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칼럼] 길에서 마주친 것들 | 김나영 |

[11월의 칼럼] 길에서 마주친 것들 | 김나영 |

kimnayoung

1.

   차라리 폭염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장마기간은 아니었지만 며칠 연속으로 폭우가 내렸다. 더는 쏟아낼 것도 없다는 듯이 빗줄기가 시들시들해질 즈음에 집을 나섰다. 잦아드는 빗줄기를 보며 집을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꼼짝없이 갇혀 있는 것은 고역이었다. 그럴 때면 동물의 본능이랄까, 그런 것이 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정처 없이 돌아다니고 싶은 욕구, 길 위에 두 발을 올려두고 싶은 욕구.
  겨우 비는 잦아들었지만 위아래 사방이 옅은 안개에 뒤덮여 온통 뿌옇게 무채색이었다. 아스팔트 바닥이 빗물을 머금고 더욱 검게 빛났다. 여기저기에 난 크고 작은 웅덩이들을 피해 조심스레 한 걸음씩 내딛는데 눈앞에서 한 붉은 눈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붉고도 빛나는 외눈이었다. 반들거리는 검은 바닥에서 솟아오른 듯한 붉은 그것은 정말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쪽으로 더 걸어가지 못하고 잠시 주춤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서가 아니었다. 그것이 너무나 잘 익은 싱싱한 토마토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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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혹 길 위에는 ‘이게 왜 여기에 있을까?’ 싶은 것들이 있다. 대개 그것들은 아마도 길을 걸어가던 누가 모르고 흘린 것이거나, 바람결에 떠밀려온 것이거나, 그도 아니면 누군가가 일부러 버리고 간 것일 테다. 때문에 그것들에게는 잃어버리거나 버림받은 흔적이  묻어 있다. 그것들은 오래 써서 낡았거나 더는 제 본래의 기능을 할 수 없을 만큼 고장 난 채로,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무표정하게, 길 위에 그저 놓여 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낡은 것, 상한 것들에 묻은 그 시간의 흔적을 곧장 누군가에게 잊히거나 버림받은 증거라고는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때로는 분실(紛失)의 흔적은 능동태로써 그 사물들에 새겨진다. 길 위에 놓인 것들은 태연하게 바람을 견디고 비를 맞으며, 사람들이 자신에게 부가했던 용도를 서서히 지워내고 제 소용을 새롭게 마련한다. 다시 말해, 어떤 사물은 낯선 장소에 놓여서, 단순한 분실물로 보이기를 거부하고 도리어 저를 중심으로 하여 제 주위로 새로운 시간을 ‘자발적으로’ 배치하기도 한다.
   저 반쪽짜리 토마토가 그랬다. 수시로 자동차 바퀴나 사람들의 발걸음이 지나갈 자리에서 가까스로 비켜선 곳에 놓인 저 토마토의 존재는, 그러나 조금도 위태롭거나 초라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넘치는 생경스러움으로 자신을 뽐내는 동시에 ‘보존하고’ 있었다. 이상한 느낌으로 이상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그것에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니 그 낯선 기운은 더 강하게 느껴졌다. 누가 먹다 무심코 흘린 것이라면 베어 물은 잇자국이나 거친 바닥에 떨어질 때 생긴 상처가 있을 테지만, 이 토마토의 절단면은 잘 드는 칼로 단번에 자른 듯 매끈했고 (사진에서 보듯) 꼭지가 달린 윗 부분과 그 꼭지에서 돔형태로 생긴 옆 부분까지 생채기 하나 없이 깨끗했다. 토마토의 여린 과육이 저 울퉁불퉁한 아스팔트에 닿을 때 어떻게 아주 작은 생채기조차 생기지 않을 수가 있을까. 누군가가 토마토를 그 자리에, 의도적으로 아주 신중하게 내려놓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것은 정말로 그 자리에서 막 솟아오른 듯 매끈하고 싱싱해 보였다. 
   정말 이상한 장면이었다. 거기, 길 위에, 버려지기에는 너무나도 생생한 육체가 놓여 있었다. 길은 무엇이든 버려지기에 적당한 장소이긴 하지만, 그처럼 생동감을 간직하고 있는 것, 살아있음을 뽐내며 살아있는 것들이 목적 없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기에는 어색한 자리이기도 하다. 거기 놓인 육체가, 그 토마토 한 조각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길은  버려지는 것들을 언제든 받아주지 않는다고, 도리어 버려질만한 것들이 길 위로 흘러들고, 때로는 길 위로 흘러듦으로써 비로소 생의 기미를 되찾기도 한다고 말이다. 그 토마토 한 조각은 버려질만한 것으로도, 바람이나 물을 타고 우연히 그곳까지 실려 온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 싱싱한 육체로서 길 위에서 여타의 폐기되고 분실될만한 것들의 목록에 줄을 긋는 붉은 표시였다.
   그 붉은 눈, 몸, 표시는 가까이 다가가서 관찰하면 할수록 낯선 시간, 낯선 이야기를 제 주위에 새롭게 펼쳐놓는 듯했다. 가령 누군가가 음식쓰레기 봉투를 들고 나왔다가 모르고 흘린, 시들고 일부는 썩어서 먹지 못하는 토마토 조각었는데, 그것이 줄기차게 내리던 비를 맞고 머금어 다시 생생하게 되살아난 것은 아닐까. 먹이라는 쓸모가 없어져 버려진 한 조각의 식물이 여름비의 생명력을 머금고 아스팔트 위에서 다시 깨어난다는 동화적 상상력까지 그것의 정체를 궁금해 하는 일에 동원되었다. 혹은 누군가가 샌드위치에 넣어 먹으려고 가로로 쓱 자른 토마토 반쪽이 남았고, 출근길에 마저 먹으려고 들고 나왔다가 빗길에 떨어뜨려 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누군가의 신선했을 아침 식사를 상상해보는 일은 젖은 아스팔트 위를 너른 식탁으로 바꾸어 놓고, 갓 구운 빵과 향긋한 커피나 따뜻한 우유 같은 것들을 떠올리게 했다. 쪼그려 앉아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내 몸이 반응을 했다. 그 몸은 그 길을 따라 가면 신선한 토마토를 썰어 넣은 샌드위치를 파는 가게가 있다는 정보를 내 몸에게 알려주기까지 했다.
   약간이라도 비탈진 길에서라면 제 몸을 굴려 이동할 수 있는 온전한 한 알의 토마토가 아니었다. 단면이 매끈하게 잘려 젖은 바닥에 풀칠을 한 듯 밀착하고 있던, 애초에 그곳에서 솟아난 듯한 반쪽짜리 토마토였다.  바로 보고 뒤집어 놓고 보아도 작은 흠집 하나 없이 싱싱했던 토마토 반쪽, 그것이 향긋한 기운을 풍기며 잦아드는 빗속에, 젖은 아스팔트 위에, 온통 흐리고 축축한 가운데 놓여 있던 장면은 오래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그저 그런 일상 가운데, 아마도 조금은 지루했었을지도 모를 그저 그런 여름날, 문득 그것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뜬금없던 자리에서, 누군가가 일부러 놓아둔 게 아니면 어째서 그게 그곳에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곳에서, 그것은 마치 맨틀에서부터 솟아오른 한 줌의 마그마처럼 강렬한 하나의 상으로, 그저 그곳에 있었다.

2.

   모르는 새 하늘이 높아졌다며, 잎이 물들었다며 고개를 한껏 치켜들고 걷던 날이었다. 그러다 간혹 땅을 내려다보기도 했었나보다. 한 순간, 바라본 그 곳에, 어떤 생이 있었다. 처음에는 그게 뭔지 알아보지 못하고, 걷던 걸음을 우뚝 멈추고, 그것 가까이에 쪼그려 앉았다. 그랬더니 그것 역시 가만히 멈춰서 나를 경계하는 듯했다. 후다닥 머릿속으로 감추었지만 더듬이가 있는 것으로 봐서는 달팽이가 틀림없었다. 고둥 모양의 집이 없는 걸로 봐서는 민달팽이 종류인 것 같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었고 가을 햇볕이 따사로운 오후였다. 집도 없이 맨몸으로 길 위에 멈춰 선 그 몸이 나와 다를 게 무언가 싶었고, 그래서인지 인적이 드문 오솔길에서 만난 그 작은 생명체가 더없이 반가웠다. 말 없이 한참을 꼼짝않고 지켜보고 있으니, 그것은 죽은 척하던 연기를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숨겼던 더듬이를 다시 빼내어 움직였다. 더듬이 끝에 달린 작고 검은 눈이 내 쪽을 탐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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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는 평소에 보던 달팽이보다 몇 배는 큰 몸집에, 다음으로는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그 밋밋한 육체에 놀랐다. 그 날 것 그대로의 몸은 나에게 있던 달팽이라는 보통명사를 압도했다. 등껍데기가 있고, 위기에 처하면 얼른 그 집 속에 제 몸을 숨기는, 보통의 달팽이라는 나의 편협된 관념을 그 엄연한 몸뚱아리가 조용히 일러주었다. 일어선 자세로 내려다 본 그것은 지렁이 같기도 했고, 쪼그려 앉아 보니 어렸을 적에 교과서에서 본 아메바와 닮은꼴인 듯도 했다. 달팽이 같지 않은 채로 달팽이인 그것은 곧 더듬이로 허공을 조심스레 더듬었다. 그러다 곧, 작은 모래알갱이를 매단 꼬리를 이끌며 앞으로, 더 앞으로, 조금씩, 아주 조금씩 제 몸을 밀고 나갔다.
  그러는 행동을 보고 있자니 문득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안 그래도 가을치고는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이었다. 아무래도 그것은 덜 건조하고 덜 밝은 곳으로 몸을 옮기던 중이었는데, 불현듯 제 앞에 자신을 노려보는 동물까지 나타나 제법 당황한 게 아닐까. 나를 포함한 주위를 경계하며 거친 모래바닥을 온몸으로 쓸고 가는 그 작고도 큰 몸뚱어리가 얼마나 힘이 들까 싶었다. 게다가 제 몸 크기의 1/10 정도는 될 법한 굵은 모래 알갱이까지 꼬리에 매달고 가는 꼴이라니. 길 양쪽으로 가까이, 사람의 발목을 겨우 덮을 만큼의 낮은 풀숲이 있었다. 오른손 엄지와 검지에 힘을 주어 달팽이의 몸을 집어 들었다. 꿈틀, 하던 그 몸을 지체 없이 얼른 오른쪽 풀숲 아래 쌓인 낙엽 위로 던져 놓았다.
   달팽이의 행로가 오솔길을 가로질러 풀숲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그 몸을 그곳으로 얼른 옮겨주면 좋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몸을 손가락으로 집어 올리는 순간, 내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순간 온몸의 근육을 바짝 경직시키며 꿈틀거리던 달팽이의 저항은 나름의 선의를 베풀고자 했던 내 결정이 오로지 나에게만 편리한 방식이었음을 직감하게 했다. 달팽이는 온몸으로 당혹감과 불편함을 표현했다. 나는 끈적끈적한 점액질 때문에 단숨에 그것을 잡는 데 실패했고, 그 미끌거리는 몸을 여러 번 잡으려고 시도하면서 손가락 끝에 어느 정도의 강한 힘을 주어 겨우 그것을 모래 바닥에서 떼어낼 수 있었다. 애초의 의도와는 다르게, 그 작은 몸을 향해 내 욕심을, 폭력을 가해버린 것이다. 그 길에 그대로 두었어도 그 몸이 햇볕에 바짝 마를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고독한 그 몸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주고 싶었던 것은, 어쩌면, 자신에 대한 연민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싹 마른 낙엽 위에서 다시 꼼짝 않고 놓여 있는 달팽이의 경직된 몸을 보니,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부끄러웠다.
   온몸으로 저항하던 달팽이에 대한 감촉은 내가 흥미롭게 읽었던 『달팽이 안단테』(돌베개, 2011)라는 책을 떠올리게도 했다.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 혼자서는 거동을 할 수 없는 중증 환자가 된 저자가 달팽이 한 마리와 함께 살아가며 달팽이에 관한 거의 모든 지식을 섭렵하고 그 작은 생명체에게 자신의 온 시간을 쏟아 붓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에서 오래 감동을 느꼈던 부분은 일면 뒤바뀐 처지에 대한 세밀한 묘사였다. 침대 위에서 모든 시간을 보내며 혼자서는 물리적인 이동을 거의 할 수 없었던 저자는, 제 옆에서 조금씩이지만 항상 이동하고 제가 놓인 세계를 탐색하는 일에 소홀하지 않던 달팽이에게 영향을 받는다. 그는 달팽이에 대한 관심으로 읽고 생각하고 느끼고 꿈꾸며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넓혔는데, 그 결과가 고스란히 그 책 한 권에 담겨 있었다. 달팽이의 탐색과 모험은 투명한 점액질의 흔적을 남기긴 했지만, 사실 저자의 눈길이 따르지 않았다면  결코 볼 수 없는 영역이기도 했을 것이다. ‘살아있음’, 그 모호할 수도 있을 법한 인식을 저자는 작은 달팽이 한 마리를 통해 생생하게 바라본다. 생명체의 역사라든가, 그것이 유지되기 위한 이동과 진화의 메커니즘을 바라보는 안목을 통해 달팽이라는 미물의 거대한 생명력이 인간 존재로도 옮겨올 수 있다. 그렇게 한 인간은 달팽이로부터 그 느리고도 정성스러운 시간을 분양받게 되는 것이다.
   내가 움켜쥐려 애썼던 민달팽이의 몸에서 느껴졌던 그 꿈틀거림 역시 기묘한 생명력으로 내 몸에 옮겨진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짐처럼 짊어진 집조차 없던 맨몸이 안쓰러워, 축축한 그늘로 옮겨주려 했던 나의 결정은 그 몸에게 얼마나 강력한 공격으로 느껴졌을까. 언제나 생에 대한 최대한의 의욕, 가장 큰 생의 발휘는 어떤 공격에 대한 방어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손가락을 타고 전해진 그 작고도 큰 생의 꿈틀거림은 이유 모를 방황으로 길을 헤매던, 근거 없는 피해 의식으로 괴로워 하던 나를, 그 몸 앞에서 멈춰세웠다. 사실 이제와 보니, 그때의 내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했던 고민이 무엇이었는지 잘 기억나지도 않는다. 그것은 마치 고민을 위한 고민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치 사춘기 소녀가 새롭게 알아차린 세상의 한 국면에 한쪽 발을 들이밀면서 취하게 되는 포즈처럼. 그러니 당연히 답을 얻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길 위에 서서 무작정 길을 이어나가던 내 몸 앞에 나타난 그 하나의 맨몸, 그 온몸의 꿈틀거림이 내게 남긴 투명한 흔적만은 없던 것일 수가 없을 것이다. 그 무언의 질책, 그 투명한 점액질이 내게 말해준 것은 분명히 있다. 그 몸은 나에게, 그 손가락에서 힘을 빼라고 했던 것 같다.

    

3.

   왜 길 위에 놓인 생, 길바닥에 제 몸을 붙이고 있던 것들에 눈길이 쏠렸을까. 길이라는 것은 언제 어디에서든 정지보다는 지속을, 시간의 진행을 상상하게 한다. 지금껏 살아온 시간, 앞으로 살아갈 시간은 마치 지금 여기라는 내가 딛고 있는 길로써 형상화 되기도 한다. 개인의 역사라 할 만한 내밀한 시간이 그 공동의 길 위에 놓여 있고, 그 시간에 잇대어진 다른 시간들이 나의 그것과 뒤섞여 현재형으로 흐르는 중이라고, 길 위에 놓인 어떤 생을 바라보는 일을 통해 생각해보게 된다. 어쩌면 모든 삶은 살아가는 일, 그것보다는 살아온 일에 대한 보증을, 제 시간에 대한 증언을 더 갈구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길이라는 것이 애초에 그 자체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듯, 그 위에 놓인 무한한 삶의 흔적들로 채워지는 것이듯, 지금의 어떤 생생한 삶들도 길을 통해서, 다른 삶들을 통해서 저의 존위를 인정받고자 살아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문득 나의 길을 침범한 것들로부터, 나의 길은 지워지고 나의 길은 새로 마련되었다. 항상, 원래, 당연히, 있어야만 할 곳이라는 것은 움직이는 삶의 와중에는 없을 것이다. 누군가가 내 앞을 가로막고, 우연히 그 길을 벗어나게 되는 일의 연속이, 마치 실선처럼 보이는 자잘한 점선처럼 놓여 길이라 부름직한 행로를 만들 뿐이다. 이 당연하고도 평범한 생의 형식을 그날의 토마토가, 그때의 달팽이가 이제와 내 의식 가운데 다시 떠올라 일러준다. 잊을 법했지만 쉽게 잊을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을 사진 속에 담아 두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사진을 보듯, 현재형의 일상은 하나의 찰나 속으로 되돌아가기를 거듭하면서 지속하는 힘을 기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나는 길 위에 있는 그 젖은 몸들을 보고 맨 먼저 어떤 상처를 예감했던 것이다. 실제로 그 몸들이 길 위에 놓여 있었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나는 그 몸들이 스스로는 느끼지도 못했을 어떤 생채기를 느끼고 나름의 시간을 현상했다. 그들을 발견했을 때, 그 몸들과 내 몸이 하나의 시간으로 이어졌던 것은 그처럼 상처에 대한 감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꺼끌대는 모래 바닥을 기던 몸, 울퉁불퉁하고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비를 맞던 몸은 그때의 나와 다른 몸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떤 한 순간, 주체할 수 없이 생생했던 생들이 나를 응시했을 때, 나는 내 생애 가운데 살아있음을 가장 생생히 체감했던 한 때로 돌아가 그때의 고통을 되새기게 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명확히 꼬집어 이름 할 수는 없지만, 누구에게나 있을 내면의 상처는 그렇게 낯선 길 위에 나서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무명의 실감으로 거듭 깊어지게 된다. 그리하여 한 생에 새겨진 상처는 누군가에게 발각되지 않을 뿐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일단 그것이, 길 위에서 만난, 그 생경하도록 생채기 없이 생생한 몸들이 내게 일러준 것이다. 

평론가, 2009년, 계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