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에서의 발제

- 영화가 될 수 없는 소설 쓰기

문학의 이름으로 세르반테스와 가르시아 로르카의 나라를 방문하게 된 것이 내겐 크나큰 기쁨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언젠가 단순한 여행자로 스페인의 몇몇 도시들을 떠돌아 다녀본 지 거의 15년 만에 다시 지구를 1/3 바퀴쯤 돌아 찾아온 멀고 낯선 이곳에서, 언어 소통도 제대로 되지 않는 내가 과연 ‘문학적 교류’라는 방문 목적을 얼마나 충족시킬 수 있을지, 막막한 심정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낯설게 만난 우리가 어떤 문학적 대화를 통해 공감을 나눌 수 있을까요? 궁리 끝에 나는, 오늘날 문학이 범세계적으로 처해 있는 문화적 상황에 대한 언급으로부터 이 대화의 실마리를 풀어보고자 합니다.
그 상황이란, 아직 그 실체가 분명치 않으면서도 빠르고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는 이른바 ‘세계화’라는 물결 속에서, 문학이 그 흐름에 가장 뒤처진 문화 양식으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문자에 의존하고 있는 문학은 이 세계의 다른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지 않는 한 세계화가 불가능한 문화 양식입니다. 그런데 번역이란 타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과 그 언어권에 대한 역사적, 사회적 이해까지 갖춰야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매우 어렵고 더딜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이든 빠른 속도와 넓은 파급 효과를 요구하는 ‘세계화’ 방식에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주지하다시피 정보 전달과 문화적 전파의 주도권이 신문, 잡지, 책과 같은 문자 매체를 대신해 시청각적 매스미디어로 넘어간 것은 이미 오래된 현실입니다. 나아가, 컴퓨터의 발명에서 비롯된 인터넷 시스템은 국경을 넘나드는 새로운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의 ‘가상 공간’은 물론 문자 매체와 시청각 매체를 동시에 포용하고 있지만, 그 무게 중심이 후자 쪽으로 기울어가는 경향 또한 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쩌면 언어의 경계를 넘기 위해 언어 이전의 육체적 감각에 무엇인가를 직접 전달하는 것이 문화적 세계화의 시발점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영상 예술의 꽃인 영화의 최근 흐름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대중문화의 지배적 위치를 차지한 영화의 파급력은, 거칠게 말해, 언어 해독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영상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내용과 실감의 전달이 가능하다는 데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갈수록, 영화는 이런 성향을 더 강화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특히 공상과학, 판타지, 액션 영화 같은 대중오락물에서 더욱 두드러진 현상이지만, 언어의 영역을 최소화하고 내용 자체는 지극히 단순한 이야기로 축소시키면서, 현란한 컴퓨터 그래픽과 3차원(3D) 화상 등의 테크놀러지를 동원해 어떻게 감각적 욕구를 충족시켜 줄 것인가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이런 영화의 대규모 공세 앞에서 과거의 영광을 상실한 문학, 특히 소설은 심한 좌절감과 열등의식에, 더 나아가 소설이 소멸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에 빠져 있습니다. 스페인에서의 사정은 잘 모르겠으나, 한국의 경우, 아예 영화에 백기를 들고 투항하는 경우도 급속히 늘어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소설이 영화로―그리고 텔레비전 드라마 등으로― 만들어지기 위한 시놉시스나 시나리오의 역할을 자처하며 영화에 종속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그나마 문학을 재빨리 세계화에 편승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 판단한 것일까요?…

길고 자세하게 논의를 전개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므로, 이제 곧바로 내 속내를 드러내도록 하겠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나는 영상 매체나 영화 장르를 근본적으로 폄하할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나는 그것들이 고유한 특성과 기능을 발휘하며 의미 있는 문화 양식과 예술로 발전해 나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리고 똑 같은 희망을 문학에 대해서도 품습니다. 지금은 비록 문학이 정체성의 혼란에 빠져있는 듯이 보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문학은 다시금 저 자신을 직시하고 되새겨봐야 할 시점에 놓여 있습니다. 이때, 앞서 언급한 영화용 소설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역설적인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간추리자면, 그런 소설들은 흔히 두 가지 특징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첫째, 그런 소설들은 대개 영화의 기초적 소재가 될 사건의 줄거리 즉 ‘일차적 이야기’의 선명한 전달을 지향하며, 그 이야기의 기본 요소들―상황, 성격, 갈등, 반전, 파국 등등―을 도식적으로 제시하는 데 집착합니다. 물론 이야기의 흥미를 위해 복선이 깔리지만 복선이 깔릴수록 결말은 더욱 뻔해야 합니다. 둘째, 서술 언어가 대개 영상화를 위한 기호로 작동하기 때문에, 문장이나 말 자체의 심미적 효과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문장은 한 행위의 단위나 한 감정의 단위에 대응하는 단문 위주로 씌어지고, 화면에 옮겨질 수 없는 접속사나 부사, 추상적이거나 은유적인 표현 등은 무시되기 일쑤입니다.
나는 여기서 소설의 퇴행을 목격합니다. 이야기 자체가 소설은 아닌데, 소설을 이야기 자체로 환원시키려 들기 때문입니다. 이야기에의 탐닉은 거의 인간의 원초적 본능에 가깝습니다. 태초부터 이야기는 끝없이 증식되어 왔고, 역사를 통해 다양한 문화적 양식들이 만들어지는 원자재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소설도 그 여러 문화 양식 중의 하나입니다. (영화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나 동시에 이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소설은 어떤 이야기를 새로운 차원으로 변형시켜 인간적 삶의 질을 바꿔주고 높여주려는 지극히 예술적인 것이지, 본능적인 날것 상태의 이야기를 그대로 실어 나르는 도구가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넘어서는 소설에서는 ‘글쓰기(écriture)’가 더욱 본질적인 부분을 이룹니다. 그게 곧, 오로지 언어에 의존하는 소설이 자기를 정립하는 방식이기 때문이지요. 이야기로부터 어떤 의미들을 조명하며 무엇을 어떻게 해체하고 재구축할 것인가, 그것을 어떤 질감을 가진 어떤 형태로 빚어내 새로운 성찰과 상상력을 열어줄 것인가 하는 문제는 결국 글쓰기에서 시작해 글쓰기로 끝납니다. 글의 음표와도 같은 말 하나하나의 어감이나 비유 효과, 그 말들이 얽히고 풀리며 리듬을 타고 선율로 이어져 음악적 울림을 만드는 문체, 마침내 화성법이나 대위법 같은 구조화를 통해 이야기 위의 허공에 떠올라 형성하는 미학적 언어 공간!
나는 그런 것이야말로 소설이고, 소설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작가는, 그러므로 먼저 말 자체를 자신의 육신처럼 살아가면서 말의 안팎을 응시하며 말을 통해 상상하고 성찰하는 존재입니다. 아마도 진정한 문학 독자 역시 같은 태도를 견지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문학의 현실적 효용성이 매우 적다는 사실을 감수하는 자들입니다. 사실 문학은 이미 너무 구식이며, 모두에서 말한 번역의 문제를 포함하여 여러 가지로 너무 느린 문화 양식입니다. 그러나 자본의 등에 실려 무턱대고 치달리는 이 시대의 다른 문화 양식들이 ‘신종 플루’ 같은 변종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 때, 그 항체를 추출할 수 있는 것은 오히려 문학일지 모릅니다. 그만큼 천천히, 깊이, 인간의 심연을 탐색해 왔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농담처럼 가볍게 이 발제를 한 마디로 정리하겠습니다. 저 극동의 한 모퉁이에서 사용 인구가 1억 명도 안 되는 소수 민족의 언어로 소설을 쓰는 한 작가로서, 내가 이 ‘세계화’ 시대에 맞서 채택한 바보 같은 (어쩌면 자멸적인) 전략은 이렇습니다―아무튼, 단연코, 영화로 만들어질 수 없는 소설을 써야만 하겠다!

* 이 발제문은, 한국-스페인 수교 60주년 기념 문학 교류 행사에서 발표된 것이다.
– 4월 23일 8시: 마드리드 예술센터
– 4월 25일 7시: 말라가대학 본부 강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