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칼럼] 시들지 않는 꽃을 보았다 | 허연 |

[10월의 칼럼] 시들지 않는 꽃을 보았다 | 허연 |

heoyeon3   “돈키호테가 기사 수업을 나갈 때 만들었던 투구를 수없이 만들어 위대한 당신에게 바치며…….”
   화가 손상기가 1983년 동덕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팸플릿에 썼던 글이다.
   손상기, 아니 상기 형은 그랬다. 돈키호테였다. 어렸을 적 구루병을 앓아 척추장애가 된 그는 자신의 악조건을 인정하지 않은 채 이상을 쫒아 풍차로 돌진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심각한 장애도 그 장애가 가져다준 병마도 그를 막아서지 못했다.
   뜬금없이 손상기에 관한 기억을 더듬게 된 건 그림 한 점 때문이다. 얼마 전 우연히 들렀던 모 아트페어에서 오랜만에 손상기의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몇 점의 작품 중 내 발길을 붙잡은 건 <시들지 않는 꽃>이라는 그림이었다. 어느 집 담벼락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장미꽃을 그린 그림이었는데, 내가 그의 화실에 처음 드나들던 80년대 중반 작품이었다. 꽃이 어떻게 시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자신이 꺼져 간다는 걸 직감했기 때문일까. 손상기는 캔버스에서만큼은 어떤 생명도 시들지 않기를 염원했다. 그가 보여준 타오를 듯한 생에 대한 찬양은 늘 숭고했다. 나는 27년 만에 만난 그 그림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내가 손상기를 알게 된 건 그의 친동생이자 시를 쓰는 손월언과 친해지면서였다. 나는 손월언과 어울려 다니며 손상기의 서교동 화실에 종종 놀러갔고, 화실 구석에서 함께 자장면을 시켜먹곤 했다. 그때마다 도무지 타협이라고는 없는, 그러면서 어린아이 같고 무모한 그에게서 매력을 느꼈다.
   손상기에게 예사롭지 않은 감정을 느낀 건 사실 못 이룬 나의 꿈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미술반이었던 나는 가톨릭 신부가 되라는 집안의 뜻에 반기를 들었고, 그 결과로 미술도, 신(神)도 얻지 못한 부적응자로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그나마 내가 손상기를 알게 됐을 무렵은 시를 만나면서 겨우 삶의 진정을 찾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어디 꿈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탈색되는가. 몇 평 안 되는 그의 화실에 펼쳐져있던 모든 것들, 마구 널브러져있는 화구부터 독한 유화물감 냄새까지 내게는 하나도 예사롭지 않은 ‘어린 신념’과의 재회였다.
   무엇보다 억센 자기 반영이 묻어있는 그의 그림이 나를 흔들었다. 내가 좋아했던 키르히너와 장 포트리에를 절묘하게 닮은, 거기에다 그 무렵 세상을 등진 최욱경의 열정까지 한곳에 모은 듯한 그의 그림은 너무나 강렬했다. 손상기는 그들 모두를 닮았지만 그들 모두를 벗어나 새로운 류(類)를 만들고 있었다. 내 눈에 그의 작품은 문학작품에 가까웠다. 특히 시로 읽혔다. 그것도 온전히 현대 한국어로만 쓰인 시였다.

   내가 손상기를 마지막으로 본건 87년 초겨울이었다. 그가 도봉동 아파트로 이사를 하던 날이었고, 공교롭게도 그날은 나의 군 입대 하루 전날이기도 했다. 자청해서 이삿짐을 나르러 온 사람은 5∼6명 정도였다. 난 사실 그날 머릿속이 복잡했다. 군대 가기 전날 누군들 마음이 편할 수 있으랴. 이삿짐을 나르면서도 나는 바로 다음 날부터 벌어질 내 인생의 극적 변화를 걱정하고 있었다. 
   자기 작품에 대한 손상기의 집착은 그날도 유난스러웠다. 공사가 마무리도 되기 전에 입주하는 아파트여서 엘리베이터가 작동을 하지 않았는데, 그는 작품이 상한다며 사다리차로 그림을 옮기는 걸 반대했다. 그의 고집 때문에 우리는 할 수 없이 그림들을 모두 손에 들고 계단으로 날라야 했다. 아마 9층이었던 것 같다. 손상기는 다작이었던 데다 그림 크기도 보통 50호 이상으로 큰 편이었다. 9층까지 수십 번을 오르락내리락 했으니 다리가 후들거리고 정신까지 혼미했다.
   그때 손상기는 거실 구석에서 산소호흡기를 꽂은 채 정좌한 자세로 앉아 있었는데, 흡사 자신에게 다가오는 마지막을 관조하는 뫼르소 같았다. (당시 손상기는 척추장애 후유증으로 폐울혈성 신부전증을 앓고 있었는데 폐가 제 기능을 못해 산소호흡기를 끼고 있어야 했다.) 그림 한 점을 들고 거실에 도착할 때마다 그와 나는 눈이 마주쳤는데, 그의 눈에서 짤막한 몇 마디 문장이 읽혔다. 미안한 마음,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절박함, 작품에 대한 애정 같은 것이 담긴 외마디 눈빛이었다. 
   해가 질 무렵 이삿짐 나르기가 끝나고 우리는 당시 우리의 일용할 양식으로 가장 자주 등장하던 예의 그 자장면을 시켜놓고 앉았다. 자장면을 먹는 우리를 지켜보던 그가 산소호흡기를 잠시 떼고는 말을 했다.
   “연이 군대 간다며? …… 지 자신을 좋아하는 놈이니 멀쩡히 돌아는 오겠네.”
   그날 손상기는 내게 이삿짐 박스에 있던 책 몇 권을 줬다. 시집도 있고 까뮈의 산문집도 있었다. 다음 날 기차 안에서 읽으라는 건지 나중에 읽으라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책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 그가 준 책들을 넘겨보았다. 그 중 로트레아몽의 시집이 있었는데 그 시집 속표지에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
   “세상은 몹시 험하지만 한 번은 살아볼 만하다. ‘영원한 퇴원’. 태양은 아직도 보라색인데 어릴 적 부르던 노래는 어디 있을까.”
   그가 병원에서 퇴원하면서 적어놓은 글인 것 같았다. 로트레아몽의 시집이 속해 있던 <세계시인선> 시리즈 속표지에는 장 프랑수아 밀레의 <땔나무 나르는 사람들>이라는 목탄 스케치가 바탕에 깔려 있었는데, 그 스케치 위에 무늬처럼 쓰인 힘없는 글씨를 나는 한동안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얼마 후 손상기는 세상을 등졌다. 그의 동생 손월언에게서 편지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그의 장례식은 치러진 후였다. 물론 미리 알았다고 해도 이등병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편지가 도착한 날, 입대할 때 들고 온 그의 화집 표지에 있는 자화상을 물끄러미 바라봤을 뿐이다.

   어쨌든, 20년을 훌쩍 넘긴 어느 날 나는 <시들지 않는 꽃>을 다시 만난 것이었다. 그리고 몇일 후, 서교동 시절 그가 산소호흡기를 사용하기 전 마지막으로 그린 작품 중 하나인 그 그림이 누군가에게 기록적인 가격에 팔렸다는 소식을 들으며, 그가 전설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쓸데없는 질문을, 아무도 답해줄 수 없는 질문을 던졌다.
   ‘영원한 퇴원’을 한 그는 ‘시들지 않는 꽃’이 된 것일까? 그는 이 세상을 보고 있을까?
   나는 오늘 그 전설이 철저한 대가 위에서 완성된 것임을 고집스럽게 말하고 싶다. 그는 단 한 순간도 그림으로 배를 불리지 않았고 시시각각 죽음을 향해 갔지만 단 한 번도 시들지만은 않았다. 나는 시들지 않는 꽃을 보았다.

    

1966년 서울생. 1991년 『현대시세계』로 등단. 시집으로 『불온한 검은 피』,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내가 원하는 천사』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