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칼럼] 꽃, 신들의 위로인가 조롱인가 | 정영 |

[5월의 칼럼] 꽃, 신들의 위로인가 조롱인가 | 정영 |

 

jeongyoung   빅토르 위고의 소설 『웃는 남자』의 주인공 그윈 플렌은 평생 웃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남자다. 17세기 영국에선 어린 아이를 사고파는 콤프라치코스가 있었는데, 당시 귀족들 사이에선 기괴하게 생긴 몸종을 두는 것이 유행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콤프라치코스는 아이들을 납치해 더 이상 자라지 못 하도록 관절 마디를 끊거나 눈·코·입을 기형적으로 만드는 등 신체를 훼손하는 끔찍한 일을 자행했다. 그러한 귀족들의 유희를 위해 그윈 플렌은 어릴 때 유괴당해 입이 찢긴다. 유괴범들은 이 어린 소년에게 더 이상 울지 말라며 입을 웃는 모양으로 찢어버린다. 세상은 이 소년을 고통의 구렁텅이에 처박으면서 웃으라고 소리치는 것이다. 그런데 그와 나는 무엇이 다른가?
   나는 이 고통의 우주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육도윤회 속에서 몸을 바꾸며 셀 수 없는 생을 살아야 하는 게 진실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 영원한 굴레를 벗어나는 방법은 깨달음뿐이라는데, 내게 있어 그것은 만부당한 것이니. 나는 상상한다. 이 영겁의 시간 동안 생을 마치고 저승의 환생문 앞에 당도할 때마다 내가 얼마나 소스라치고 울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끝없는 여정을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참담함에 대하여. 다행인 것은, 전생도 저승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단 한 가지 사실 뿐이다.
   이 길고 지독한 여정 속에서 살기 위해 웃어야 한다, 웃어야만 한다. 그래서 우린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해보기로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차를 타고 더 멀리에 가보기를 원하며 더 많이 뛰고 더 많이 수영하기를 원하며 더 많은 책을 읽고 다 다양한 종류의 술을 마시길 원하며 낯선 밤길에서 더 다른 온도의 바람을 느끼길 원한다, 너와 나는. 그렇게 낯선 것들로 고통을 외면하거나 혹은 더 큰 절망으로 앞선 고통을 잊거나 환각제에 마취되지 않는 한 살아갈 길이 없다, 너와 나는. 입맛이 씁쓸할 땐 사탕을 까먹는 수밖에 어찌 할 도리가 없다, 너와 나는.

   그래서 우린 곧잘 마주앉아 그간 아무 일도 없었는지 얼굴을 살피고 안부를 묻는다. 위로가 필요하니까. 그래서 우린 문득 손을 잡고 걸어가다 잠시 마주보고 입술을 맞춘다. 위로가 필요하니까. 다행인 것은, 이 우주에 나 혼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뿐이다. 하지만 그게 정말 위로일까? 장 필립 뚜생의 소설 『욕조』에서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에드몽송 팔 위에 손을 얹었다. 나는 그녀에게 날 위로해달라고 부탁했다.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녀는 내가 무엇을 위로받고 싶으냐고 물었다. 날 위로해줘, 라 했다. 하지만 무엇에 대해서, 라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날 위로해줘, 라 했다. (중략) 그것은 허약하고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우리 조건에 의한 자연적 슬픔에 기인하며 그 조건은 너무도 비참하여 그것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우릴 위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죽음을 피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다음 생까지도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만약에 정말 그렇다면, 우린 사는 동안 얼마나 더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먹어야 하며 얼마나 더 많은 창문을 달아야 하며 얼마나 더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봐야 하는 것일까. 믿고 싶지 않지만 정말로 그러하다면, 우린 얼마나 더 울음을 참고 침묵해야 하는 것일까.
   다시 봄, 꽃이 피었다. 사람들이 집에서 기어 나와 꽃구경을 간다. 몇몇이 꽃놀이에 빠져 까르륵 웃는다. 꽃잎 휘날리면 그 아래로 달려가 또 까르륵 웃는다. 꽃 숲에서 사랑을 나누며 자지러지게 웃는다. 그리고 밤이 오면 입을 동그랗게 말고 운다. 누가 우리의 입을 이토록 찢긴 꽃잎처럼 찢어 놓았는가. 또 봄, 흐드러지게 꽃이 피었다. 신들의 위로인가 조롱인가?

1975년 서울에서 태어나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으며, 2000년 ‘문학동네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 『평일의 고해』, 『화류』와 산문집 『지구 반대편 당신』, 『누구도 아프지 말아라』 등을 펴냈고, 뮤지컬 작사가로도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