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칼럼] 닮음-분신과 아이(2) | 김연경 |

[8월의 칼럼] 닮음-분신과 아이(2) | 김연경 |

 

kimyeonkyung“아니면 [두 인간이] 두 방울의 피처럼 서로 닮는다는 것 자체가 실제로 이미 범죄인 걸까?”(나보코프, 『절망』) 그 자체로 고유하고 유일한 존재인 인간을 명백히 가치론적인 위계질서를 전제로 하는 ‘원상-분신’의 틀에 맞추려는 것은 죄악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닮음의 공동체나 계보를 향한 인간의 집착이 흥미롭다(나의 글, 「닮음-분신과 아이」, 『대산문화』2013 여름호). 나를 닮은 존재(분신)는, 원전-고전을 닮은 문학(패러디)처럼, 불편함 이상의 불편함을 야기한다. 외부의 도플갱어가 아니라 그것을 만들려는 내 안의 욕망이 문제인 까닭이다.
   많은 철학자들이 아이의 비유를 즐겼고 아마 그들 대부분이 남성이었던 탓에 십중팔구는 추상적이었는데, 루소만은 예외가 아니었나 싶다. 계몽과 이성의 대명사이자 교육학 분야에서도 고전(『에밀』)을 남긴 그가 사실혼 관계에 있던 여성(테레즈)에게서 다섯 아이를 낳았고 그들을 모두 고아원에 보낸 것은 널리 알려진 얘기이다. ‘고백’을 통해 자신의 ‘죄악’을 (나아가 인간의 본성을) 환히 밝히려는(enlightenment, 계몽!) 그의 문체가 웬만한 소설을 능가할 만큼 혁신적이고 유머러스하다. “내가 인간의 의무에 관해서 철학적 고찰을 하고 있는 동안, 한 사건이 일어나, 내 자신의 의무에 관하여 좀 더 깊이 생각하게 했다. 테레즈가 세 번째로 임신한 것이다.”(루소, 『고백』) 자식들을 직접 키울 힘이 없었던 까닭에, 아이들을 “공적 교육(公的 敎育)”에 맡김으로써 “방랑자나 투기사”가 아닌 “노동자나 농부”로 만드는 것이 “공민(公民)으로서 애비로서의 할 일을 하는 것”이라는 논리이다. 이것이 “무척 좋고 분별 있으며 아주 정당하게 생각”되었다.
  이 대목은 통상 루소의 도덕적 결함과 이중성을 질타하는 근거로 활용되지만, 그가 18세기의 남성로서 출산과 육아의 문제에 관여, 적어도 그것을 자신의 고민의 영역에 포함시켰다는 사실이 오히려 기특하고 갸륵해 보인다. 결국 그는 아버지로서의 ‘의무’를 당당히, 떳떳이 방기하고 그 대신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사유하고 기록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아이와 마주한 순간, 이른바 루소의 선택이 영원한 딜레마처럼 되살아난다. 역시 이론과 실제는 서로 어긋나야 제 맛인가. 

 

     해질 무렵, 곱슬곱슬 파머 머리를 한 짜리몽땅한 아줌마가 각각 일곱 살, 다섯 살짜리 두 딸을 걸리고 돌도 지나지 않은 아들을 등에 업은 채 어느 산동네의 비탈길을 오르고 있다. 그 무렵 그녀는 셋방에 딸린 홀에서 라면을 끓여 팔았고 행여 주인한테 밉보여 길바닥에 나앉을까봐 수시로 그 집 빨래를 해주기도 했다. 서른다섯을 넘겼을 즈음, 그녀는 시장에 노점을 하나 얻어 보리차와 옥수수차, 소금을 팔았다. 이른 새벽에 출근하여 하루 종일 장사하고 저녁에는 집안일을 했다. 가뜩이나 거무스름한 얼굴에는 칙칙한 기미가 안화(眼花)처럼, 비문(飛蚊)처럼 드리워졌다. 내 기억 속의 엄마는 항상 바빴고 때문에 항상 신경질적이었다. 도무지 국어책 삽화 속의 다소곳한 앞치마를 두르고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우아한 엄마, 즉 이론은 실제 속에서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모들의 회상 속에 등장하는 엄마는 생판 딴 모습이다. 한글도 제대로 못 읽는 열여덟의 시골 처녀가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로 떠난다. 일 년쯤 뒤, 70년대의 유행을 십분 반영한 짧은 미니스커트에 치렁치렁 긴 생머리, 굽이 높고 코가 뾰족한 하이힐, 화려하고 짙은 화장을 뽐내며 고향 땅을 밟는다. “너거 엄마가 왕년에는 진짜 멋쟁이였는데….” 금의환향의 포즈는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한다. 그녀는 이내 완전히 귀향, 군복무 시절을 빼면 평생 거창 바깥을 나간 적이 없는, 그러나 신문도 읽을 줄 아는 스물일곱의 노총각에게 시집간다. 이모들의 분석에 따르면, 이 대목에서 그녀의 팔자가 완전히 망가진다. 시부모 모시고 시동생들 뒷바라지하고 사시사철, 밤낮 지옥 같은 노동에 시달리고 한 아이의 젖을 떼기가 무섭게 또 배가 불러 오고 등등 전형적인 농부(農婦)의 삶이 시작된다. 몇 년 뒤, 죽어도 고향은 못 떠난다는 남편을 구슬려, 기필코 아들을 가져보겠다고 낳은 셋째를 담요에 둘둘 말다시피 하여 부산으로 나와, 전포동 기찻길 윗동네에 조그만 방을 얻는다. 여기부터가 대략 내 기억 속의 억척스럽고 그악스러운 엄마이다. 

  

    “죽어도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 이런 말을 많은 딸들처럼 나도 수없이 되뇌었고 얼마간은 실제로도 그리 되는 성 싶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비포(before)’의 얘기일 뿐, ‘애프터(after)’, 즉 내가 ‘엄마’의 자리에 앉게 되자 역사가 고스란히 반복되는 것 같은 느낌에 놀라울 따름이다. 놀라는 일 자체가 오히려 놀랄 일이라는 듯, 정확히 그럴 줄 알았음에도 애써 감고 있던 눈을 뜨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이 기어코 찾아온 듯, 민망하고 멋쩍기도 하다. 돌이켜 보니, 엄마의 멋이 미니스커트와 하이힐이었다면, 나에게 그것은 엄마의 얼굴을 기미투성이로 만들어버린 삶의 속됨으로부터의 해방, 그 추구였지 싶다. 상당 부분 의도적이었을 법한 퇴폐적인 삶, 시도 때도 없이 연거푸 피워댄 담배, 단식과 폭식을 오가는 방만한 식생활, TV판 「공각기동대」나 『몽테크리스토 백작』따위로 채워진 밤, 그 무익함과 한심함 때문에 더 즐겼던 웹서핑….
  까막눈 엄마는 서울살이를 얼마 견디지 못해 귀향했지만, 너무 긴 가방끈 때문에 섣불리 귀향도 못한 나는 마냥 엄살만은 아니었던, 위악과 냉소, 권태와 우울과 환멸을 양념처럼 섞어 넣은 고독하고 굶주린 서울살이를 이어나갔다. 마흔을 앞둔 현재, 금연은 물론이거니와 삼시 세끼 저염 웰빙 식단을 꾸리고 매일매일 방바닥을 물걸레로 닦고, 무엇보다도, 진짜 비문 때문에 시야가 어질어질한 가운데, ‘나인 투 식스’의 삶, 그것도 마땅한 직장은커녕 어디 작업실도 없어 집 앞 커피숍으로 ‘출퇴근’하는 삶을 살고 있다. 생계를 이유로 아이를 남의 손에 맡겨놓는 것이 죄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정말로 죄스러운 엄마가 되는 것인 까닭에 죄스러운 마음 자체를 갖지 않으려고 애쓰고, 그럼에도 당장 밥벌이와 무관한 책을 보거나 그런 글을 쓸 때면(지금처럼!) 쾌감과 더불어 어김없이 죄스러운 마음이 동반되고, 때문에 생계도 생계거니와 일종의 자기 응징(!) 차원에서 최소한 두서너 쪽의 번역은 꼭 하려고 애쓴다. 
  엄마의 과거를 약간 변주하되 궁극엔 그녀와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궁상과 청승과 극성의 짬뽕으로 요약될 작금의 내 모습이 유머러스하다. 걸어도 걸어도, 아니, 걸어서 걸어서 제 자리이다. 이럴 거면 뭐 하러 이 먼 길을 왔던가. 이런 말도, 애당초 인생에서 ‘뭐’를 상정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어딘가 유머러스하다. 차원과 수준이 너무 달라 비교할 건 아니나, 힘겹게 성(城) 앞에 도달한 K의 허허로운 무채색 탄식이 요즘 곧잘 상기된다. “성을 시찰하기 위한 것뿐이라면, K는 일부러 먼 길을 올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 정도라면 이미 오랫동안 못 가 본 고향을 다시 한 번 찾아보는 편이 훨씬 현명한 행동이었을 것이다.”(카프카, 『성』)

 

   한동안 내 속에서 유유자적 잘 놀다가 버럭 세상에 나온 분신의 얼굴에서 오래 전에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흑백의 돌 사진에 박힌 내 얼굴이 활동사진처럼 되살아난다. 그때마다 내 모습에서 과거 엄마(아빠)의 모습을 볼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강렬한 절망을 맛본다. 과연, 악몽과 역사는 반복되고,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오직 이 반복을 완성하기 위해서일뿐인가! 언제가 아이는 나의 ‘비포’를, 심지어 ‘애프터’마저도 제 나름의 변주를 곁들여 반복할 것이다. 반복이 불가피한 만큼이나 이 변주가 소중하다. 그리고 공시적 닮음이든 통시적 닮음이든 완전한 닮음(같음)이 불가능한 만큼이나 닮음의 비율, 즉, 다름(차이)이 중요하다. 강조하건대 “모든 얼굴은 유일무이”(나보코프, 『절망』)하다. 아이가 순전히 그 자신의 것으로서 갖게 될 고유하고 유일한 얼굴, 또 그렇게 일궈갈 삶을 축복한다. 더불어 요 삼년사이에 갑자기 많아진 조카들, 세상 모든 아이들의 얼굴과 삶을…. “불아불아! 해님 같은 우리 아가, 밝은 빛이 되어라.(…) / 질라아비 훨훨! 우리 아가 예쁜 아가, 건강하게 자라라.(최숙희, 『곤지곤지 잼잼』.)

 

 1975년생. 서울대 노문학과 졸업. 1996년, 계간 『문학과사회』로 등단. 소설집 『고양이의, 고양이에 의한, 고양이를 위한 소설』 『내 아내의 모든 것』, 장편 『그러니 내가 어찌 나를 용서할 수 있겠는가』 등을 펴냄. 러시아 문학 번역가로도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