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칼럼]  바이러스 알레르기  | 류인서 |

[9월의 칼럼] 바이러스 알레르기 | 류인서 |

ryuinseo   우리 사회에서 바이러스라는 말만큼 자주 사용되는 말은 흔치 않다. 감기 바이러스, 메르스 바이러스, 에볼라 바이러스라는 말로부터 컴퓨터 바이러스, 영화 바이러스라는 말을 거쳐 긍정 바이러스, 열정 바이러스라는 말에 이르기까지. 그래서 바이러스라는 말이 가리키는 대상과 내용도 무척 다양하다. 감기 바이러스처럼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생물과 무생물의 중간자를 가리키는가 하면, 이메일 바이러스처럼 컴퓨터를 숙주 삼는 악성 프로그램을 가리키기도 하고, 긍정 바이러스처럼 우리의 의식체계를 타고 전파되는 감정의 불투명한 상태를 가리키기도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바이러스란 말에는, 이 말이 ‘독’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온 원죄 탓인지, 긍정적인 의미보다는 부정적인 의미가 훨씬 강하고 나 역시 부정적 알레르기를 가진 사람 중의 하나이다. 바이러스라는 말만 들어도 대뜸 두려움이 앞서면서 머리에는 홍역 에이즈 광견병 사스 에볼라에서 신종 인플루엔자까지 학습된 바이러스들이 줄줄이 떠오른다. 그래서였는지 지난 6월 우리를 들었다 놨다한 메르스 사태 앞에서 무형의 에너지체인 전파라는 바이러스를 타고 실시간으로 전송돼오던 공포의 맛은 끔찍했었다. 마치 서울이라는 공간이 커다란 숙주세포라도 된다는 듯 아이들 걱정에 발작적으로 반응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메르스에 대한 나의 첫 반응은 부끄럽도록 방관자적인 것이었다. 낙타시장을 들렀다 온 남성이라는 어나운스먼트에 터번을 쓴 남자들이 북적대는 이국의 시장 풍경을 떠올리면서 터번에서 이름을 얻었다는 튤립과 튤립 바이러스 쪽으로 건너뛰는 생각들을 즐겼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튤립 공황, 황제튤립의 구근 하나가 쓸 만한 양조장 한 채 값이었다는 기록 등을 떠올렸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생각하니 후대인이 광기와 우매함의 패턴이라고 부르고, 당대에는 도취의 대상이었던 황제튤립 사건 속에는, 파격적으로 찢어진 그 꽃잎과 도발적 꽃무늬가 바이러스 감염의 결과라는 사실 속에는 인간과 바이러스의 관계에 대한 가치전복적인 유머가 통증처럼 살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과 바이러스의 관계는 공존하는 경우와 적대적인 경우가 있다. 바이러스는 숙주인 인간이 죽으면 자신도 죽어야 한다. 그래서 감기 바이러스처럼 인간에게 적응한 종류가 있는가 하면 에볼라나 메르스 바이러스처럼 아직 적응하지 못한 것들도 있다. 그렇지만 인간에게도 바이러스에게도 서로 살아남기 위한 진화는 필연적 목표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바이러스라는 말만 들어도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대다수 사람들의 모습보다 우리 인류는 바이러스, 박테리아류와 공진화를 거듭해왔다고 하는 주장이 한층 살갑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를 테면 미토콘드리아는 15억 년 전 우리 몸에 들어온 박테리아에서 시작된 세포 기관이라는 가설, 아기를 키워내는 산모의 태반이 외부 바이러스의 혼입에 그 생성 기원을 두고 있다는 추론 등이 그러한 주장들이다. 우리는 지구의 주인은 당연히 인간이라 생각하지만 분자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지구의 주인은 원시생명체인 ‘바이러스’이다.
   숙주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동시에 숙주자신이 외부로부터 인입해온 것이라는 점에서, 죽음에 닿도록 정복되려 않고 변이를 거듭한다는 점에서 바이러스는 인간의 욕망과 닮았다. 인간 욕망의 산물인 시와 닮았다. 시라는 것도 일종의 외부 감염 과정이거나 그 결과물일 터이므로. 그래서 나는 때로 시인들의 힘겨운 시작이 바이러스 같은 것들과의 즐거운 의기투합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긍정적 에너지로든 부정적 에너지로든 바이러스라는 촉매, 바이라스라는 연금석으로부터의 감염이 있고서야 발병이 있겠으니, 중앙아시아 깊은 골짜기로 그를 찾아가는 밤이 있기를……. 그런데 정작 나는 가벼운 여름 감기에도 힘겨워한다.

시인. 2001년 『시와 시학』으로 등단했으며, 시집 『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 『여우』,『신호대기』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