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칼럼] 여름 | 박지혜 |

[7월의 칼럼] 여름 | 박지혜 |

 parkjihye 월요일 아침 10시 17분. 비가 내리다 말다 한다. 나는 매일 잠들기 전과 아침에 일어났을 때의 시간을 확인한다. 부엌으로 걸어가 동그란 시계 안의 숫자를 쳐다본다. 동그라미 안의 시침과 분침이 서 있는 숫자를 발음하고, 물을 끓이고, 창밖의 날씨를 보고, 책상으로 가서 커피를 마시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건 나만의 작은 의식 같은 것이다. 아무도 보지 않는 일을 혼자 조용히 하고 있는 느낌으로 잠시 이것들을 한다. 지금 이것은 가장 중요한 일이 된다. 이게 흐트러지는 날은 종일 엉망이 된다. 기상 직후 책상 앞에서 멍하게 있는 건 나에게 무척 중요한 일이다. 그건 내가 숫자의 생김새를 좋아하는 것만큼 이유가 없다. 산수를 못하지만 숫자의 모양이 좋아서 숫자를 좋아하는 것만큼 충분한 이유가 있다. 숫자의 모양이 맘에 들어서 시간을 자주 본다. 시간대마다 달라지는 날씨의 색감이 좋아서 시간을 자주 본다. 날씨를 표현하는 단어와 문장이 좋아서 온갖 날씨를 좋아한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사람들이 어떤 불편함을 느끼는지 알기도 하고 알지 못하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이런 방식에 끌린다. 그러니까 무작정. 그러니까 왠지 모르게. 그러니까 그냥. 이런 게 나랑 어울린다. 물론 너와 나의 그냥은 다르지만 나는 그냥을 자주 말하고 싶다. 이 나이에 이런 순진한 생각이 어쩐 일이냐고 하겠지만 그게 나랑 어울린다. 

   월요일 오후 5시 32분. 비가 내리다 멈췄다. <Cloudy day>를 틀었다. 생각이 지워지길 기다린다. 나는 시를 쓸 때 떠오르는 생각 없이 시작한다. 서서히 혹은 갑자기 생각이 사라진다고 느끼면서, 느낌이 어떤 덩어리가 된다고 느끼면서, 첫 문장을 시작한다. 아마 그런 것 같다. 커피를 마신다. 탄자니아 20g. 나는 지금 시를 생각하다 시를 쓰진 못하고, 무엇 무엇을 한다고 미룬 일들을 적어본다. 가령 이런 것. 비올라 수리, 작은 유리컵과 술 사오기, 로즈제라늄 분갈이, 커튼 빨래, 운동화 빨기, 여름이불 빨기, 여름옷 정리, 인형 이름 짓기, 고래와 오리 그림 그리기, 린넨으로 식탁매트 만들기, 수놓기, 계피막대 창문에 걸기, 식물도감 읽기, 독서목록 적기, 내 사전 만들기, 책장 정리, 컴퓨터 즐겨찾기 정리, 사진 정리, 그릇 정리, 냉장고 정리, 방충망 구멍 막기, 선풍기 씻기, 수건 삶기, 단추 달기, 통장 재발급, 병원 예약, 몇몇 친구에게 연락하기, 너와 바보산보 하기, 그것과 그것에 관심 갖기 등등. 이 중에는 좋아하는 일도 있고 싫어하는 일도 있다. 너무 더워지기 전에 미룬 일들을 할 것이다. 그런데 아마 몇 개만 하고 대부분 하지 않을 게 분명하다. 나는 소소한 계획들을 수첩에 적는 것을 좋아할 뿐이다. 이건 날씨와 시간을 확인하는 습관처럼 오래된 일이다. 일기를 쓰는 것처럼 은밀하고 즐거운 놀이였다. 이제는 예전처럼 심하진 않지만 아직도 뭔가 메모를 하지 않으면 불안하다. 메모는 거의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다. 시를 위해 메모를 하진 않는다. 그러나 메모를 보다가 의도하지 않은 채, 문득, 자리를 옮겨, 시를 쓸 때도 있다. 

   수첩의 아무 데를 펼친다. 턴테이블이라고 적혀 있다. 턴테이블 위에서 판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는 우리의 판을 다시 듣고 싶어졌다. 술 마실 때 들으면 좋겠지. 비올 때 빗소리 듣다가 들으면 좋겠지. 눈올 때 눈을 보다가 듣자. 그럼 턴테이블을 사야 해. 돈이 없어. 그래도 사자. 잠시 고민한다. 그래 사자. 그저 딱 보고 대략 맘에 드는 것, 예쁜 것을 사자. 어차피 소리는 욕심낼 수 없다.  

   월요일 밤 10시 49분. 비는 오지 않는다. 바람이 분다. Couperin의 <Dans le goût théâtral>을 듣는다. 오보에 소리 저편으로 전화벨이 울린다. 받지 않는다. 전화를 받지 않는 대신 빌리에 드 릴아당의 몇 문장을 읽는다. 오늘 서울은 7시 57분에 해가 졌고 시민박명은 8시 28분이었다고 한다. 시민박명 항해박명 천문박명은 40분 정도 시간차가 난다. 나는 보통 어두워지기 전에 강으로 간다. 강에서 지는 해 보기를 좋아한다. 해지는 하늘 보기를 좋아한다. 아무런 생각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며 느낌만 거대해지는 것. 나는 오랫동안 이런 상태의 느낌들에 집중했던 것 같다. 내가 시적 상태라고 부르는 상태. 시적 상태에서 바라보는 풍경. 어떤 희미하고 분명한. 오직 유일한 풍경 같은. 무리해서 말해보면, 언제나 예민한 소년 소녀처럼 말했고, 아이나 노인처럼 느꼈고, 조금도 더 자라지 않았고, 이미 예전에 다 자라서 더 자라지 못했고, 그때도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을 알았고, 그때 몰랐던 것들을 지금도 모른다.   

   화요일 0시 21분. 오늘의 습기처럼 우울한 목소리를 듣는다. 나는 h가 선물한 커피 잔에 커피를 따른다. 케냐 20g. 코발트블루의 그물 같은 게 그려진 러시아 도자기인데, 따뜻한 그것을 손에 쥐면 기분이 조금 나아지곤 한다. 난 h에게 감청빛 구두를 선물하고 싶다. 감청 회청 다청 코발트블루 프러시안블루 인디고블루 인디언핑크 진달래색 가지색 보라 연두 초록 노랑 파랑 빨강 쪽빛. 모두 예쁜 이름이다. 그러고 보니 색깔 이름은 다 예쁘구나. 식물들의 이름이 예쁜 것처럼. 언젠가 너무 흐뭇한 분위기에 공포를 알려주고 싶다는 너의 유머에 나는 크게 크게 웃었지. 나는 슬퍼도, 잠을 자지 못해도, 밥을 잘 먹지 못해도, 기가 막힌 얘기를 들어도, 잊을 수 없는 일들이 줄줄이 걸어가도, 이상하게 잘 웃는다. 다행이라고 너는 말했다. 나도 너처럼 너무 흐뭇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예쁘고 흐뭇한 걸 자주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화요일 0시 37분. 마루에 불을 켜지 않고 식물을 보다가 식물의 예쁜 이름들을 낮게 발음하다가 울컥 목이 멘다. 이게 다 이상해진 장마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토바이 소리가 들린다. 기타 소리가 들린다. 웅성거림이 들린다. 아닐지도 모른다. 어떤 소리가 커지고, 어떤 소리가 작아지고, 슬퍼지고, 행복해지고, 불행한 숲으로 들어가고, 끝없이 끝없이 불가능한 사랑을 말하고, 새벽 4시경이 되면 투두두두둑 쏟아지는 빗소리를 기대하며 잠을 잘 것이다. 안녕, 안녕. 잠으로 들어가 이상한 잠으로 들어가 검은머리방울새랑 붉은머리오목눈이랑 자귀나무 분홍이랑 오리나무숲에서 만나자. 우리 집에는 파인애플 세이지가 잘 자라고 있다.

 

시인. 1970년 서울에서 출생했고, 2010년 계간 『시와 반시』를 통해 등단했다. 금년에 첫 시집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