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칼럼] 잘린 시야 | 백민석 |

[1월의 칼럼] 잘린 시야 | 백민석 |

baekminsuk —우리의 내면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에는 흥미로운 캐릭터가 하나 나온다. 등장인물의 창조에 늘 신경을 써야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너무 독특해서 한번 보면 결코 잊지 못할 그런 캐릭터다. 제목에도 쓰인 바틀비라는 인물인데, 움직임이 매우 제한적이다.
   허먼 멜빌은 바틀비를 사무실 칸막이 안의 자기 책상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는 인물로 그린다. 업무 시간에는 꼼짝 않고 책상에 앉아 서류를 옮겨 적는 일에 몰두하고 점심은 사동을 시켜 사온 생강과자로 때운다. 퇴근도 않고 휴일이건 평일이건 사무실에서 숙식을 해결한다. 그의 고용주인 변호사가 부를 때에야 겨우 자기 책상을 떠나 변호사 책상 앞까지 가 선다. 자기 책상과 변호사의 책상 사이, 그 몇 미터 되지 않는 거리가 그의 행동반경의 전부인 것이다. 작가가 의도한 것이겠지만 바틀비는 독자에게 화장실 가는 모습조차 보여주지 않는다.
   화자인 변호사가 묘사하는 사무실의 정경은 이렇다. “풍경화가들이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결여되어 있어서 특히 단조롭다”고 부를 만한 곳으로, 높다란 주변 건물들에 가려 볕도 잘 들지 않는 건물의 2층이다. 그중에서도 바틀비가 앉은 책상은 “빛만 약간 새어 들어올 뿐”인, 창문에서 맞은편 건물의 벽까지 채 1미터도 되지 않는 후미지고 어두침침한 곳이다. 창문을 열어도 보이는 건 추레한 벽뿐이다. 그는 그런 칸막이 책상에서 쉬는 시간에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는 건 벽뿐인 창문을 마주하고 우두커니 서 있다. 화자는 바틀비를 “칙칙한 벽을 보고 공상을 하며 서 있”는 인물로 묘사한다.
   독자가 「필경사 바틀비」에서 보게 되는 건 비극적으로 제한된 바틀비의 시야다. 막 메트로폴리스의 특성을 갖추기 시작한 19세기 뉴욕시의 중심부에서, 다른 건물들에 사방이 둘러싸인 좁은 사무실의 칸막이 쳐진 공간에서, 이렇듯 겹겹이 벽으로 둘러쳐진 공간에서 그에게 주어진 시야는, 1)건너편 건물의 벽까지 겨우 1미터가 채 안 되거나, 2)고용주인 변호사 책상까지의 몇 미터가 전부이다. 1)의 시야는 그가 휴식을 보내는 여가시간에 그에게 주어지는 시야이고, 2)의 시야는 그가 생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에 그에게 주어지는 시야이다.
   그렇게 바틀비의 시야는 이런저런 것들에 의해, 최종적으로는 허먼 멜빌의 펜 끝에 의해서겠지만, 뭉텅 잘려나가 있다. 그는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나 되는 것처럼 자기 시야의 절단면 바깥으로 단 한 발도 내디디려 하지 않는다. 그럴 시도도 않고 나갈 기회가 주어졌을 때에도 거부하고 만다. 그의 잘린 시야는 그대로 그의 세계를 구성하고 제한한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여가와 노동, 두 가지 시야 안에서 꼭 그 시야가 허용하는 범위만큼의 행동반경을 갖는다. 잘린 시야는 그의 판단력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그는 고용주의 지시에 대해 ‘하는 편’과 ‘안 하는 편’, 두 가지 선택지의 좁은 사이만을 오간다.

   「필경사 바틀비」를 대도시 삶에 대한 우화 정도로 읽는다면 바틀비를 소설 속에나 있는 비현실적인 인물이라 생각하기 쉽다. 두어 가지 특성만을 부풀려 인물을 형상화하는 멜빌의 캐리커처 식 창작방법 탓에 더 그러기 쉽다.
   멜라니 클라인 같은 정신분석학자에 의하면 “멀리 내다본다는 것은 자기 성찰을 의미한다1)”. 바틀비가 칸막이 쳐진 자기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창문 밖을 내다보는 그 행위 말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성찰의 제스처만 가능할 뿐, 진짜 성찰을 가능하게 하는 시야는 맞은편 건물의 벽에 의해 1미터 앞에서 잘려있다.
   자기 성찰은 자신의 내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바틀비는 환경에 의해 성찰이 금지당한 자이면서, 떠날 기회를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성찰을 금지한 자이기도 하다. 성찰을 통해 지금 자기 내면의 작은 소용돌이를 발견한다면 운이 좋은 것이다. 그 소용돌이가 언젠가 핏빛의 뒤집힌 아가리가 되어 존재 전체를 삼켜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난번 『문학과사회』(2013년 겨울호) 좌담에서 나는 ‘내면의 극단화, 극단화된 내면’에 대해 말했다. 성찰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아니 스스로 금지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내면이 극단화되어 스스로를 삼켜버릴 지경에 이르기 전에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발견해 무언가 조치를 취하게 될 것이다.
   십 년 전만해도 ‘내면’이라고 하면 어쩐지 현실의 문제를 회피하기 위한 순수의 성역 같은 뉘앙스로 들렸다. 솔직히 그랬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지금은, 한국사회의 어떤 곳보다도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내면이 가장 격렬하다. 비명과 곡소리와 울부짖음과 으르렁거림과 칼날이 살갗을 찢는 소리와 목을 매고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소리로 가득하다. 이는 단순하게 현실 사회의 모순들을 해소한다고 해서 절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세상은 그렇게 단선적으로, 일방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지난 2000년대에,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인 우리의 내면에서 무슨 일인가 벌어졌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 무슨 일인지는 정확히 말하기 어렵다. 부정적이되 얼마나 부정적인지도 말하기 어렵다. 완결되지 않은, 현재진행형인 탓이다. 모르겠다. 나이를 먹을수록 느는 것은 뱃살과 모르겠다는 말뿐이다. 모르겠지만 나는 이에 대해 계속 쓸 것이다. ‘멀리 내다보면서 들여다보는 행위’, 즉 성찰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1) 멜라니 클라인, 『아동정신분석』, 이만우 옮김, 새물결 출판사, 2011, 446쪽

소설가. 1971년 서울생. 서울예술대학 문창과 졸업. 1995년 계간 『문학과사회』로 등단. 소설집 『16믿거나말거나박물지』, 『자원의 심부름꾼 소년』등과 장편소설 『헤이, 우리 소풍 간다』, 『목화밭 엽기전』 등을 펴냈으며, 금년에 10년만의 새 소설집 『혀끝의 남자』이 나왔다.

  • 바틀비

    바틀비도 반갑고 백민석 작가님도 반갑습니다.
    지난 2000년대에 무슨 일인가 벌어졌다는 말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물론 그러한 인식이 모든 시대와 모든 세대에게 공통적일 수 있겠습니다만, 그렇다해도 저 역시 지난 2000년대와 지금 우리에게 벌어지는 현실이 더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그것이 ‘단순하게 현실 사회의 모순을 해소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건 분명하지만, 그러나 동시에 ‘내면을 성찰’한다 해서 뭐가 어떻게 될까, 저로서는 잘 모르겠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바틀비가 채 1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칙칙한 벽을 바라봤던 행위가, 고작 ‘성찰의 제스처’에 지나지 않다 하더라도, 어쩌면 바로 그랬기 때문에 – 그 행위가 더 적절하고 힘이 세지는 게 아닐까 생각도 듭니다. 멀리있는 풍경이나 대상에 마음 뺏기지 않고, 그 바라봄(의 제스처)에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거는 것. 그 빈 행위에 붙박히는 것.

    뭔지 모르겠지만 자꾸 마음이 들끓는 것 같은 요즘입니다.

    • 백민석

      저도 반갑습니다.
      답글을 달아야 하나 망설이다가 이렇게 짧게 제 의견을 남깁니다.
      제가 이 글을 썼던 것은 지금처럼, 이에 대해 다른 분들이 함께 생각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에서였습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 마음의 문제를 상당히 진지하게 다뤄야 할 때가 온 듯합니다. ‘성찰’처럼 마음의 문제를 다룰 수 있는 개념들을 제가 몇 가지 더 준비하고 있습니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써볼 계획입니다.
      2000년대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저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어찌 아는 것만을 쓰겠습니까.
      저는 그저 좀 더 많은 분들이 이제껏 없었던, 그래서 뭐라 딱히 정의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주셨으면 하고 바랄 뿐입니다.
      백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