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칼럼] 이상(李箱)의 넌센스 | 송종원 |

[3월의 칼럼] 이상(李箱)의 넌센스 | 송종원 |

songjw「이런詩」는 이상의 여타 시들과 다소 다르다. 이상이 감정노출이 거의 없이 시를 쓰고 혹 감정을 노출하더라도 그것을 사물처럼 대상화하여 극히 건조한 말투로 일관되게 기술했던 점으로 미루어보아, 이 시가 보여주는 감정의 질은 특이하지 않을 수 없다. 네 개의 단락으로 시가 진행되는 동안 시에 쓰인 감정은 상당히 역동적이면서 기이한 방식으로 변화한다. 이 시를 잘 따라 읽은 독자라면 한편으로 자신의 속물적 감정을 들킨 것 같아 우습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인간 심리의 냉정하고도 복잡한 움직임에 왠지 서늘한 기분이 들기도 할 것이다.

역사를하노라고 ᄯᅡᆼ을파다가 커다란돌을하나 ᄭᅳ집어내어놋코보니 도모지 어데서인가 본듯한생각이들게 모양이생겻는데 목도들이 그것을메고나가드니 어데다갓다버리고온모양이길내 ᄶᅩ차나가보니 危險하기짝이업는큰길가드라.
그날밤에 한소낙이하얏스니 必是그돌이깨ᄭᅳᆺ이씻겻슬터인데 그잇흔날가보니ᄭᅡ 變怪로다. 간데온데업드라. 엇던돌이와서 그돌을업어갓슬가 나는참이런悽량한생각에서 아래와가튼作文을 지엿도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든 그대여 내한平生에 참아 그대를 니즐수업소이다. 내차례에 못올사랑인줄은 알면서도 나혼자는 ᄭᅮ준히생각하리다. 자그러면 내내어엿부소서」
엇던돌이 내얼골을 물ᄭᅳ러미 쳐다보는것만갓하서 이런詩는 그만ᄶᅵ저버리고십드라.

– 이상, 「이런詩」 전문(《카톨닉靑年》, 1933.7, 53쪽)

우선 첫 단락. 공사현장에서 돌이 발견되었다. 공사를 감독하는 이 정도로 추정되는 시의 화자는 그 돌에 이상한 기운 내지 애틋한 기분을 느껴 목도들이 그 돌을 치워두는 곳을 따라간다. 그리고 그 돌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큰길가에 버려지는 것을 본다. 돌에게서 느꼈던 첫인상대로라면 위험한 곳에 놓인 그 돌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놓거나 따로 보관해 두는 것이 상식적일 터, 하지만 시에는 그런 행동의 기록이 전혀 없다. 위험에 처한 그 돌을 그 자리에 그냥 둔 채 시인은 단락을 바꿀 뿐이다. 마치 그 ‘돌’의 불행을 비는 것처럼.
두 번째 단락에 쓰인 말을 보면 첫 단락의 마지막 장면은 한층 더 이상하다. 돌을 발견한 다음날 아침, 화자는 바로 그 돌이 있던 현장을 다시 찾기 때문이다. 그만큼 자신에게 뭔가 특별한 ‘돌’이었던 것. 하지만 돌은 사라져 있고 화자는 처량한 심정에 빠진다. 그런데 정말 처량했을까. 위험에 처한 그 돌을 바라보고도 수수방관하던 앞 장면을 생각하면 혹 이루려던 바를 이룬 심정은 아니었을까. 이러한 의혹은 시가 진행되면 될수록 더 짙어진다. 그리고 돌이 돌을 업어간다는 표현이 쓰인 것을 보면, 저 돌은 단순히 돌만을 의미하지만은 않은 듯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이어지는 세 번째 단락을 보면,
‘작문’의 내용을 미루어보건대 저 돌은 공사현장에서 나온 실제 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화자의 기억 속 무언가를 대리한다. 그 돌은 연인이다. 차마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한 연인, 현재가 아닌 과거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연인, 그래도 평생 안온하길 기원하게 되는 그런 연인. ‘작문’의 내용은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극히 상식적인 진술에 가깝다. 그리고 이 상식적인 말들은 나머지 단락의 내용에 비해 꽤나 이질적이다. 글에 담긴 것과 글에 담기지 못한 것 사이의 어마어마한 격차, 차마 쓸 수 없는 내용으로서의 첫 번째, 두 번째, 그리고 네 번째 단락.
세 번째 단락의 말들이 사랑의 오래된 관습이었다면, 이상은 이 관습의 운행에 승차하지 않은 셈이다. 그는 떠나간 연인을 그리워하는 상식의 언어 대신에 오히려 떠난 이의 불행을 비는 방식으로 그가 사랑했던 시간을 지킨다. 돌처럼 단단하게 봉인시킨 그의 기억이 익숙한 연애의 문법을 해체하도록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마치 헤어진 연인의 불행을 비는 방식처럼 읽을 만한, 위험한 길에 놓인 ‘돌’을 그대로 버려두고 온 저 화자의 태도는 극히 세속적이면서도 문학적이었던 셈이다. 「이런詩」는 문학이 오랫동안 그래왔던 방식 그대로 세속이라는 바닥을 딛고 상식의 감각으로 쓰인 언어를 찢어버리는 순간에 태어났다.
대중문화의 표상을 연구하는 이들은 1930년대 일제강점기에 유행했던 한 문화적 경향을 ‘에로 그로 넌센스’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이는 국제적으로 동시성을 띄며 일어난 한 경향을 설명하는 용어로서, 성과 육체에 대한 관심과 자본주의의 저급한 성의 상품화와 밀접한 관련성을 지닌 표상을 이르는 말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앞의 설명은 ‘에로 그로’에 한정된 것이고, ‘넌센스’는 이와 약간 결을 달리한다. 넌센스는 에로틱한 육체나 기괴한 사건들을 바라보는 감각적 쾌락 뿐 아니라 그것에 거리는 둔 냉정한 태도와도 관련하기 때문이다. 33년 7월에 발표된 이상의 「이런詩」도 ‘에로 그로’보다는 그것을 넘어서려는 욕망에 닿은 ‘넌센스’의 감각이 엿보인다. 에로틱하고 그로테스크한 감각의 허구성까지도 까발릴 듯한 신랄한 감각이 거기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이상은 삶의 모든 감각에 넌센스의 감각을 덧붙여 사유했고, 그를 형식화했던 시인이다. 삶의 감각들에 덧붙여진 허술한 의미의 꼬리표를 떼어내고 그것의 의미 없음에 대해 골몰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언어가 불가피하게 의미의 자장을 형성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언어에 내속(內屬)하면서도 언어가 숨겨둔 무의미의 지점을 발굴하려는 시도는 언어에 특별히 예민한 문학의 작업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는 어쩌면 거의 문학의 본질에 가까운 행위는 아닐까. 언어에 몰개성적이고 무반성적으로 매개된 의미들을 언제든 잘라내 버릴 이 결단의 능력을 이상의 것으로 부르든 문학의 것으로 부르든 별다른 차이가 있을까. 이상의 넌센스, 문학의 의미 중 하나가 거기 살아 있다.

[평론가]

 

주: ‘에로 그로 넌센스’에 관한 설명은 『에로 그로 넌센스 -근대적 자극의 탄생』(소래 저, 살림, 2005)을 참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