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칼럼] 오지심장파열술을 다시 떠올리며 | 윤이형 |

[6월의 칼럼] 오지심장파열술을 다시 떠올리며 | 윤이형 |

 yunihyung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팀 버튼의 「빅 피쉬」다.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비교적 단순명료하다. 픽션을 쓰는 인간으로서 한번쯤 품어볼 수 있는 최고의 판타지이기 때문이다. 초라한 현실로부터의 무책임하고 허무맹랑한 도피로 보이지만 결국 스스로 생명력을 얻어 바닷속을 유영하고, 그 커다란 몸으로 자신을 넘어 타인들의 삶까지,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의 균열까지도 감싸 안는 거대한 물고기, 이야기라는 생명체. 오직 이야기꾼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을 증명해낸 주인공 아버지의 장례식 장면을 보며 나는, 저것이야말로 허구로부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지복이자 면죄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판타지는 너무나 따사로운 위안이어서 모든 것이 힘든 날이면 끌어다 담요처럼 두르고 싶어진다.

   하지만 오늘은 내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영화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 빌」이 그것이다. 이 영화를 좋아하기 시작한 이유 역시 수많은 판타지 때문이었다. 어쩌면 쇼브라더스 영화 속의 ‘정통’ 무협배우들보다 우마 서먼이라는 할리우드 출신의, 결코 ‘정통’도 ‘진짜’도 될 수 없어 보이는 배우가 이소룡을 베끼듯 입고 나온 노란 트레이닝복이 내게 심정적으로 몇 배쯤 가까웠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을지 모른다. 그때가 소설이라는 것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였는데 나는 (전투 장면들을 제외하고) 이 영화 속의 거의 모든 것에 매료되었고 그것들을 글쓰기와 연관지었다. ‘수련’이라는 판타지. 그러니까 손가락을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 송판 격파에 몰두하고(=습작을 하고) 간신히 밥을 먹으려는데, 네 못난 사정이 어떠하든 밥은 젓가락으로 먹는 절도(=글쓰기의 품위)를 지키라며 지팡이로 사정없이 두드려 패는 준엄한 스승의 판타지. 관 속에 갇혀 생매장된 상황에서도 늘 해온 수련을 덤덤히 계속해서, 그러니까 맨손으로 관 뚜껑을 수백 수천 번 쳐서 혼자 힘으로 무덤을 뚫고 나오기. 흙투성이가 된 몸으로 바에 들어가 별일도 아니라는 표정으로 시원한 물 한 잔 청해 마시기. 그런 무림의 숨은 고수로 무럭무럭 자라나는 꿈. 현실이 전신마비로 병실에 누워 있는 형국일 때 탈출할 방법은 언제나 엄지발가락(=첫 문장)부터 고통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뿐이며 다른 쉬운 지름길은 없다는 것. 그리고 일생일대의 과업이라 할지라도 흔해빠진 학생용 유선 삼공노트에 펜으로(그리고 악필로) 적는 일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는 일상성의 환상에 이르기까지, 이 영화는 내게 온갖 판타지의 도가니였다. 꿈을 꿔도 괜찮았고 이불 속에서 혼자서 비장해지다 울먹여도 상관없었다. 멋지게 살고 싶다는 너의 꿈을 비웃지 않겠다고 브라이드는 말해주었다.

   사정이 이러했으므로, 당시에는 브라이드가 오렌 이시이의 머릿가죽을 슥 잘라내거나 죽음의 88인회를 청엽정에서 쓸어버리는 장면, 교복을 입고 철퇴를 휘두르는 고 고 유바리 같은 설정들이 그다지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런 폭력성에 대해 혐오나 열광을 내비칠 때도 별 감흥이 없었다. 내게 이 영화의 폭력은 이야기의 큰 줄기와 그다지 관련이 없는 것이었으므로.

   그런데 요즘 몇 년간 이 영화를 다시 생각할 때면 바로 그 구체적인 폭력의 장면들이 생생하게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브라이드는 인간이었다. 사람을 벨 때 그녀라고 갈등이 없었을까? 없었어, 영화는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없었을 리가 없다. 복수라는 대의를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날면서도 그녀의 마음 속에서는 미칠 듯한 정념이 매 순간 괴롭게 솟아올랐을 것이다. 그녀는 애초에 왜 결혼식날 ‘빌’에 의해 머리에 총을 맞고 식물인간이 되었는가? 다른 삶을 꿈꾸었기 때문이다. 살상병기로 살아가는 삶에 회의를 느끼고 그 악습들과 결별하고자 다른 남자와 식을 올리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 문제가 있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청산하지 않고 떠나려고 했다. 누구의 피도 흘리지 않고 몸만 스르르 빠져나와 자신을 리셋하고, 한 남자의 아내이자 한 아이의 엄마, 평범한 생활인의 삶으로 갈아타려고 했던 것이다. 조직은 당연히 그것을 용인하지 않았고, 삶의 바닥까지 떨어진 그녀는 뒤늦게 대가를 치르 분투한다. 자신도 배에 생명을 품어 본 몸이면서 네 살짜리 아이가 보는 앞에서 그 엄마(버니타 그린)를 죽이고, 나중에 복수하러 오면 달게 받겠다고 말하는 일. 분명히 내가 베어 없애야 하는 것이지만, 너는 가짜이니 패하라, 고 말하기 어려울 만큼 나와 닮아 있는 형상(엘 드라이버) 앞에서 흔들림을 누르고 부족한 자신을 믿는 일. 누가 이런 일들을 괴로움 없이 해낼 수 있을까? 그러니까 언제부턴가 이 영화의 전투 장면들은 내게 지극히 현실적인 것으로 느껴졌다. 왜 그렇게까지 많은 폭력이 필요했는가? 그만큼 많은 살상을 거쳐야만 브라이드가 최종보스 ‘빌’과 대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빌을 죽이는 일의 무게가 그 정도였기 때문이다. 동의도 복종도 하고 싶지 않은 상대의 수하에서 나와 새 삶을 도모하려는 인간이 마주해야 할 피와 아픔과 튀는 살점, 그리고 끔찍한 마음의 요동이 그 장면들에는 생생하게 살아 있었던 것이다.

   나 역시 빌이라는 이름을 안다. 내게 밥을 대주는 고마운 존재이자 내가 앓는 병의 이름, 빌. 내 머리에 총을 쏜 그를 나는 여전하고 묵묵하게 섬긴다. 이제 여름인데, 빌을 죽이지 못하여 팥빙수도 모밀국수도 맛이 없고 몸에도 감각이 없다. 위로와 걱정의 말들을 나누지만 당당하지 못하다는 느낌이 언제나 입 안에서 까끌거린다. 아름다움이라는 건 공부해서가 아니라 그냥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원래 삶에 있던 맛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그걸 알려면 놈을 떠나야 한다. 허나 어떻게? 빌이 준 삶은 습관이자 자연이 되었고, 빌은 참으로 부인하고 싶지만 내 아이의 아버지이기도 하며, 연민이 느껴질 만큼 늙었고, 그보다 나는 내가 이토록 경멸하는 빌을 또한 너무도 사랑하여 그의 영향력 안에서 매 순간 안락함을 느끼는데. 빌이라는 양가감정의 대상을 끊지 못하여 세계는 우리가 손수 만든 거대한 덫이, 우리의 삶은 거기 걸린 목숨이 되었다. 아무리 고달파도 떳떳해질 수가 없고 자존감이 있어야 할 자리엔 자조와 불안만 가득하다. 복수라는 건 어느 멋진 골짜기에 흐르는 물의 이름인지. 자의로 타의로 고개를 숙인 채 마비된 몸에 지상목표 생존은 이어지고, 비루한 공기 중에 산소가 부족해질 때면 다시 판타지가 마음을 사로잡는다. 오지심장파열술. 손가락으로 내가 너무도 사랑하는 나쁜 놈의 혈 다섯 군데를 헙헙헙헙헙, 차례로 짚어 심장을 터뜨린다. 네게 품은 사랑으로 나는 너를 끊다. 너무 쉬운가? 그러나 그 냉정하고 뜨거운 순간을 위해 브라이드는 살생의 끔찍함을 감수하면서 그토록 많은 남의 피를 흘리고 남의 창자를 끄집어내며 카르마를 축적했던 것이다.

   현실의 빌은 어쩌면 아침 산책길에 청아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보드라운 털을 지닌 어린 새의 형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상상한다. 오후 한 시의 커피와 짧은 독서처럼 이 살벌한 삶에서 내가 절대로 놓기 싫은 어떤 것이 바로 놈일지도 모른다. 데들리 바이퍼스란 그런 조직이니까. 혹은 그 일은 의외로 옷에서 보풀 떼어 버리듯 아주 간단할 수도 있다. 어려움을 키운 건 나만의 두려움일지도 모른다. 놈에게 작별인사를 할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 나는 놈을 정말로 떠나고 싶기는 한가? 혹시 나도 빌인가? 비겁은 이미 내 살이 되었고 모르겠다는 대답은 참으로 쉽고 그래서 나쁘다. 이 영화 속 버니타 그린의 네 살배기 딸처럼 아무런 잘못 없이 이 세계의 끔찍함에 연루된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나는 느낀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나 역시 브라이드처럼 온화함과 건강을 갈망하지만,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고 병들지 않은 세계로 옮겨갈 수는 없다.

   빌 없이 어떻게 살지? 뭘 먹고, 어디서 살래? 그런다고 네가 달라질 수 있을 것 같니. 그러나 그럼에도 빌을 죽여야 한다면, 그것이 내 최종 대답이라면, 그 과정에 흐를 피와 돌아올 복수, 실패의 자괴감과 배고픔과 나 자신의 악취를 담대하게 대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소설이라는 꿈에서 태어나 꿈 밖으로 나갈 힘을 지닌 폭력이 필요하다. 여기는 어쩌면 여전히 이불 속, 이것은 쓸데없이 비장해서 우스꽝스러운 비망록. 그러나 우습지도 않고 이것보다 확실한 쓸모도 있는 그 무엇을 아직 찾아내지 못하여 괴로운 마음으로 적는다. 이 글이 언젠가 나를 지극히 현실적인 방식으로 베어 부끄러워지게 하기를, 그때 내가 마비에서 벗어나 어떤 통증을 느낄 수 있기를 소망한다.

소설가. 1976년생. 2005년 중앙신인문학상에 당선되어 글을 쓰기 시작했고 소설집으로 『셋을 위한 왈츠』, 『큰 늑대 파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