묻는다.
   “구름이 떠 있는 곳 까지가 하늘입니까?”
   “아니면 별들이 떠 있는 곳?”
   “그것도 아니라면 별과 별 사이, 별들 너머에 있는 암흑. 거기까지가 하늘입니까?”
   남자의 질문에 따라 하늘이 점점 더 멀리 달아난다. 하늘은 한순간 구름이 손에 잡힐 것 같은 곳에 있다. 하늘은 한순간 별들이 아득하게 반짝이는 곳으로 올라간다. 희미하게 반짝이는 별. 별과 별 사이. 별들에게는 별들의 하늘이 있는 것이다. 별들이 올려다보는 하늘. 하늘은 별들의 눈빛으로, 별빛으로 다시 아득하게 멀어진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삶인가?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삶입니까?
   나는 막연하게 떠올릴 수 있는 암흑과 암흑에 우주라는 이름을 붙인 사람들에 대해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나인가?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우리인가? 하늘에 뜬 구름. 흰 구름. 바람이 천천히 지나간다. 나는 문득 잊고 있던 창밖을 떠올린다. 창밖에 비를 맞으며 지나가던 사람을 떠올린다. 창을 향해 당신이 무심코 턱을 괴고 있는 것처럼 어떤 기억이, 어떤 순간이, 당신의 삶을, 너의 전부를 괴고 있어. 너는 그 위에 올려져 있고 너는 그것에 떠받쳐져 있다면. 그것이 텅 빈 어떤 것이라면. 나는 고개를 돌린다. 비는 그친 지 오래. 고개를 숙이고 걸어가던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움도 안타까움도 닿지 않는 먼 곳에 사는 사람을 그리워하고 상상하는 일. 보고 싶어. 안부를 전할 수 없지만. 보고 싶다. 부르고 싶어. 언제나 비어 있는 것들이 나를 붙잡는다. 텅 빈 눈, 텅 빈 의자, 텅 빈 해변. 왜 텅 비어있는 것들을 보면 언제나 마음이 울렁거리는 걸까. 나는 다만 옆이 되고 싶었는데. 당신의 옆. 나의 옆. 우리의 옆. 그렇다면. 그렇다면.

   당신들이 간 길을 따라,
   살면서 한 번도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단어들이 있다. 떠올릴 일조차 거의 없었던 단어들. 최근 몇 년 사이에 나는 그런 단어들의 맨 얼굴들을 갑작스럽게 만나게 되었다. 어디에서 불쑥 솟아오르는지 알 수 없는 얼굴과 얼굴, 얼굴의 옆과 옆. 옆의 옆에 당신들.
   자꾸 연대(連帶), 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들이 문득 찾아와서 사라지지 않고 귓가에 맴돈다. 귀의 옆. 목소리의 옆. 단어와 단어들의 옆.
   단식이, 단식으로 어떤 뜻을 이루려는 노력이, 이른바 단식투쟁이 얼마나 아름다운 발상에서 시작된 것인지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슬픈 믿음에서 시작되는 것인지 말입니다. 단식은, 음식을 거부하는 것은, 목숨을 걸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내가 너에게. 내가 당신에게 걸 것이 목숨밖에 없지만. 내 전부이기도 한 이 목숨을 걸면 그래도 당신이, 나와 같은 인간인 당신이 내 말에 귀 기울일 것이라는 믿음. 당신이 내가 건 목숨을, 당신의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것으로 생각해줄 것이라는 믿음. 내 목숨을 어쩌면 귀하게 여겨줄 것이라는 발상. 그리하여 내 굶기가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움직일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연대감. 나는 새삼 다시 내 옆에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옆에서 옆으로 번져가는 것들.내가 옆이 될 수 있었던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나의 옆이어야 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휘어지는 나무들.
   그 가지들이 견디고 있는 수북이 쌓인 눈의 무게를 가늠해본다.

   그저 천천히 걸으면서. 우리가 공작의 날개처럼 각자의 존재를 활짝 펼치고 결국 서로를 향해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말로는 전할 수 없는 어떤 마음이겠지. 때때로. 어쩔 줄 몰라 하는 당신과. 내가. 같은 마음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이 시간은 나란히 달리고 있는 노란 도로 주행차 같아. 서툴고 서툰, 우리를 그나마 이 땅에 발 딛고 서있게 하는 것들과 끝내 발을 잃고 떠돌게 하는 것들. 계절이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바뀌는 공기의 냄새와 비에 젖어 선명한 나무들. 죽을 만큼 죽고 싶어. 바람이 불어. 살아있다는 게 진저리치게 좋다. 어둠으로부터 떠오르는 것들. 어둠으로부터 우리가 떠올리는 것들. 허무의 한 모양으로서의 별과, 별들. 여기에는 함께가 없어. 함께. 제발. 함께. 제발. 옆에서 옆으로. 다른 옆에서 또 다른 옆으로. 게처럼 기어가는 제발. 제발. 더 멀리, 더 깊이 번져가는 어둠. 어둠의 옆.

   밤의 옆.
   우리는 줄곧 화해와 자해를 반복했지만.
   맹세만 남고 ‘우리’는 사라졌다.

   ‘우리’는 영영 ‘당신’을 잊은 것일까.

소설가. 1981년, 경기도 부천 출생. 2010년, 『문학과사회』를 통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