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칼럼] 문학적 영감에 대응하는 방식 | 강영숙 |

[12월의 칼럼] 문학적 영감에 대응하는 방식 | 강영숙 |

kangyoungsuk목욕탕에서 한때 아주 유명했던 운동선수 B를 만났다. 커다란 회색 방주(方柱) 두 개가 서 있는 것 같았다. 만났다기보다는 몸을 닦고 있는 그녀 앞의 은색 거울로 그녀의 얼굴을 훔쳐본 게 전부였다. 맞는구나! 그녀는 대단한 선수였다. 지금도 그녀의 뒷모습은 로댕의 토르소처럼 강건해 보였다. 그녀는 국민에게 기쁨과 자긍심이라는 선물을 주었다. 남산 줄기에 있는 어느 여자중학교의 학생이던 나는 같은 재단에 속한 여자고등학교 건물에 올라가길 좋아했다. 그 건물은 매점과 연결되어 있었다. 크림빵을 먹으며 어두운 복도를 지나 학생들 사진을 찍는 학교 전속 사진실 앞에 가 섰다. 운이 좋게 사진실 문이 열려 있으면 빈 빵 봉지를 창문 너머로 던지고 어두운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지금은 예순을 향해 달려가는, 그 학교 출신의 유명 탤런트 언니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코트에서 종횡무진 하는 그 학교 운동부 출신인 B의 사진도 붙어 있었다. 어쨌든 B는 국보급 선수였고 나의 우상이었다. 목욕탕에 있는 내내 가슴이 뛰고 또 뛰었다.
   콜라를 마시며 인터넷을 뒤진다. 미장원을 하는 B, 대학교수를 하는 B, 목사를 하는 B 등 여러 일을 하는 다 다르게 생긴 B들이 검색된다. 왕년의 유명 운동선수들이 출연해 생활이 어렵다고 말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동영상도 검색된다. 그녀도 좀 어려웠던 모양이다. <분노의 주먹>이란 영화가 생각난다. 전직 복서의 퇴락. 마이크 타이슨은 어떤가. 하지만 B는 복서는 아니잖아. 그러고 보니 문득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언뜻 동네 초등학교 앞을 지나가다가 자신의 이름을 적은 어린이교실 모집 피켓을 들고 서 있는 그녀를 본 것도 같았다. 사실은 그녀였는지 다른 사람이었는지 정확하지 않다. 그녀일 리가 없다고, 나는 아마 가던 길을 내쳐 갔을 것이다. 아니면 자전거를 타고 가느라 그냥 휙 지나갔거나. 사실 나는 그녀의 인생에 관심이 없다. 그 정도의 어려움은 누구에게나 있으니까. 사기를 당할 수는 있지만, 생활고로 막노동에 나설 정도는 아니겠지. 돈은 있을 것이다. 한때 잘나갔으니까. 가족도 있을 것이고. 어쩌면 예쁜 고양이나 애완견도 있을 것이다. 인터넷 기사는 짧다. 그런데 그 짧은 기사 안에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왜곡이 담겨 있다. 출처가 분명치 않은 이야기들, 그녀를 무너뜨리려고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수영을 한다. 25미터를 몇 번의 스트로크로 끊는가 하는 것이 사실은 내 관심사이다. 몸 상태가 좋을 때와 나쁠 때를 가려, 늘 스트로크 개수를 센다. 숫자에 집중하려고 귀마개도 했다. 숨소리와 숫자는 모든 걸 압도한다. 나는 집중한다. 그런데 또 B가 생각난다. 그녀는 자신을 얼마나 사랑할까. 이제 함께 늙어가는 처지에서 조금 궁금하다. 거대한 회색 방주 같은 그녀의 두 다리는 어떤가. 과연 그녀의 몸은 그녀가 하던 일을 기억할까? 미디어는, 관중은, 시간은 그녀를 잊어도 그녀의 몸은 그녀를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또 혼자 상상한다. 그녀가 밤에 거실에서 드리블한다, 패스한다, 리바운드한다. 그녀는 뭐든 다 해본다. 그러고는 혼자서 좋아한다. 아니 그 반대다. 뭘 해도 좋지 않은지 그녀는 고개를 숙인다. 실망한다. 베란다로 나와 하늘을 본다.

   어쨌든 현실의 그녀는 온몸의 때를 꼼꼼히 민다. 목욕탕에서 때를 꼼꼼히 미는 여자는 자살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쨌든 그녀는 동쪽 거울 앞에서 나는 서쪽 거울 앞에서 목욕 후에 할 일들을 한다. 그녀의 엉덩이는 탄탄해 보인다. 무릎까지 오는 흰색 양말을 신었던 그녀의 두 다리는 생각보다 두껍지 않다. 문제는 얼굴이다. 가발도 씌워본다. 그녀는 사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유니폼을 입혀 코트에 내보낸다. 그리고 헤어드라이어를 잡은 한없이 길고 큰 손이 보인다. B가 누구였던가. 그녀는 아시아에 한국이라는 존재를 알린 거인이었다. 다른 걸 다 떠나 그녀는 키가 컸다. 그리고 영리했다. 그리고 경기에서 늘 자기 책임을 다했다. 내가 B처럼만 할 수 있다면. 언어를, 그녀가 공을 놀리듯, 언어를 놀릴 수 있다면 좋겠다는 것. 내 욕심은 그런 것이다.
   목욕탕에서 돌아와 노트북을 펼쳐놓고 앉는다. 그리고 B라는 이름의 주인공을 설정해놓고, 지금까지 썼던 얘기들을 하나의 줄에 대충 엮어 붙인다. 혹시 이음새가 보일까 염려하면서, 사실성이 덜할까 내 얘기도 조금씩 넣어가면서. 서사를 만들어야 하는 강박에 놀아나는 시간.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만 가지고 대충 그녀가 서 있는 거울 앞 각도를 중심으로 사방에 피어오르는 수증기를 덮어씌워 그녀 존재의 실체를 흐리면서, 내 맘대로 그녀를 소비하는 것이다. 결론을 내기가 뭣하면 환상이나 환영을 덧붙이고, 그녀 삶의 한가운데를 내 것으로 바꿔 채워넣기도 한다. 인생은 이런 것입니다! 아무리 용빼고 써봐야 그런 서사가 나올 뿐이다. 이것이 내가 문학적 영감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소비하는 방식이 그랬다는 것이다.
   피터 브룩스의 『플롯 찾아 읽기』에 보면 이런 얘기들이 있다.

   — 우리가 내러티브 소설에서 추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삶에서는 거절당한 죽음, 즉 삶의 마감을 글쓰기하고 그리하여 글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죽음의 앎이다.

   — 죽음은 이야기꾼이 들려줄 수 있는 모든 것의 허용.    

   — 독서와 심판의 미래 시나리오로, 딱 한 번 완성된 형태로 제시되는 책 그 자체가 된다.    

   — 심판의 날 읽히는 스스로 작성한 부고를 상상하다 보면 내러티브를 회고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모든 내러티브가 추구하는 것이다. 모든 내러티브들 속에는 ‘평가’의 순간이 있다.

   B는 불행하지 않다. 불행한 것은 삶이 아니라 서사였다. 빈한한 상상력을 탓하자. 점점 나빠지는 시력을 탓하지 말자. 아직 상영되지 않은 영화 속에 뭔가 있으리라 기대하며 인터넷을 뒤지지 말아야지. 그렇게 어딘가에 기대는 짓은 이제 하지 말자. 그러나 B가 코트를 종횡무진 하던 시간을 기억하는 그녀의 몸, 그 몸의 감각은 알고 싶다.

1967년 춘천 출생. 서울예대 문창과 졸업. 198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흔들리다』, 『날마다 축제』, 『리나』, 『라이팅 클럽』 등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