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김현문학패 선정의 말

제1회 김현문학패 선정의 말

kimhyun∎ 성기완: 의미가 붕괴된 시대의 시적인 삶, ‘소음-시’와 ‘소리-시’의 탄생

   성기완은 어쩌면 그동안 시인으로서보다는 인디-록 밴드 <3호선 버터플라이>의 리더이자 기타리스트로서, 작사가·작곡가로서, 그리고 문화와 대중음악 비평가로서 더 이름이 알려진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시적 성취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희석되었고 그 가치 또한 저평가되어 왔는지 모르겠다. 사실 그가 펴낸 네 권의 시집은 1990년대 이후 한국시의 현란한 전개 과정 중에 딱히 그 표층으로 떠올려져 집중적 조명을 받은 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의 시들은 당대의 표층을 움직인 일종의 심층 에너지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다.
    여기서 우리가 ‘의미’를 거론하는 것은 어쩌면 하나의 아이러니다. 1994년에 등단한 그는 문학적 시발점에서부터 ‘의미’의 세계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시적 무정부주의자이기 때문이다. 그 시발은 필경 1980년대에서 1990년대로 넘어가며 전 시대의 이념들이 붕괴되어간 당시의 사회문화적 상황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의 많은 시인이 어느새 의미의 폐허 위에 새로운 의미를 구축하거나 기존의 의미를 재구성하려 했다면, 성기완은 ‘의미’의 허상들을 끝내 거부하고 더욱 외곬으로 존재의 근원적인 무의미성을 향해 다가감으로써, 역설적으로 무의미 자체의 꽃을 피우며—한국 문학사 속에 무의미의 시학을 펼친 시인들이 있었지만 그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한국시의 전혀 새로운 전망 하나를 열었다는 점이 우리의 각별한 이목을 끌었다.
    성기완의 첫 시집 『쇼핑 갔다 오십니까?』(1998)는 그 시적 시발의 상황과 그가 가야만 했던 어떤 미래를 치명적인 숙명처럼 제시한다. 그가 이 세계를 마주 보며 발설하는 최초의 시적 진술은 “아으 의미 없음이여 / 그러나 아으 느낌의 폭포여”라는 두 마디 속에 압축되어 있다. 이 세계와 삶이 결정적으로 의미 없다는 것과 그럼에도 삶을 움직이는 어떤 느낌의 폭포가 쏟아지고 있다는 것. 그런데 위의 시적 진술은 아직 정언법적이거나 잠언투다. 그는 곧 수사학적 명제화가 초래하는 이런 자기 모순적 어투—의미 없는 세상에 뭔가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듯한—를 버릴 것인데, 이 전환의 암시는 예컨대 「볼 만한 티브이 프로」나 「내리실 문은 없습니다」 등의 연작시를 시집 요소요소에 대못을 치듯 박아 넣는 방식 속에서 드러난다. 그 시편들이 의도하는 바는 아마도, 의미 없는 세계를 거짓 의미로 덮어씌우지 않고 정면 응시할 수밖에 없을 때, 그래서 이 세계를 망연한 ‘느낌’들만으로 살아내야 할 때 요청되는 어떤 존재 방식과 그 시적 서술방식의 구축일 것이다.
    두 번째 시집 『유리 이야기』(2003)는 그런 시도의 전면적 실천이다. 무의미하게 들끓는 그 ‘느낌’들의 정체를 밑바닥까지 찾아 헤매는 방식으로, 이 연작 시편은 결국 무의식의 세계로 진입한다. 그리고 거기서, 무의식의 서사 아닌 서사, 하염없는 시적 서사를 빚어낸다. 그 발화 주체는 크게 ‘나’와 ‘유리’와 ‘초록 괴물’로 나뉘지만 끊임없이 분열하거나 합쳐지고 있으며, 그 진술 방식은 얼핏 초현실주의자들이 약물에 취해 내뱉는 자동기술의 형태를 띠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뭔가가 다르다. 그것은 차라리 약물에 취한 디제이(DJ)가 무의식 속에 내장된 음악적 자료들을 즉흥적으로 틀어주고 병치시키고 편집하고 조작하는 방식과 흡사한, 일종의 자율적 ‘모듈’에 의한, 성기완 풍의 독특한 자동기술이라고나 할까. 이때 지적되어야 할 사항은, 그것이 아무리 자동기술이라 할지라도 언어로 행해지는 기술(진술)인한, 약물에 취해서도 무의식에 개입하는 교묘한 의식이 역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면(따라서 진짜 문제는 의식-무의식의 총체다), 그래서 “그 ‘무엇’의 그림자일 뿐”인 ‘흔적’으로서의 심층적 무의식도 이미 구조화되어 있다는 면이다.
   위 시집이 무의식의 도식성과 그것을 은폐하는 변신의 방식들을 환각적으로 드러내면서 그 뒤에 감추어진 어떤 작동 원리를 문제 삼게 만든다면, 그 연장 혹은 병렬의 차원에서, 세 번째 시집 『당신의 텍스트』(2008)에는 흔히 무의식의 근원이라 일컬어지는 성적(性的) 욕망과 그 나락의 온갖 모습들이 파편화된 형태로 가득 차 있다. 앞의 시집과는 반대로, 여기서는 ‘서사’ 대신 날것 상태의 온갖 원초적 느낌들이 날뛴다. 그렇다고 그것들이 모종의 자유와 새로움을 시위하는 것은 아니다. 온갖 성적 체위를 시험해보는 듯한 욕망의 발현 행태들은 무의미한 삶을 살아내야 하는 몸부림의 재확인인바, 초점은 그 몸부림조차 어떤 ‘한계’ 속에 패턴화되어 있다는 것에 맞춰진다. 더구나 그 허망한 몸부림은 닫힌 개인의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사회적 삶의 양태나 예술의 차원에서마저 동질적이고 반복적인 패턴으로 표출되는 양상이 폭로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충격적이다. 온 세계가 무의식의 유리병 속에서 ‘텍스트’로 출렁인다. 너와 나, ‘3인칭’인 ‘우리’는 아무리 출렁여도 반복되는 어떤 존재론적 문법 체계에 구속되어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혹시, 텍스트 밖으로 일탈하거나 텍스트 안에서 텍스트를 내파시킴으로서 텍스트에서 해방될 길은 없을까? “진정한절망의혁명”은 가능할까? 그런 물음에 관한 지난한 탐색의 장이 네 번째 시집 『ㄹ』(2012)에서 펼쳐진다. 앞의 시집에서도 드문드문 편린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 시집은 최대한 언어에서 의미를 분리시키며 의미가 박탈된 언어로도 시가 생성될 수 있는가를 실험하려 한다. 이 실험 뒤에는 의미를 추구하지 못하는/않는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어려운 질문이 덧대어져 있다. 의미가 제거되고 남은 언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지러운 소음(노이즈)이거나 단순한 소리일 것이다. 소음과 소리는 그 존재 층위와 존재 방식이 약간 다르다. 소음이 의미를 전달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혼돈스런 바벨의 언어와 같다면, 소리는 애초부터 기의(의미)와 무관한 기표에 견줄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시인의 상상 속에서, 이제 언어는 정상적인 의미 전달 기호가 아니라 서로에게 그저 청각적 파동으로 작동하는 소음이나 소리의 기호가 된다. 그리고 여기가, ‘소음-시’와 ‘소리-시’가 꿈 트는 자리일 것이다.
   이때 시인은, 혹은 시 그 자체는, “더자유롭기위해뜻을버린음악”과도 같은 무엇인가를 내뿜는 하나의 발성 기관이 된다. 그러면 발성된 말들은 이제 소리의 시스템 속에서 배치되고 교차되고 반복되고 혼융되며 허공을 흘러갈 터인데, 그렇게 흘러가면서 빚어지는 어떤 음악적 울림과 충격을 생산코자 하는 것이 혼돈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는 ‘소음-시’와 그것을 초월하려는 순수 ‘소리-시’라 할 수 있다(그의 소리-시들은 한국어의 순수한 음향적 구성에 관한 많은 것을 암시한다). 실제로 순간순간 성기완의 시들이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는, 저 처절한 고통의 느낌과 몽환적 아름다움의 느낌 사이에서! 현재로선, 여기가 성기완 시인이 도달해 있는 시적 몽상 또는 욕망의 끝자리인 듯하다. 물론 그의 이러한 욕망이 당장 우리의 현실적 삶에 직접적으로 이양되고 실현될 수는 없다. 현실은 태초의 언어에 내장된 지시성과 의미 작용의 기제를 제거한 언어로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잊지 말자, 이런 모순 결합적 반전의 상상력이야말로 언제나 인간과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이끌어온 단서가 되지 않았던가…
   김현 선생이 타계한 48세의 나이에 이른 그가 보다 근본적 변화를 추동할 수 있는 새로운 상상세계를 실험하고 형태화하는 데 망설임이 없길 바라며, 김현문학패의 첫 수여자로 선정한다.

∎ 한유주: 거짓 기억과의 싸움, 끝없이 이야기를 지우는 소설 쓰기

   2003년에 스물한 살의 나이로 등단한 한유주에게도, 이 세계는 진정한 의미를 상실한 삶과 언어의 실존 공간이다. 아니, 이 작가의 젊음이 내던져져 있던 21세기 초입의 세계는 어쩌면 성기완 시인의 젊음이 겪은 1990년대의 세계보다 더욱 가증스럽다. 작가는 2001년 뉴욕의 한복판을 폭파시킨 ‘9‧11 사태’와 그 뒤를 잇는 야만적 전쟁을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에 충격적으로 목격한 세대에 속하는데, 그를 혼돈과 고뇌에 빠트리는 것은 전파 미디어를 통해 허구의 영화를 보듯 목격한 그 “장면은 [실]감각 너머에 있다”는 점(“내 기억은 전파를 타고 왔으므로 세계는 14인치 텔레비전 화면 하나로 축소되어 있었다”)과 그렇게 폐허화된 세계가 어느 틈에 거짓 수사학의 포장과 장식으로 뒤덮여 버렸다는 점이다.
   작가로서의 한유주의 출발점은 “우리 세대는 수사학이 선인 세대다. […] 우리에게 언어는 다만 치장일 뿐이다. 치장된 언어는 윤리적으로 거짓말보다 더 나쁘다.”는 자의식이다. 현실 세계가 “잘못된 전언”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언제나 잘못 전해진 이야기들이 문제였다”는 인식이야말로 차후 그의 소설 세계를 이끌어가는 가장 근원적인 동력이 될 것이다. 첫 소설집 『달로』(2006)의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런 인식은 곧 ‘이야기’라는 것에 대한 회의와 비판, 더 나아가 이야기를 다루는 소설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가능성의 실험으로 이어진다. 이 순간, 이 작가에게 또 ‘전위적’이니 ‘메타-소설적’이니 하는 상투적 수식어를 붙이고 그 일반론이나 나열하는 과오를 되풀이하지 말자. 그런 수식어야말로 이 시대의 가장 무능한 비평가들이나 사용하는 헛되고 무용한 수사학이 되기 일쑤다(더구나, 진정 소설다운 소설치고 ‘소설에 대한 소설’이 아닌 경우가 있었던가). 그러므로 정말 필요한 비평 작업은 그런 선험적 관념의 연역적 대입이 아니라, 이 작가만의 특수한 소설관을 작품의 실체적 분석으로부터 추출해내 그것을 기존의 소설론과 대조하며 그 차이나 변화를 해석하고, 의미와 가치를 논하는 것이리라.
   한유주의 작품들을 굳이 ‘소설에 대한 소설’로 읽더라도, 그 전에, 그에게 ‘살다’와 ‘말하다’—더 나아가 ‘쓰다’—는 동전의 앞뒤처럼 겹쳐진 동사이며 이 둘을 매개하는 것이 기억이라는 점을 명확히 전제해야 한다. 개체로든 공동체로든 삶의 정체성을 유지시켜주는 것은 기억이고, 이 기억의 핵심적인 보존 도구는 말(글)이며 그 보존 장치가 이야기다. 그런데 작가가 자존적 자의식을 가지고 이 세상을 마주하며 살고자 했을 때 맞닥트린 문제는 난감하게도, 자신이 간직해온 기억이라 것들이 어떤 숨어 있는 손의 “직조 기술”로 만들어져 주입된 “가짜의 기억”이라는 직관과 진짜 기억은 “모두에게서 잊혀졌다”는 직감이다. 그렇다면 진짜 기억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거꾸로 “말 아닌 모든 것” 속에, 즉 감각 속에 “소리로, 체취로, 뿌연 영상으로” 존재한다. 그 “유령과도 같은 기억”을 ‘치장’이 아닌 언어, 말다운 말로 “말하고 싶다”는 그의 작가로서의 첫 욕망은 그런 인식으로부터 발아한다.
    말이 아닌 것으로 존재하는 기억을 새로이 말로 존재시키고자 하는 이 욕망은 과연 얼마만큼이나 실현 가능할 것일까? 아마도 작가는 그에 적합한 어떤 “말하는 방법”을 찾으면 된다고 믿었고, 처음엔 감각만으로 살아 움직이는 음악과 이형동질적인 어떤 글쓰기에서 그 가능성을 찾고자 했던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음악에서 과거를 발견하고,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는 데 착안하여 음악의 분신과도 같은 언어 세계를 작곡해보려던 야심은 그러나 곧 난관에 부딪힌다. 이런 시도는 일면 성기완의 시적 실험과 내통하는 듯이 보이지만(‘얼터너티브’ 음악 세대가 공유한 감수성일 수 있다), 그 전제에서부터 근본적인 제약이 가로놓여 있다. 성기완의 ‘소리-시’는 의미가 제거된 언어를 오로지 소리 기호로 다루며 그 음가의 집합 체계를 구성하는 방법론을 취할 수 있었던 반면, 한유주의 ‘음악-소설’은 진짜 기억을 되살리는 데 목적을 두고 있어서 그 기억의 처소인 현실에 대한 언어의 지시성 즉 의미를 완전히 제거할 수가 없다. 그것이 아무리 오염되어 있다 할지라도 말이다.
    이제 작가의 고뇌는 다른 방향으로 깊어진다. ‘나’는 그 오염된 언어의 체계 자체를 벗어날 수 없다는, 그것에 온전히 지배당하고 있다는 깨달음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나’를 지시하는 고유명사로서의 내 이름마저도 그렇다. 그로 인해 “나는 내가 나인 것이 지겨웠지만, 이 지겨움을, 온몸의 혈액을 타고 흐르는 유기적인 지겨움을, 몸 밖으로 떼어내기란 요원했다.” 이때 발생하는 더욱 곤혹스러운 의혹은, 그 언어 체계에 갇힌 상태에선 무슨 글을 쓰든 그 언어 체계의 자원으로 쌓여 있는 글의 전범들을 베껴 쓸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애초에 ‘나’가 꿈꾸었던 글쓰기는 흔적도 없이 매몰되는 것이 아닐까? 이 불안감은 『얼음의 책』(2009)의 처음부터 『나의 왼손은 왕, 오른손은 왕의 필경사』(2011)의 끝까지 강박적으로 반복되며, 다양한 문제의식과 방황과 모색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마침내 소중한 결실 하나를 낳는데, 그것은 기존의 글쓰기 방식을 내파하는 독창적 방법론의 발견 혹은 발명이다.
    기존의 언어 체계를 대체하는 독자적 상상 세계의 구축이 당장은 불가능하다면, 우선 그 기존의 체계를 조금씩 허물어가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 거기서부터 작가는 “다시 시작한다.” 이제 그가 “쓰고 싶은 것들은 서술도 묘사도 진술도 아니다.” 그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고 소설을 쓰고 싶다.” 이 역시 어렵지만, 내기를 걸어볼 만한 발상이다. 일반적인 소설들은 분절된 시간 단위의 행위들의 선적인 연쇄를 서술한다. 그리고 묘사를 통해 그 연쇄적 흐름을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만들고, 그 개연성을 그럴듯하게 진술한다. 그럼으로써 아무리 비정상적인 행동도 어떤 필연적 운명의 결과인양 세뇌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작가는 그 직선적 개연성의 고리를 끊고 분절된 이야기 요소들을 순간 속에 멈춰 세운다. 매순간, 그 순간 속에서, 이미 이야기된 행위들은 부정되거나 그 순간을 대신할 수 있는 다른 행위들이 다면적으로 제시된다. 따라서 그것을 서술하거나 묘사하는 단어나 문장들도 언제나 수정과 변환이 가능하다. 요컨대, 어서 의미를 결정지으려는 거짓 이야기를 끝없이 차단하고 지우면서 반대로 이야기의 미결정성을 지속적으로 밀고 나가는 독특한 언어 풍경이 한유주에 의해 소설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차라리 소설 이전의 소설 혹은 소설 이후의 소설이라 불러야 좋을지 모를, 이 해체적인 글쓰기가 펼쳐 보이는 언어 풍경들이 역설적으로 신비롭고 아름답기조차 한 것은, 어쩌면 유보 상태에 있는 음악적 소설에서 시도되었던 일종의 언어 작곡법이 의미를 비워가는 언어와 더 잘 어울린 까닭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 작가의 문학적 성과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소설 문체의 새로운 영토를 개척했다는 점, 더 나아가 한국어의 표현 가능성을 확장시켰다는 점이다. 특히 처음부터 끝까지 부정문으로만 써나간 한 단편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소설적 추구를 효과적으로 형상화하는 부정문 사용의 용례들은 단연 독보적이다. 그것은 그의 해체 작업이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또 다른 창조라는 사실을 입증해준다. 그 연장선에서, 작가의 첫 장편 『불가능한 동화』(2013)는 그의 소설적 모험이 혹시 일시적이며 단편적인 실험에 그치는 건 아닐까 하는 우려를 불식시킨다. 장편의 규모로, 1부와 2부의 대칭적 구도 속에 그의 다면적 탐색들을 상대화시키며 하나의 ‘총체적’ 텍스트로 조직화한 이 소설은, 그의 미학이 한국문학의 미래를 열어가는 길 위에 세워진 중요한 이정표가 될 수 있음을 스스로 시위하고 있다.
    천국의 도서관에서 김현 선생이 읽을 ‘행복한 책읽기’ 목록에도 한유주의 소설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고, 우리는 확신한다.

   공교롭게도 성기완과 한유주는, 의미가 상실된 세계 속에서의 삶을 어떻게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 극복할 수 있느냐는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는바, 결과적으로 그러한 면모가 이번 제1회 김현문학패의 주제가 되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살아서 이 세계의 무의미와 싸워야한다”던 김현 선생의 옲조림이 새삼 떠오른다…

대표 집필: 이인성

(선정위원: 이인성, 김혜순, 성민엽, 정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