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칼럼] 내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중심 |부희령|

[12월의 칼럼] 내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중심 |부희령|

120427_15_3가끔 내가 왜 이 시점에서 이렇게 살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쩌면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그런 생각을 자주 하는 편인지도 모른다.

이십대의 마지막 일 년가량을 인도에 있는 사이비 종교집단 비슷한 아쉬람에서 머물며 지냈다. 명상도 하고 요가도 하고. 그 곳에서 나는 눈을 읽어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명성이 자자한 사람이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족집게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는 점쟁이도 예언가도 아니었다. 명상을 하다가 부딪치는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일을 하는, 굳이 분류하자면 심리상담가나 치료사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그저 구경삼아 그를 찾아갔다. 그는 눈을 읽는 것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사람마다 지문이 다르듯이 사람마다 홍채의 모양이 다르다고 한다. 태어날 때부터 다를 뿐 아니라 살아가는 동안 경험하는 물리적 심리적 역사가 홍채에 기록되어 끊임없이 그 모양이 달라진단다. 예를 들어 맹장 수술을 한 사람은 홍채에서 맹장에 해당하는 부분에 그 전에는 없던 흉터가 생긴다고 했다. 그는 사진을 보여주었고 홍채에 대해 연구한 권위 있는 논문의 목록들도 열거했다. 그런가보다 했지만, 심리적 상처까지 기록된다는 말은 좀…, 그랬다.
그는 나에 대해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그야말로 초면이었다. 그런데 그가 손전등과 커다란 돋보기로 나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너, 내 말 안 믿지?” 나는 그냥 실실 웃었다. 그는 말을 이었다. 너는 의심이 많다. 그건 네가 불안해서 그러는 거다. 너는 부모로부터 기본적으로 받아야 할 지지를 못 받았다. 그래서 늘 스스로 자신을 지키고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을 경계하고 의심한다. 자기 자신을 놓지 못한다. 네 부모의 잘못만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건 너의 ‘까르마’다. 너는 평생 중심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주위를 빙빙 돌 것이다. 존재에 대한 신뢰가 모자라니까.
아무 생각 없이 그의 말을 듣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 슬프다는 생각을 한 것도 아니고, 그의 말이 납득이 간 것도 아니었다. 중심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니? 도대체 무슨 말인가. 하지만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해도 왠지 평생 고칠 수 없는 불치의 병이라는 선고를 받은 기분이었다.
나는 여섯 명의 딸 가운데 네 번째 딸로 태어났다. 아들을 기다리던 부모에게 나는 축복이나 기쁨이기는커녕 절망의 표상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나의 부모가 특별히 나를 구박하거나 미워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대체로 나에게 무관심했다. 하지만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나이에 걸맞지 않게, 내가 왜 이 세상에 있는지, 왜 있어야 하는지 궁금했다. 알다시피 그런 질문에는 별 뾰족한 답이 없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부모에 의해서이니, 부모가 나의 탄생을 기뻐하지 않았다면, 부모가 나의 존재를 긍정하지 않았다면, 저절로 그런 생각을 하게 되기 마련인지도 몰랐다. 아닐 수도 있고.
그 뒤로 나는, 내가 들어갈 수 없다는 그 중심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종종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나 자신에 대해 불만이었던 성향이 ‘중심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어느 집단, 어느 모임에서도 늘 겉돌았다. 내가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일이나 사람에 대해서도 완전히 몰입하거나 열광해본 적이 없다. 거의 모든 일에 회의적이고 비판적이었으며 의욕이나 열정이 없었다. 연애를 할 때면 연인의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이며 무슨 일이 있어도 무조건 연인의 편이 되겠다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고,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문학을 위해 목숨이라도 던지겠다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나중에는 술을 마시고 필름이 끊기는 상태를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것조차 부끄러웠으며, 늘 생계에 대한 불안에 전전긍긍하는 내 모습이 지겹기까지 했지만 그렇다고 대범해질 수도 없었다.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소중해서인지 무서워서인지 끝까지 놓을 수 없는 무엇인가가 늘 내 안에 있었다.

연초에 스페인과 포르투갈 여행을 하면서 유럽 대륙의 서쪽 끝이라는 까보다로까라는 곳에 갔다. 절벽 위에서 내려다 본 바다 빛깔이 푸르고 깊었다. 한참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저렇게 요동치고 출렁이는 바다가 호흡도 번식도 하지 않는 그저 거대한 소금물 웅덩이에 지나지 않다니. 절벽 위에 세워져 있는 비석에는, “이곳에서 바다가 시작되고 땅이 끝난다.” 라는 포르투갈 시인의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한 때는 이곳이 세상의 끝이었다는 소리다. 바다의 경계선을 바라보았다. 모든 사람들이 아득한 저 쪽에 우주의 낭떠러지가 있다고 믿던 때가 있었다. 그럼에도 저 살아서 꿈틀대는 것 같은 바다 위에 가랑잎 같은 배를 띄우고 낭떠러지를 향해 앞으로 나아갔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오,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
문득 내가 왜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떠올랐고, 또 다시 내가 도달하지 못한 중심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뭐가 그렇게 무섭고, 뭐가 그렇게 소중한가. 무섭지 않은 것은 또 무엇이고, 소중하지 않은 것은 또 무엇인가. 중심이라는 곳에 들어가려면 양 손을 묶고 두 눈을 가린 채 저 바다 속으로 몸을 던지기라도 해야 하는 것인가.
내가 결코 도달하지 못할 중심이라니, 젠장.

[소설가]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중퇴. [상훈] 2001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어떤 갠 날」. [소설] 「어떤 갠 날」, 『2001년 신춘문예 당선소설 작품집』 (공저), 프레스21, 2001, 단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