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받은 문학의 역설

저주받은 문학의 역설

movie_image― 세계화 시대의 ‘잠자는 미녀’

‘세계화’라는 어휘가 도처에서, 한편으로는 공공의 공간에서 무슨 사회운동의 구호인양 외쳐지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사적 공간에서 무슨 텔레비전 광고의 문구처럼 속삭여지고 있다. 대략 20여 년 전부터 대두되기 시작한 이 어휘는, 그러나 아직 그 분명한 개념이나 실체를 드러내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어쩌면 이와 관련한 모든 것이 여전히 논란 속에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세계화’는 기본적으로 전 지구를 정치·경제·문화의 차원에서 보다 긴밀한 하나의 공동체로 묶는 것을 지향하는 어떤 움직임일 것이다. 그런데 가령, 그 올바른 이상이 이 지구를 마치 한 국가와 같은 단일한 체제로 통합하는 데 있는지, 아니면 지역적 특수성과 다원적 체제를 인정하면서 그 조화로운 전체를 지향하는 데 있는지에 대한 토론을 시작한다면, 그건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런 류의 토론과는 별도로, 우리에게 ‘세계화’라는 것을 분명히 체감시키는 어떤 실제적 현상이 있기는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파악하기조차 힘들 정도의 빠른 속도로 최대한 넓게 멀리 퍼져나가고 있는 우리 삶의 환경 자체 말이다. 신속성과 확산력! 어쩌면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세계화는, 전달 내용이 아니라 전달 방식 자체의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아마도 그것은 세계를 연결하는 소통 매체의 혁신, 즉 디지털 네트워크의 등장과도 긴밀히 관련될 것이다. 잘 들여다보면, 그것을 통해 전파되고 있는 주도적 내용물―이념과 체제에 관한―이 없는 것은 아니다. 너무 당연한 듯싶어 놓치고 있었던 것들, 즉 정치적으로는 서구식 자유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서구식 자본주의가 바로 그 주도적 내용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세계화가 구 동구권의 붕괴 이후 촉발되었다는 점을 상기할 때, 익히 짐작할 수 있는 이 점이 크게 흥미롭지는 않다. 오히려 흥미를 끄는 것은 문화의 영역이다. 여기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대중문화의 범람인데, 이것이 ‘후-근대적(post-modern)’ 문화 형태의 문제와 뒤섞여 논의되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 영역의 이러한 양상은, 그 논의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 정치·경제 영역에서 서구식 ‘근대화’의 산물이자 목표인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명백히 부각되는 것과 대비되면서, 보다 진전된 문제를 제공해준다. 이를테면, 세계화를 근대화의 종착점으로 설정해야 하는가 후-근대화로 나가는 출구로 설정해야 하는가? 물론 내게는 그런 거창한 물음에 속 시원히 답할 역량이 없다. 나는 다만, 위와 같은 문제을 염두에 둔 한국의 한 작가로서, 관심의 초점을 문학에 맞추면서, 세계화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현실적 상황을 야기하고 있는지, 그 속에서 어떤 실존적 태도를 선택해야 할지, 고민해 보고자 한다.

나 자신의 초라한 현실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우선 나는, 내가 60억이 넘는 세계 인구 중에 그 사용 인구가 1억도 안 되는 소수 민족 혹은 집단의 언어로 소설을 쓰는 작가임을 확실히 상기시키고 싶다. 다시 말해, 나는 태생적으로 세계화에 한계를 지닌 작가다. 어떤 언어의 문학도 번역을 거치지 않고 세계화될 수는 없겠지만, 현 세계에서 중심부의 언어―영어·프랑스어·스페인어 등, 그리고 어쩌면 미래의 중국어까지―가 아닌 주변부의 언어를 사용하는 작가에겐 그것이 더욱 어렵다는 뜻이다. 주변부에서는 중심부의 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해 중심부의 언어를 익히는 많은 고급 인력이 배출되지만, 중심부에서 주변부를 수용하는 데 봉사하는 인력은 극히 미미한 탓이다.
게다가 번역은 그 작업에 소요되는 필수적 시간을 필요로 한다. 새삼스런 소리지만, 번역은 그 자체로 매우 지난한 일거리다. 특히 문학 작품의 경우엔 더욱 그렇다. 내 실제 경험을 예로 들자면, 보잘 것 없는 내 소설의 첫 번역은 프랑스어 번역이었는데, 프랑스인과 한국인으로 짝을 이룬 두 공역자가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랬기 때문에 더욱, 실제 작업은 지체되었다. 번역자들은 우선 작품 자체나 작품 내용상의 역사적·사회적·일상적 맥락들을 파악하고 지식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다(이 점은 특히 프랑스인 역자의 경우에 더 큰 과제였다). 실제 번역에 임해서는, 단어 하나하나의 뉘앙스나 문장 하나하나의 구조에, 나아가 문체의 변화나 전체적인 글의 리듬에까지 세심한 관심을 기울였다. 더불어 나와의 토론도 지속적으로 병행하다 보니 예상보다 훨씬 소요 시간이 늘어났고, 결국 번역 원고를 완성하는 데 3년여의 시간을 들였다. 이어 출판사를 찾고 출판 스케줄을 기다려 책이 나오기까지 별도로 1년쯤이 더 걸렸다.
사실, 주변부에서 중심부의 문학 작품을 번역하는 것도 만만한 일이 아니다. 다시 내 경험을 이아기하자면, 나는 ‘대산 세계문학 총서’의 기획을 입안하고 실행하는 작업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이 총서는 너무 난해하거나 상업성이 없어 도외시되어 왔던, 그러나 우리도 읽어야 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걸작들을―‘제3세계’의 작품들까지 포함하여― 최초로 번역 소개하기 위해 기획된 것이었다. 어떤 작품을 먼저 선택하고 누가 적임 번역자냐를 찾는 문제와는 별도로, 이 경우에도 한 작품을 번역 출판하는 데 평균 3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았다. 앞서와 똑같은 노력과 시간이 여기서도 필요했던 것이다. 그 목록에 로렌스 스턴의『트리스트럼 샌디』나 말라르메의『시집』같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갈 것이다.
양방향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러한 번역의 현실은 문학의 세계화를 상당히 어렵게 만든다. 지극히 일반론적인 차원에서도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 지칭되는 ‘세계화’란 것이 신속한 확산력을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어떤 특수한 풍조라면 더욱이나, 문학이 이 흐름을 따라잡기 힘들어지고 거기서 소외될 소지가 크다. 혹자는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원어판 책이 나오자마자 거의 동시에 세계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 출판되는 문학 작품들도 많지 않냐고. 그렇다, 얼핏 세계화의 흐름에 잘 편승한 듯이 보이는 그런 경우들이 있다. 아니,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기엔 껄끄러울 만큼, 이에 대한 관찰과 성찰이 필요할 만큼, 그런 경우들이 꽤 많아지고 있다. 어떻게 그것들은 그토록 빨리 번역될 수 있었을까? 무슨 요인이 그것들을 여러 나라에서 즉각 번역하도록 유인했을까? 이러한 유통은 어떤 과정을 통해 가능해졌을까?
우선 소박하게 대답해 보자. 그것들이 그렇게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첫째는 중층적 의미를 굳이 따져볼 필요도 없이 기계적으로 번역할 수 있는 쉬운 언어로 씌어졌고, 둘째는 세계시민들이 두루 부담 없이 즐길 만한 소재와 내용을 담았고, 셋째는 그것을 다국적 산업의 영업 방식으로 상품화했기 때문일 것이다(간결한 예로, 어른을 겨냥한 동화나 우화가 양산되는 것처럼). 이 대답 뒤에는, 그렇다면 그것들이 과연 ‘진정한(authentic)’ 문학에 속하는가 하는, 숨은 질문이 도사리고 있다. 그런 현상에 대해 내가 취해야 할 입장과 태도를 최종적으로 정리하여 밝힐 단계가 아직은 아닌 상태에서―나는 그것이 이 발제의 끝에 어느 정도 설득력 있게 드러나기를 바란다― 그냥 이 순간의 내 감정을 날것으로 드러내자면, 그것들은 대부분 문학 비슷한 것, 문학의 이름으로 포장된 것, 보통 말해져온 대중문학이 전-지구적인 산업의 형태를 띠는 것이라 말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말조심해야 한다. ‘진정한’ 같이 구시대적이고 모호한 어휘를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되고 대중문화를 함부로 폄하해서도 안되는 게 오늘의 문화적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제, 작가/독자, 엘리트/대중, 고급문화/대중문화, 창조/모방, 특수성/보편성 따위의 구분은 점차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기존의 가치 체계는 붕괴되고 있고, 대신 페터 지마(Peter V. Zima)가 말하는 일종의 ‘무차별성’ 위에서 자유분방한 문화 활동들이 펼쳐지고 있는데, 이는 후-근대적 문화를 논할 때 흔히 지적되는 사항들이기도 하다. 기억을 더듬건대, 후-근대적 문화의 문제는 20세기 후반기에 진행된 가열한 철학적, 문학적 논쟁들 끝에, 모더니즘과의 대비 속에서 약간은 저널리스틱하게 제기되었던 것 같다. 요컨대, 그것은 ‘작가의 죽음’(개인 주체의 부정), 독창성이나 창조성 개념의 폐기, ‘의미’라는 것 자체의 소멸 뒤에 등장하는 새로운 문화 형태를 예감하고 진단하는 데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이 지점에서 매우 아이러닉한 문제 하나가 제기된다. 모든 지적 가치 체계가 그토록 흔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자본주의라는 물적 가치 질서만은 더욱 확고해지고 있는가? 가만 생각해보면, 자본주의는 세계의 혼돈마저도 뒤에서 조정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닐까, 의혹이 든다. 아무튼 우리 문맥에서 이 문제가 치명적인 까닭은, 이 잡식성의 자본주의 시장 경제 질서가 어느 틈에 후-근대적 발상들마저 흡수하여 이용해먹고 있다는 데 있다. 상업주의적 입장에서 보자면, 번역부터가 성가시고 품이 많이 드는 난해한 고급문학 작품이나 이론들로는 많은 소비를 창출해 많은 이윤을 내기가 힘들 것이다. 차라리 그런 것들은 용도 폐기해버리는 게 낳으리라. 대신 ‘무차별성’을 이용하면 더 쉽게 더 많은 언어 상품을 생산할 수 있다. 그러니 문학도 누구나 다양한 요깃거리로 만들 수 있고 누구나 즐겨 소비할 수 있는 시스템 속에 편입시켜라!
이 시스템 속의 작가―라기 보다 제작자―는 세계의 근원적 혼돈이나 인간의 심연 같은 것엔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애당초 심오한 의미란 것은 허상으로 치부될 테니까, 그는 그저 기호화된 전형적 행위자 모델들에 원초적 감정을 포장해 적당한 갈등과 파국을 엮어내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그는 독창성이니 모방이니 하는 쓸데없는 자의식에 시달릴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는 법이니까, 기존하는 이야깃거리들을 코드화시키고―환상소설, 모험소설, 추리소설, 무협소설, 애정소설 따위― 그때그때 조립해 새로운 트렌드를 생산해내는 데 열중하면 된다. 또한 그는 문체 같은 것을 고심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언어란 이야기의 전달 도구에 불과하니까, 소비 독자를 유인하기 위한 감각적 표현의 연마를 제외하면―유일하게 필요한 문체는 ‘감각적 문체’이리라―, 최대한 단순한 문장으로 가독성을 높이는 것이 좋다.
이런 현상은 과거에도 얼마든지 있었지만, 요즘처럼 광범위하게 문학의 장(場)을 휩쓸며 이른바 본격문학을 완전히 밀어낼 듯한 기세로 계속 팽창력과 장악력을 높여가던 때는 결코 없었다. 한국에서도, 아무 회의 없이 이런 조류에 편승하는 작가들이 꽤 많아지고 있다. 심지어, 미리 외국에서도 잘 읽힐 주제나 소재들을 골라 외국어로 번역될 수 있는 문장으로만 쓰겠노라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작가들마저 있다. 그들에겐 문학의 장도 명백히 시장, 그것도 세계 시장인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풍조에 대한 비판적 관점에서, 파스칼 카자노바(Pascale Casanova) 같은 ‘세계문학(world literature)’ 연구자들은 ‘하나가 된 세계’를 전제하면서도 획일적인 시장 중심적 유통과 맞서는 다른 문학 유통의 문제틀을 수립하려 애썼던 것이리라. 그러나 그런 노력이 이론적으로는 문학의 ‘진정성’을 보존한다 하더라도, 세계화의 현실적 추세 속에서는 결국 문학을 고립시키는 것이 아닐까? 과연 문학은 어떤 미래를 품고 있는 것일까?

이제, 우리 사유를 한 단계 더 진전시켜야 할 때가 온 듯하다. 곰곰이 따져보면, 문학의 세계화가 어렵다는 이 문제는 단순히 번역과 유통의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언어 자체의 속성과 결부된 것일지 모르겠다는 사뭇 불길한 예감이 일어난다. 문학 밖으로 눈을 돌려 문화 전체의 구도를 조감해 볼 때, 문학은 이미 다른 문화 양식―미술·음악·영화 등등―에 비해 그 세계화가 상당히 뒤쳐져 있는 게 분명한데, 그 이유인즉 문학이 언어를 매개로 소통된다는 바로 그 존재 방식 때문이 아닌가 싶은 의혹이 드는 것이다. 특히 문학이 언어의 두 소통 양상 중에서 말(구어)도 아니고 문자(문어)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은 더욱 심각한 세계화의 걸림돌이 아닐까? 끝없이 세계화를 요구하는―거의 강요하는― 이 시점에 문학이 처해 있는 상황의 진실은 무엇일까?
대답을 찾기 위해서는 약간의 우회가 필요하다. 주지하다시피 인쇄술의 발명과 더불어 근대화의 기초가 되고 그 중심적 역할을 담당했던 문자 매체의 영광은 이미 과거의 역사가 되었다. 더불어, 정보 전달과 문화적 전파의 지배력이 텔레비전을 비롯한 시청각 매체로 넘어간 것은 이미 오래된 현실이다. 컴퓨터의 발명 이후, 정보를 무한히 저장하여 자유자재로 검색·활용할 수 있게 하면서 쌍방향의 소통까지 가능케 한 디지털 매체(인터넷)의 등장은 보다 혁신적인, 가히 혁명적인 변화로 일컬어지는데, 이 매체는 자신의 체계 안에 문자 매체적 기능과 시청각 매체적 기능을 모두 통합하고 있는 총체-매체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점은, 이 통합적 ‘가상 공간’에서의 주도권 역시 급격히 시청각 매체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튜브’의 영상들은 넘쳐나는데, ‘트위터’에서의 문자 사용은 짧을수록 좋은 것으로 치부 되고 그 언어들도 무슨 암호처럼 변해가고 있다.
요컨대, 세계 시민들의 일상생활과 문화 전체가 시청각적 체계로 재편되고 있다. 그리고 그 전환 과정에서 문자의 역할은 상당 부분 말의 역할로 대체되어 왔는데, 이제는 그 말의 몫마저 점차 축소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일찌감치 자본과 결탁하여 세계화에 앞장섰던 영화의 경우를 보자. 영화가 세계의 문화 시장을 선점할 수 있었던 것은, 간략히 말해, 언어 해독이 불가능한 상태에서도 영상만으로 어느 정도는 내용과 실감이 전달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최근엔, 주로 스펙터클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오락영화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아예 감탄사나 욕설 외의 대사는 최소화하려는 경향이 엿보이고 있다. 하기야 죽느냐 사느냐 총을 쏘아대며 전투를 벌이거나 두 남녀가 뜨거운 육체적 사랑을 나누는 데 무슨 말이 그리 필요하겠는가. 그러니까 그런 장면들만을 계속 확대해 이야기를 얽는다면 대사 한마디 없는 영화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영화와 함께 세계화 속도전의 쌍벽을 이루는 팝 음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뮤직 비디오가 등장하며 영상과 결합된 팝 음악은 댄스 음악을 필두로 세계를 누비고 있다. 거기서도 중요한 것은 음율과 춤이지 더 이상 가사가 아니다. 가사는 대개 잘 들리지도 않는다. 가사를 읊는 가수의 목소리가 그저 소리로서의 효과를 낼 뿐이다. 정신없이 보고 듣고 함께 몸을 흔드는 것으로 댄스 음악의 목적은 달성된다.
이처럼 영화나 팝 음악이 가급적 언어를 배제해 나가는 것은, 언어 기호들을 최대한 시청각적 기호들로 대체해 언어를 거치지 않고 인간의 육체적 감각과 직접 소통하려는 야심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육체적 감각에는 국경이 없으므로, 그보다 더 세계화에 유리한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 야심은 끝이 없어 보인다. 최근엔 디지털 기술에 의존해 삼차원(3D) 입체영상이 개발되고 있고, 언젠가는 인간의 오감 전체와 교류하며 허구를 현실과 똑같이 체험케 하려는 계획도 제시되어 있다. 아무튼, 이처럼 인간의 실(實)-감각을 겨냥하는 문화 형태를 통해 그 효과를 극대화하려 들면 들수록 언어가 거추장스런 장애물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해독하고 이해하고 종합해나가는 두뇌 활동이 필요한 언어는 감각의 즉각적 발동을 억제하기 때문이다. 말도 그렇지만 문자는 더욱이나 그렇다.
이쯤에서 문학의 문제로 돌아오겠다. 논의를 전개해 오는 사이에 이미 짐작했겠지만, 현재와 같은 문화적 상황을 전제로 하는 한, 문학의 세계화란 주제에 대한 나의 진단은 매우 비관적이다. 반복컨대, 이것은 지역 언어 사이를 매개하는 번역 작업 이전의 보다 근원적인 문제, 언어라는 의사소통 도구 자체와 결부된 문제이다. 바로 위에서 암시했듯 지금 행해지고 있는 문화적 세계화의 방법론이 온갖 ‘콘텐츠’의 시청각화를 극대화하는 방법론과 그대로 맞물려 있다면, 그래서 시청각적 문화 양식들이 더욱 다양하게 증식되고 증폭되며 세계의 문화 판을 점령해 나간다면, 당연히 문학의 자리는 계속 그 변두리로 밀려나며 좁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하철의 풍속도가 어떻게 변했는지 보라. 자리에 앉은 승객이 재빨리 꺼내 들여다보는 것은 종이 책이 아니라 ‘스마트 폰’이나 ‘아이 팟’의 화면이다. 그 속에 전자책(e-book)이 내장되어 있긴 하지만, 그것을 책으로 이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전자책도 결국은 그림책이나 만화책으로나 쓰이지 않을까?
그러고 보면, 문학의 세계화보다는 문학의 존립 여부를 먼저 걱정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알쏭달쏭하다. 사실, 문학의 종말을 예언하는 사람들이 벌써부터 꽤 있었다. 내 입장은 충분히 비관적이되 그토록 절망적이지는 않다는 것이지만, 내 비관의 정도를 언급해 두는 게 이 논의를 정리하는 데 유용할 것 같다. 나는 우선, 지금 진행되고 있는 세속적 세계화의 한 자리를 겨우 차지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베스트셀러 오락물 소설들마저도 머지않아 그 입지가 크게 좁아지리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런 것들은 흔히 영화와의 공모 관계 속에서 수요를 창출하고 있는데, 영화의 소재나 줄거리를 제공하는 통로가 다양해지고 책을 읽는 것이 일종의 교양이라는 고전적 허영마저 사라지고 나면―벌써 사라지고 있다―, 문화적 소비의 상호 상승작용을 일으켰던 양자 간의 관계는 종료될 것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로선 그게 어떻게 되든 아무 상관도 없다. 내 관심은 오로지, 이와 대비되는 본격문학의 미래에 있다.
기왕 대비를 시켰으니, 우리가 ‘진정한’이라는 수식어를 달았던 본격문학에 대해, 저 앞에서 언급했던 대중문학의 특성을 뒤집는 방식으로 몇 마디 토를 달아두고자 한다. 최대한 짧게 요약하자면, 그것은 세계와 인간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불러일으키면서, 이때까지 몰랐던 그 무엇인가를 이때까지 말해지지 않았던 어떤 어법으로 드러내 독자의 의식과 감성에 미학적 충격을 가하는 문학을 일컫는다. 그것은 명쾌한 쾌락을 조립하는 데 몰두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불투명한 고통을 응시하며 방황하고 모색하게 만든다. 동시에 그것은 상투성을 허물고 도식화된 언어를 쇄신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묻자. 이런 문학은 지금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 이 물음의 배면에는, 과연 누가 이런 문학을 읽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덧대어져 있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수업을 위해 읽는 것 말고, 누가 어디서 무엇을 위해 도스토예프스키나 제임스 조이스를 읽는가?
비유를 동원하자면, 오늘날의 본격문학은 마치 저주에 걸려 긴 잠에 빠진 ‘잠자는 숲속의 공주’―영어 제목으로는 ‘잠자는 미녀(Sleeping beauty)’인데, 독일어 제목은 ‘작은 가시장미(Dornroeschen)라고 한다―나 마찬가지가 된 듯하다. 일종의 알레고리로 풀자면 이렇다. 언어의 왕국에서 고대하던 공주가 문학의 이름으로 태어났지만, 미술 요정, 음악 요정 등, 여러 요정들이 모여든 축하연에 초대되지 않은 영화 요정의 저주를 받게 된다(그 요정까지 대접할 수 있는 황금 접시가 애당초 모자랐다는 것은 그 당시엔 그런 요정이 존재하는지조차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녀는 결국, 한창 꽃 피는 나이에 이르러, 그 요정이 노파로 변신하여 시청각적 실을 뽑아내고 있던 디지털 문명의 물레에 혹해 다가갔다가 그 바늘에 찔리고 만다; 그러자 언어의 성 전체가 그 순간 속에 멈춰 시간의 흐름마저 정지된 긴 잠 속으로 빠져버리는 것이다. 차후 100년 동안, 언어의 성은 가시덤불 숲에 쌓여 밖과 차단되고 그 속에 잠들어 있는 아름다운 문학 공주는 ‘가시장미’라는 은유적 이름의 전설로만 회자될 것이다. 마침내 백마를 탄 독자(讀者) 왕자가 찾아와 입을 맞출 때까지…

지금, 아름다운 공주 아니 문학은 잠들어 있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을 온 누리에 알리기는커녕 문학을 다시 깨우는 데만 100년의 긴 세월이 걸린다면, 이야말로 암담한 현실이 아닌가! 그저 담담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할지라도, 그토록 오래 기다리려면 그 기다림을 지탱해줄 어떤 힘, 이 암담하게 닫힌 현실이 자기모순을 드러내며 언젠가 스스로 길을 열 수밖에 없으리라는 선지적 믿음이 필요할 것이다. 이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 나는 위에서 차용한 알레고리를 좀 더 확장시키며 몇 가지 의문을 덧붙여 보려 한다. 죽음의 저주를 100년간의 잠으로 완화시켜준 마지막 요정은 어떤 요정일까? 성을 휘덮고 있는 가시덤불 숲의 가시들은 무엇이며, 미녀 공주의 애칭이 된 ‘가시장미’의 가시는 무엇일까? 성으로 들어가려던 이전의 다른 왕자들은 가시덤불에 걸려 죽었는데, 왜 마지막 왕자 앞에서는 가시덤불이 스스로 길을 내줬을까?
우리가 제시했던 문맥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이 가시덤불 숲은 시청각 문화가 확대되며 형성하는 숲이다(수종 이름을 알 수 없는 이 괴이한 덤불엔, 마지막 왕자가 나타나기 전까지 100년 동안 꽃이 피지 않는 채 가시만이 무성하다). 디지털 기술문명에 힘입어 왕성하게 번져나갈 이 가시덤불은 언어의 성을 완전히 휘덮고 차단할 지경에 이른다. 그런데 왜 하필 가시덤불인가? 내 관점에서는, 이 가시가 디지털 문명의 해악성을 표상하는 것으로 치환된다. 문학 공주도 한 순간 그 디지털 물레의 재미에 홀려 바늘에 찔렸었다. 가시덤불 숲은, 그 재미가 숨기고 있는 치명적 바늘들이 이제 무방비 상태로 널려 있음을 뜻하리라. 아니나 다를까, 이 가시덤불 속에서 여러 왕자들이 죽었다. 실제로, 시청각 문화와 디지털 문명의 부정적 측면을 경고하는 메시지들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오고 있음을 상기하기 바란다. 오늘의 시청각 문화는 육체적 감각만을 자극하고 육체적 반응만을 조장하는데, 육체는 반성을 모른다. 디지털 문명이 조성한 ‘가상 공간’에서는 익명의 군중들이 몰려다니며 무분별한 전체주의적 행태들을 자행하고 있는데, 이 군중심리에도 반성이란 없다. 그냥 퍼지고 찌른다.
그러나 문학이라는 ‘가시장미’의 가시는 전혀 다른 가시다(이 은유적 이름은, 살벌한 가시덤불을 바라보며 그 깊은 곳에는 가시를 달고도 아름답게 꽃피는 장미 같은 존재가 숨겨져 있으리라 상상한 결과일 것이다). 이 가시는 언어의 가시로서, 문학-장미의 아름다움을 감각적 욕망에 따라 마구 꺾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심미적 거리를 두고 감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성찰과 반성을 요구하는 비판적 기제라 할 수 있다. 언어는 의사소통의 도구인 동시에 사유의 도구이다. 인간은 오직 언어를 통해서만 사유한다. 그러므로 언어를 통해 예술이 되고자 한 문학에는 그런 비판적 기제가 근원적으로 설치되어 있는 셈인데, 그것이 이제 시청각 문화와 디지털 문명의 저 괴물스러운 결합체의 가시들에 대해서도 반성과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가시덤불의 가시도 문학적 가시와 같은 것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겠냐고. 문화·문명적 타자들과의 본질적이면서도 기능적인 ‘차이’를 숙고함으로써 자신의 위상과 존재 가치가 진정 무엇인지를 인식하고 구현해나가려 할 때, 이 신생의 문화·문명은 비로소 맹목적이고 폭력적인 지배 욕망에서 벗어나 인간적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 공주의 죽음을 100년간의 잠으로 완화시켜준 마지막 요정은, 문학의 짝패이기도 한 철학의 요정으로 보고 싶다. 이 요정은 필경 공주가 잠든 긴 세월 동안 가시덤불 숲을 떠돌며 뿌리와 줄기와 가지를 살피고, 그 의미와 한계를 따져볼 것이다. 그리고 그 숲과 대화하며 위험한 가시 대신 꽃을 피울 가능성을 모색해 나갈 것이다. 그런데 정녕 그 과정에 그렇게 긴 세월이 필요한 것인가? 아마도 그런가보다. 한 문화·문명이 정말로 의미 있는 틀을 갖추고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말이다. 그 사이엔 언제나, 여러 왕자들을 희생시켰던 그런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청각 문화와 디지털 문명이 올바른 자기 정체성을 찾고, 문학이 깨어나면 자신들에게도 유용한 자양분이 제공되며 서로 상보적인 관계로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을 깨우칠 때, 그것들은 문학으로 다가가려는 자를 환대하며 기꺼이 길을 터줄 것이다(마지막 왕자가 나타나자, “커다랗고 아름다운 꽃이 활짝 피어 있다가 저절로 길이 열”린다).
그러고 나면, 문학을 깨울 하나의 조건만이 남는다. 새로운 시대에 새롭게 태어난 독자의 등장! 이 미래의 독자가 진정으로 문학을 향유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죽음도 불사하는 그런 용기가 필요할지 모른다. 자신처럼 문학으로 다가가려다가 희생당한 전례를 알고 있거니와, 시청각 문화와 다지털 문명에 젖어 살아온 인간으로선 유폐되어 있던 이 오래된 문학이 오히려 낯설고(공주의 육체는 15세에 멈춰 있지만, 시간의 나이로 치면 115세다), 그래서 그것과 접촉하면 자신도 영영 잠 속에 빠져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이겨낼 힘은, 문학에 대해 바깥 세상에 떠돌고 있는 풍문만으로는 결코 충족되지 않는 문학의 실체와 온전히 마주하고 싶다는 열망, 문학의 절대적인 무엇인가를 찾아내고 싶다는 열망밖에 없을 것이다(마지막 왕자는 “그래도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내가 [직접]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공주를 보아야겠어요.”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모험이 감행되고, 마침내 문학에 입술을 맞추고, 문학과 함께 살아가기―읽어가기― 시작한다면? 그때, 전혀 다른 ‘행복’의 세상이 열리지 않을까? 바슐라르(Bachelard)가 “천국은 도서관이 아닐까”라고 말했던 것 같은…
그런데, ‘잠자는 숲속의 공주’ 이야기에는 묘한 암시가 하나 숨어 있다. 왕자가 성 안으로 들어가자 숲길이 다시 닫힌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정황상, 공주와 왕자가 그 성안에만 갇혀 살며 행복하다는 뜻은 아닌 것 같다. 아마도 그들에겐 자유롭게 길이 열리고 닫히고 할 것이다. 허나, 성을 둘러싼 숲이 사라지지 않는 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암시를 우리 문맥에는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 미래의 세계에서 문학이 다시 나름의 활기를 띠더라도, 그 활동은 이미 그보다 더 크게 둘러쳐져 있는 시청각 문화와 디지털 문명 안에 자리 잡은 작은 영역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들이 어쨌든 인류 문화사의 새로운 대세일 테니까 말이다. 근대사회가 태동한 이후 문학은 언어중심주의에 힘입어 거의 3세기에 걸쳐 문화적 절대왕권의 지위를 누려왔었다. 그러나 19세기부터 물질문명이 가속적으로 팽창하여 20세기에 들어서는 문화적 패러다임의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했는데, 그로 인해 전체적인 문화 구도가 재구성되면서, 문학의 위상도 크게 바뀌어가고 그 활동 영토 자체도 점점 더 좁아져가고 있는 것이다. 공주·왕자의 신분은 이제 허울일 뿐이다.
문학의 자존심에는 상처가 났겠으나, 이러한 상황은 언어의 자식으로 태어난 문학의 역사적 숙명에 가깝다. 과연 우리 시대의 작가들이 그 숙명을 회피하지 않고 끝끝내 문학을 문학으로 밀고나가, 그 상처를 넘어 “새로운 전율”―위고가 보들레르를 두고 한 말이다―을 창조해낼 수 있을까? 이에 관련해, 19세기 중반기의 프랑스 문학은 소중한 귀감이 될 수 있다. 맹목적으로 물질문명에 탐닉하고 돈의 논리만을 내세우는 부르주아적 속물성이 판치던 이 무렵에, 진정한 작가들이 처한 상황은 한 마디로 “저주받은 시인”의 그것이었다. 보들레르에겐 삶 자체가 유배였고, 플로베르는 그 “야비한 환경”으로부터의 자발적인 유배를 택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상황에서 새로운 시대 변화에 대응하여 ‘모더니즘’ 문학의 출발점으로 평가되는 혁신적인 작품들을 창조해냈다. 근대문학사를 전·후로 가르는 기점으로 간주될 만한 1857년에 동시에 출간된『악의 꽃』과『마담 보바리』를 당대 사회는 몹시도 학대했지만, 그 미래의 시간이 이 작품들을 위대한 정전으로 떠받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인 반전이 아닐 수 없다.

마지막 내 속내를 드러낼 때가 되었다. 솔직히, 여전히 문자 매체가 중심이었던 보들레르·플로베르 시대에 비해, 오늘의 문학적 상황은 더욱 가혹해 보인다. 현란한 대중문화로 도배된 이 시대의 새로운 매체에 문학이 들어설 자리는 거의 없다. 그 한 모퉁이에 자리를 마련해줄 듯이, 자본이 유혹하고 있기는 하다. 많이 읽지도 않는 문학은 해서 뭐하냐며, 그냥 대중문화의 일원이 되어 함께 놀자며. 그러나 문학은 이 옵션을 거부하고 도래할 독자를 위해 씌어지기도 하는 법이다. 그런 글쓰기는 현실로부터의 유배를 전제로 하지만, 그 유배는 새롭게 태어날 독자를 위해 저 자신부터 거듭나는 과정일 수 있다. 내 전망에 의하면, 그것은 문학의 문화적 위상이 바뀌고 있는 것에 대응해―현실적으로는 자본에 맞서―, 일종의 ‘인디(indie)’ 문화로 변신해 나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대중문화의 원류인 영화와 팝 음악의 영역에서 ‘인디’ 활동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어쩔 수 없이 소수가 된 집단과 함께 하는 ‘작은’ 문화, 작지만 다른 무엇보다 ‘깊은’ 문화! 그것이 되기 위해 낡은 껍질을 벗으려면 아주 긴 잠을 거쳐야만 할지 모른다. 그러나 잊지 말자. 우리는 이 시대의 문학이 처한 유배 형태를 잠 속에 갇힌 상태로 비유했는데, 잠이 죽음과 결정적으로 다른 면은 잠 속에 꿈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학은 지금도 잠 속의 꿈 속에서 계속 암중모색 중이리라. 미래의 독자들이 ‘행복한 소수(happy few)’가 될 수 있도록,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지에 대해…
한마디만 덧붙이자면, 문학의 참다운 세계화는 그 다음의 더 먼 미래의 이야기이다.

* 이 글은 ‘세계화 시대의 삶과 글쓰기’란 주제 하에 대산문화재단이 주최한 제3회 서울국제문학포럼에서, 2011년 5월 24일 발표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