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칼럼] 제작과 직장 | 황인찬 |

[4월의 칼럼] 제작과 직장 | 황인찬 |

김종hwanginchan삼의 시 「제작」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렇다/ 非詩일지라도 나의 職場은 詩이다.”

또 김종삼의 시 「올페」는 이렇게 끝난다.

“나는 죽어서도/ 나의 직업은 시가 못된다./ 宇宙服처럼 月谷에 둥둥 떠 있다/ 귀환 時刻 未定.”

   뭐 이렇게 멋있는 말만 골라서 하시나 생각이 들다가도, 이렇게까지 비장하면 뭐하나 싶기도 하고, 김종삼도 이렇게 말하는 마당에 내가 시인이라고 말해도 되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어쨌든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고 있자면 시라는 것이 정말이지 아득하고 요원한 무엇인가보다 생각하게 된다.
   무슨 까닭인지 시인들은 시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이런 태도다. 제 작품이 과연 시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운운하는 것은 예사고, 사실 자기도 시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는 둥 겸손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을 소리도 한다. 하지만 시인이 모르면 누가 아나. 시인이 이런 말을 진심으로 하는 것은 직무유기라고 해야 할지, 자격미달이라고 해야 할지, 어쨌든 가능하면 그런 소리는 진심으로 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최소한 나는 그래야겠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누가 너는 시가 뭔지 아느냐, 그렇게 묻는다면 나도 대답이 궁색해지기는 할 것이다. 그래도 도둑이 제 발 저리듯 나의 궁색을 미리 자수할 필요도 없지 않겠는가. 사실 대답이 궁색해지는 것도 모르기 때문은 아닌 것이다. 다만 내가 알고 이해하는 이것을 ‘감히’ 시에 갖다 붙여도 될는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는 쪽이 맞겠다.
   아마 다른 시인들이 겸손을 떠는 것도 비슷한 까닭일 것이라 추측된다. 어쩐 이유인지 시인에게 시란 너무 크고 심원하고 아득한 무엇이기만 한 것이다. 그것은 사랑한다거나 좋아한다거나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시인들에게는 시에 대한 까닭 모를 숭배 경향이 있고, 그래서 때로 시인들은 구도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시에는 도달해야 할 이상적인 상이 있다는 식의 태도를 갖고들 있는 것이다. 시인들이 하나의 궁극적인 시의 상을 공유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지만, 시에 대해 갖는 종교적이며 신비주의적인 태도만은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다고 본다. 나는 시인들이 공유하는 이 거대하고 아득하고 위대하며 실체가 없는 이상적 시의 상을 ‘대문자 시’라고 부르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르며, 결코 그것에 도달할 수가 없고, 바로 그 점 때문에 스스로 위대해지는……
   어떤 시인들은 시의 본령이니 시의 정수니 하는 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사용하기도 한다. 나는 시의 본령도 정수도 싫다. 본령이니 정수니 하는 말들은 참 이상스러운 말들이기 때문이다. 현대예술에는 본령이 없고 정수가 없다. 대체 현대음악의 정수니 현대미술의 본령이니 하는 말을 어디서 들어본 적이나 있는가. 그런데 시의 정수니 시의 본령이니 하는 말은 또 왜 이리 익숙한가. 정수니 본령이니 하는 말이 익숙한 분야가 또 있다. 판소리니 국악이니 하는 것들이 그렇다.
   농담을 반쯤 섞어서, 시는 현대예술이라기보다는 전통예술에 더 가깝다는 것이 내 의견이다. 최소한 현대적이지는 않다. 시에는 현대적인 그 어떤 것도 함부로 끼워 넣을 수 없다. 시가 자유롭다는 말은 정말이지 거짓말이다. 당대적인 그 무엇도 시는 제대로 수용하지 못한다.(물론 당대적인 것이 곧 현대적인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조금이라도 이질적인 것이 들어오면 시는 순식간에 깨져버린다. 이를테면 수십 년 전 유행했던 포스트하고 모던한 그 모든 시도들은 어떤가. 광고의 기법을 가져온다거나, 패러디를 한다거나, 팝아트스러운 무엇인가를 흉내내본다거나 ‘실험’해본다거나 했던 그 모든 시도들은 오늘날의 민감한 시의 독자에게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촌스러워 보일 뿐이다. 이질적인 것이 뒤섞인 시는 아주 잠깐 유효한 것처럼 보이다가도 십년도 지나기 전에 그 수명이 다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시의 성격 자체가, 앞서 말한 정수니 본령이니 하는 것들과도 무관해보이지는 않는다. 이토록 약하고, 이토록 낡았고, 이토록 고고한 것이 시라는 생각이다. 물론 그래서 좋은 것이기도 하고. 그래서 숭배 받는 것이기도 할 터이다. 한편으로는 예술을 위한 예술, 아름다움을 위한 아름다움, 시를 위한 시, 종교와 신비의 영역에까지 가닿는 저 순수예술에 대한 신화야말로 시의 연약함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니까.
   때로는 시의 이 무능함이야말로 시의 유능함이라는 식의 의견도 있어왔다. 이런 말은 너무나 옳고, 너무나 맞는 말이라 듣고 있어도 아무런 감흥이 일어나지 않는다. 내게 있어서 저런 지당하신 말씀들은 너무 옳기에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는 말이기만 하다. 사실 저런 의견이 유효한 시기도 이미 지나버렸다는 생각도 든다. 무력하고 무능한 것을 통해 폭력에 대해 생각토록 하는 것도, 무력함과 폭력을 확실하게 분별할 수 있던 시절에나 가능한 것이니까. 이런 얘기는 지면이 부족하기도 하고, 적절하지도 않아서 여기에 길게 적지는 못하겠지만, 어쨌든 요 몇 년간은 온통 이러한 생각만 하고 살았다.
   왜 시인들은 시가 좋다고 누굴 좋아하고, 시가 별로라고 누굴 미워하기까지 할까. 또 왜 시인들은 모이면 그렇게 시 얘기를 하고, 누구 시가 좋으니 나쁘니 ‘시 오타쿠’처럼 말들을 할까, 왜 전 세계적으로 약화일변도인 시가 한국에서는 여전히 나름의 세를 유지하고 있을까. 왜 시는 첨예하게 미학적이면서 치열하게 정치적이기 어려운 것일까. 왜 시는 미학을 버리면 안 될까. 왜 시는 정치를 버리면 안 될까. 왜 시는 이토록 느릴까, 자유롭지 못할까. 여전히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나름의 생각들과 결론들을 세우고 계속 그것을 고쳐나가는 중이다. 시를 잘 쓸 생각은 않고 이렇게 시에 대한 잡스러운 생각들만 자꾸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시를 잘 쓴다는 것은 또 무엇일까.
   시인들이 시에 대해 너무 겸손 떨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려고 시작한 글이 쓰다 보니 여기까지 와버렸다. 여기까지 써놓고 보니, 이 글을 읽은 누군가가 짧디 짧은 생각이라고 혀를 차거나 호통을 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또 아무려면 어떤가. 짧은 생각이라면 생각이 길어질 때까지 자꾸 생각을 하면 되고, 생각을 하려면 자꾸 말을 하면서 생각을 굴려보는 수밖에 없다. 시인이라면 저는 시를 잘 몰라요, 말하기보다는 저는 시에 대해 이렇게 생각해요, 라고 말하는 쪽이 더 나은 것이다. 내 생각은 그렇다.

 

1988년 안양 출생, 2010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 2012년 시집 『구관조 씻기기』로 김수영문학상을 받았다.

 

  • hksong

    미친 것 같아요. 황인찬씨의 생각을 글로 표현해내는 능력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