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칼럼] 『말벌공장』을 읽어 본 적이 있습니까? | 기혁 |

[8월의 칼럼] 『말벌공장』을 읽어 본 적이 있습니까? | 기혁 |

kihyuk   이 짧은 글에서 내가 쓸 수 있는 말은 무엇인가? 사고는 비루할 것이고 문장은 비약을 거듭할지 모른다. 가령, 지금 내 눈에 들어온 천정의 얼룩은 말벌이다. 그리고 이곳은 대학로에 위치한 어느 사무실의 듀얼 모니터 앞이다. 이 두 문장 사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기력하게 간밤의 술자리를 되새김질하는 것뿐이다. 이곳은 국가기관이다. 이언 뱅크스의 소설『말벌공장』. 나는 무기력의 틈새에서 아주 오래전 어느 문청이 빌려준, 읽어보기도 전에 잃어버린 한권의 책을 꺼내려고 한다. 이 책은 간밤의 술자리와 무관하지만 무관하기 때문에 더욱더 집중하게 만든다.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는 육중한 무게를 지닌 채 매달려 있다. 소설을 잃어버린 이후에도 나는 누군가에게 선물로 주겠노라 말한 적이 있다. 소설을 쓰는 문청이었는데, 그녀를 처음 보자마자 누구누구를 좋아하는지 물었고 그녀가 대답한 누구누구를 알지도 못한 주제에 『말벌공장』을 추천했다. 실망이다. 이것은 간밤에 같이 술을 마신 편집자 선배가 했던 말이다. 그러나 처음으로 실망이라는 단어를 쓴다던 선배의 고백과는 다르게 나는 벌써 3번이나 같은 실망을 들었다. 어째서 선배는 페이스 북의 ‘좋아요’를 누르듯 실망을 추천할 수 있었던 것일까? 『말벌공장』의 내용을 모르던 나는 이언 뱅크스의 이름만 기억하고 있었다. 내말을 듣던 그녀가 이언 뱅크스의 다른 저작들을 이야기한다. 전 『다리』는 읽어봤어요. 저랑은 안 맞았지만. 다리. 그것은 분명 움직이는데 필요한 도구일 것이다. 아니다. 장롱과 식탁, 리모컨도 다리가 있지만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다리가 무엇인지 고민 중이다. 그녀가 『다리』를 읽어 봤다면 나의 고민을 들어줄지도 모른다. 다리는 무엇인가? 이언 뱅크스의 다리는 움직이고 있는가? 하지만 나는 잃어버린 『말벌공장』으로 되돌아와야만 했다. 다리라니요? 다리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재밌어요. 그래도 전 영국 작가는 별루에요. 영국 작가라는 말을 듣는 순간, 존 파울즈의 『프랑스 중위의 여자』가 떠올랐다. 맨 처음 『말벌공장』을 빌려주었던 문청은 내가 영국 작가를 싫어한다는 말을 듣고 소설을 빌려주었던 것 같다. 존 파울즈. 그럼 이쯤해서 이 사건의 전모를 밝혀야 겠다, 정도의 말로 소설에 끼어들던 무뢰한. 그렇다. 학부시절 어느 수업에서 우리는 존 파울즈를 읽었고 소설가의 부당함에 대해 분노했다. 그 분노의 결과로서 이언 뱅크스의 『말벌공장』이 내게 온 것이 분명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짧은 글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기력뿐이다. 나는 이쯤에서 이글의 전모를 밝힐 수 없다. 잃어버린 『말벌공장』을 읽을 수도 없고, 실망을 추천할 수도 없다. 3차 술자리가 파할 무렵, 편집자 선배는 그림이나 사진이 아니라 텍스트를 놓고 자위를 해본 일이 있다고 말했다. 김경주 시인의 「비정성시」 중에 비슷한 얘기가 나오는데요. 너는? 왜 자위를 해요? 여자랑 하지. 몇 살 때? 나는 중학생과 고등학생 사이에서 망설이다가 고등학생 때라고 대답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화제가 전환되었다. 나는 지금 중학생 때라고 말하지 않은 걸 후회한다. 그랬다면 천사가 지나가는 일 따위는 방지할 수 있었을 테니까. 이곳은 내 방이 아니라 국가 기관이다. 나는 어떤 아르바이트 때문에 듀얼 모니터 앞에 앉아있다. 그런데 내용도 모르는 『말벌공장』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결국 이 일이 아르바이트가 되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영국 소설가가 별로라고 말했던 그녀에게 텍스트 앞에서 자위를 해본 적이 있냐고 묻는다면 어떨까? 다리는 자위를 하는데 필요한 물건인가? 이 일들에 대한 대답은 모두 국가 기관에서의 아르바이트다. 나는 성실한 사람이므로 더욱 더 『말벌공장』에 대해 생각할 것이고, 어쩌면 텍스트 앞에서의 자위를 실행에 옮길 기획서를 엑셀이나 파워포인트로 작성할 지도 모른다.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는 점점 더 명료해진다. 나는 왜 읽지도 않은 『말벌공장』을 포기하지 않는가? 애초부터 『말벌공장』 따위는 빌린 적이 없다는 걸 가정하지 못하는가? 그러나 생각이 여기에 미치게 되면 모든 일들은 뒤죽박죽이 되어버린다. 나는 정말 어제 술을 마셨는가? 여기는 국가 기관이 맞는가? 내가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 칼럼을 청탁 받고 알 수 없는 글을 쓴다는 사실 외에 모든 것은 가능성으로 남는다. 가능성. 그렇다면 이언 뱅크스는 가능성의 작가인가? 내 서재에 꽂혀 있는 『다리』를 볼 때마다 잃어버린 『말벌공장』을 상기시키는, 원인모를 가책마저 느끼게 만드는 최면술사인가? 그러나 이 글을 『다리』나 『말벌공장』의 서평 혹은 광고 정도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천정의 얼룩을 말벌로 착각하지 않았더라도 나는 가능성을 언급했을 테니까. 혹자는 천정의 얼룩이 정말로 말벌이 되어 날아다닌다거나, 말벌에 쏘이지 않도록 도망 다니는 상상을 ‘문학적’이라고 평할 것이다. 하지만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 해도 그것이 아주 벌이 되어서는 안 된다. 파킨슨병으로 투병 중인 무하마드 알리처럼 확고하게 자리 잡은 텍스트는 가능성을 잃고 무표정해진다. 방금, 사무실에 나왔으나 일이 없다는 문자 메시지를 담당 공무원에게 보냈다. 그는 메시지를 보자마자 지워버릴 것이다. 그럼에도 마무리 되지 않은 이 난삽한 글의 맥락에서 그 메시지는 가능성으로 남는다. 아마도 그는 내 문자를 보며 자위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담당 공무원으로서 그의 일과 중 하나다. 진실은 문자를 보냈다는 나의 고백이나 담당 공무원의 존재 유무와 관련이 없다. 중요한 것은 독자다. 심지어 텍스트를 읽지 않은 독자도 독자가 될 수 있다. 베스트셀러 작가인 이언 뱅크스의 『말벌공장』과 『다리』에 대하여 무엇이 떠오르는가? 나조차도 읽지 않은 텍스트를 당신들은 이미 읽고 있다. 고백하건데 나는 당신들이 사랑스럽고 두렵다. 심지어 어렵기까지 하다. 출판시장에서는 언제나 구매자의 감소를 우려하는 눈치지만 나는 당신들이 다 알고 있다는 걸 의심하지 않는다. 당신은 텍스트 앞에서 자위하다 제 몸에서 길을 잃어버린 미아다. 그렇다면 문학 역시 그들의 근본을 찾아주는 작업이기보다 제 몸을 돌아 스스로의 절정을 맛보게 해주는 도구가 아닐까? 담당 공무원에게 연락이 왔다. 일단 좀 보수적으로. 그가 다시, 내 아르바이트에 가능성을 던진다.

1979년 경남 진주 출생. 2010년 『시인세계』신인상(시)과 2013년 『세계일보』신춘문예(평론)로 등단. 시집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 박수』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