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칼럼] 2013년 겨울, 완성되지 않을 메모들 | 이장욱 |

[1월의 칼럼] 2013년 겨울, 완성되지 않을 메모들 | 이장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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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는 전체의 구도보다는 디테일을 선호했으며, 의미심장하기보다는 화려하고 장식적이기를 희망했다. 지나치게 장식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클림트를 비난하는 것은 그가 이미 무릅쓴 것을 말한다는 점에서 피상적이다. 그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화려한 디테일과 장식적인 외양, 그 자체의 내부로.
더 깊은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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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오키프는 집요하게 꽃만을 그렸다. 그것은 꽃이며, 거부할 수 없이 꽃이다. 하지만 그녀의 꽃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결국 그런 생각이 든다. 아니,
그런데,
그러니까,
그녀가 그린 건 대체 무엇인 것일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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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영역에서 프레임의 파괴는 이미 파괴가 아니라 하나의 관례이다. 하지만 전시실을 다 돌아보고 나면, 보이지 않는 ‘프레임’이 더 강고해졌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다. 오브제는 오브제가 아닌 상태와 어디까지 뒤섞일 수 있는 것일까? 또는 뒤섞여야 하는 것일까? 오브제가 이미 오브제가 아닌 상태, 그것은 곧 삶의 상태가 아닌가? 그곳에서 예술이 종말을 맞이한다면, 예술에게 그보다 더 과분한 행복은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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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예술가들에게 감동이란, 결코 긍정적인 표식이 아니다. 가령 정성일이 인용한 파스빈더의 문장 : “내 영화를 보고 사람들이 감동받았다고 말할 때, 나는 내가 실패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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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교심 같은 긍정적 덕목이 학벌주의 같은 악덕으로 바뀌는 데는 1초도 걸리지 않는다. 애국심 같은 긍정적 덕목이 이데올로기적 무지로 가득한 호전적 국수주의로 바뀌는 데는 1초도 걸리지 않는다. 이 ‘1초’를, 영원히 건널 수 없는 시간으로 만들 수는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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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교심과 애국심에도 순기능이 있다고? 그럴 것이다. 하지만 순기능과 역기능을 섬세하게 구분하는 행위가 때로는 진실을 호도한다. 역기능을 줄이고 순기능을 남기면 된다고 말하는 순간, 그는 대개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는 것이다. 역기능은 순기능의 필연적 결과이기 때문에. 순기능이 있다는 바로 그 이유로, 역기능은 이미 불가피하기 때문에.
그러니 시에는 순기능도 역기능도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차라리 다행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것이 저 순(順)과 역(逆)의 이분법 바깥에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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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작가는 궁극적으로, 일종의 기록노동자이다. 순(順)과 역(逆)의 저편에서, 쓸모와 불모의 저편에서, 무명과 유명의 저편에서, 이 세계와 인간과 실재를 자신만의 유일한 방식으로 기록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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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보다 더 논리적이라고 믿는다면, 그는 소피스트이다. 내가 너보다 더 옳다고 믿는다면, 그는 소피스트가 아니다.
내 존재가 ‘시’ 자체의 포화상태라고 믿는다면, 그는 시인이다. 내가 더 ‘옳은 시’를 쓴다고 믿는다면, 그는 시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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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맨눈으로 세상을 보는 시인도 있고,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는 시인도 있고, 망원경이나 현미경, 또는 카메라로 세상을 보는 시인들도 있다. 물론 선글라스를 쓰고 보는 시인도 있을 것이다. 혹 우리는 맨눈으로 보는 세상만 온전한 세상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닌가? 현미경으로 본 세상은 맨눈으로 본 세상보다 인위적인 세상일까? 망원경으로 본 세상은 비현실적인 이미지일까? 천체망원경으로 우주를 보는 건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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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늙었다(Mundus senescit). 5세기 게르만 이동 끝난 뒤 유럽대륙에 유행하던 말이라고 한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세계는 그 늙음의 상태를 지속해왔다. 늙은 세계는 기나긴 중세를 거쳤으며, 근대라는 새로운 몸을 창안하여 생명을 연장해왔다. 쇠잔한 생명의 끝에 있는 것은, 여전히 늙은 세계 자신이다. 세계는 어쩌면, 애초부터 늙은 채로 태어난 것인지도 모른다. 갓 태어났는데도 이미 쭈글쭈글한 얼굴. 문학은, 정확하게 그런 의미에서만, 이미 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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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없이 유예되는 종말, 그것은 좋은 것일까? 나는 이 질문을,
영생을 얻은 작가들에게,
영원회귀의 계기가 되어버린 작가들에게,
새로운 맥락으로 끝없이 소환되는 작가들에게,
그 위대한 작가들에게,
그러나 이미 죽은 작가들에게,
농담처럼 던지고 싶은 것이다.

농담처럼,
그런 겨울밤이 있는 것이다.
결코 완성되지 않을 메모를 적어가는,
그런 겨울밤이.

[시인]

1968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고려대 노문학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4년 [현대문학] 시 부문 신인상에 당선되었고, 2005년 장편소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로 제3회 문학수첩작가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내 잠 속의 모래산], [정오의 희망곡]이 있고, 평론집으로 [혁명과 모더니즘], [나의 우울한 모던 보이 – 이장욱의 현대시 읽기]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