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 선생의 편지 한 통

김현 선생의 20주기를 맞아 목포문학관에 김현 전시실이 마련된다기에, 내가 간직하고 있던 유품들을 그리로 보내기 위해 정리하던 중 아주 오래된 편지 한 통을 발견했다. 무려 30여 년 전에 김현 선생이 내게 보낸 편지였다. 오랜 세월이 누렇게 착색된 하얀 ‘도화지’―A4 용지보다 가로 세로가 조금 작은 크기다― 위에 행갈이 한 번 없이 단숨에 씌어진 듯한 그 단정하고 아기자기한 흘림체(體) 친필 글씨를 들여다볼수록, 내 귓가에는 참으로 살가웠던 선생의 목소리가 어른어른 되살아나서, 당장이라도 전화를 드려 술 한 잔 사주십사 여쭙고 싶다는 욕망을 떨치기 힘들었다.
그런데, 김현 선생이 돌아가신 지 어연 20년이나 되었단 말인가… 김현 선생이 마흔여덟 살에 훌쩍 떠나버린 이 세상에 나는 쉰일곱 살이 되도록 여전히 뭉개고 앉아 있으니, 어느 틈에 지금의 내가 마지막 당신보다 아홉 해나 더 목숨을 부지한 셈이다. 그것도 참 한심하게! 김현 선생이 생전에 내뱉었던, “나는 너무 오래 살았다!”는 탄식이 절로 입 안에 담긴다. 아니, 비몽사몽간의 그 허송세월을 생각하면, 나는 그런 탄식의 자격조차 없다. 그 사이 대체 나는 무엇을 했던가. 그 오래된 편지-거울 속에 비친 내 꼬락서니가 너무 비루해 맨 정신으론 견딜 수가 없어서 또 혼자 술을 마신다…
그 편지에는 ‘77. 9. 8.’이라는 날짜가 적혀있다. 1977년은 내 나이가 스물넷, 선생의 나이가 서른다섯이던 해였다. 그때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휴학한 뒤, ‘방위’ 근무를 하고 있었다. 낯설고 험한 불광동 산42번지 달동네를 헤매는 힘겨움에(그 무허가 주택촌은 몇 년 후 강제 철거되었다), 나는 머리에 돌덩이를 심고 다녔을 것이다. 또 소설도 잘 쓸 수 없어(물론 아직 등단 전이었다), 가슴에 불덩이가 끓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어느 날 나는 내 고통스런 감정을 과장해 징징대는 편지를 김현 선생에게 보냈던 모양이다. 내가 무슨 말을 썼었는지 전혀 기억에 없으나, 선생의 편지는 필경, 거기 담긴 내용이나 어투로 보아, 그렇듯 초라하고 약해진 모습을 드러내는 나를 다잡아주려던 답장이라 여겨진다.
그 편지가 33년 만에 홀연히 내 앞에 나타난 것이 지금 내겐 무슨 암시와도 같다. 그 속에 담긴 어떤 전언들이 쉰일곱의 나이에 다시 소설쓰기 때문에 갈팡질팡하고 있는 나를 깊숙이 찌르고 들기 때문이다. 아, 김현 선생님은 마흔 여덟 살에 멈춰 계시면서도 여전히 내 스승이셨던 게다! 나는 스승의 말씀을 새기듯 그 편지를 한 자 한 자 옮겨보기로 한다.

77. 9. 8.

인성 군에게,

오늘 편지 받았소. 요즈음엔 바슐라르의 <몽상의 시학>을 번역하고 있는데, 거기에 그런 귀절이 있었소. 베르렌느의 “저 지붕 위로 하늘은 얼마나 파랗고 고요한가”라는 詩行을 인용한 뒤에, 감옥에서(!) 쓴 것에 감탄하고 나서, 바 先生 말씀이 혼자 있을 때는 누구나 감옥에 있지 않은가 라고. 그럴듯한 말 같았소. 인성이가 그리워하는 것에서 떠나 있다고 생각할 때, 누구나 사실은 그러리라고 생각한다면, 고독하다는 것도 그리 절망적인 것은 아니리라 생각하오. 중요한 것은 산다는 것, 그리고 산다는 것이 작가에게는 말과의 싸움이라는 것(그 말 속에는 말을 만들어낸 무수한 묘상이 숨어 있을 것이오)을 깨닫는 일이 아닌가 하오. 가짜로 살고 가짜로 싸우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아플 때 아프다고 소리 지르지 마시오. 그 순간에 아픔은 말이 되어, 아픔을 잃어버리게 될지 모르오. 삶 속에서 그 아픔의 등가물을 찾도록 애를 써보시오. 하하, 이러니까 수신교과서를 쓰는 것 같소. 소설은 좀 잘 써지오? 소설을 쓰시오. 그러면 조금은 아픔을 아픔으로 느낄 수가 있을 것이오. 갈수록 나는 개새끼가 되어가는 듯한 느낌이오. 삶이란 게 개새끼가 되어가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지나지 않는다면 그 삶이란 것도 참 한심할 것이오. <한국문학의 位相>을 끝낸 후에, 약간은 허탈감에 빠져 있었는데, 요즈음은 바 先生 번역을 시작했소. 일요일 쯤 심심하면 놀러오시오. 소주나 한 컵 합시다.

김 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