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칼럼] 절하된 미래의 유산- 몇 가지 산만한 물음들  | 강동호 |

[7월의 칼럼] 절하된 미래의 유산- 몇 가지 산만한 물음들 | 강동호 |

kangdongho밀란 쿤데라는 「세르반테스의 절하된 유산」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바가 있다. “예전에는 나 또한 미래를 우리의 작품과 행위에 대한, 유일하게 자격 있는 심판자로 생각했다. 한참 후에야 나는 미래를 갖고 노는 것이 보수주의의 가장 나쁜 것이며, 강한 자에 대한 비열한 아첨임을 깨닫게 되었다. 미래는 언제나 현재보다 강하니 말이다. 물론 그것은 우리를 심판할 것이다. 분명 아무 자격도 없으면서.” 쿤데라의 냉소적인 불평은 이해할만한 것일 뿐만 아니라, 비단 소설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도 아닐 것 같다. 마치 아무런 죄도 없이 그저 ‘개같이’ 죽어야만 했던 『소송(카프카)』의 요제프 K처럼, 현재적 인간은 언제나 저 잡히지 않는 미래에 의해 강제적으로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다.
   소설가의 말대로 미래는 현재를 판정할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자격이 없다는 사실이 힘을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강하다는 것 또한 반드시 옳다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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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쿤데라가 위 글에서 미래를 힘이 세지만 아무런 자격도 없는 불한당 같은 존재로 평가 절하한 것은 당대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향한 작가적 반항심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미래에 대한 진보적이고도 낙관적인 기획이 여전히 강성하게 그 자체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시기에, 즉 현재 너머의 시간적 지평을 이념적으로 점거하여 그 이상적인 사회상을 현재로 앞당겨올 수 있다는 믿음이 만연했던 정치의 시대에 그는 위 글을 썼다. 말하자면, 현재는 온전한 현재라기보다는 이상적 미래에 대비하여 결핍된 현재, 따라서 미래화 되어야 할 현재 같은 일종의 결여태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와 현재를 업신여기고 미래로 내달려가는 속도감에 도취되어 있던 이들은 쿤데라가 보기에 그 아무리 숭고한 이상을 내세운다고 하더라도 어떤 의미에서는 더 강한 것, 더 빠른 것, 더 큰 것에 아첨을 하는 일종의 종교적 광신도와 다를 바가 없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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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지금의 세대에게 있어 혁명(revolution)이라는 정치적 기표는 혁신(innovation)이라는 사업가의 슬로건으로 대체된 지 오래다. 세계는 이제 늙어버렸고, 우리는 이 늙음의 시대에 전망을 잃은 상태로 오랫동안 길들여져 왔다. 늙었으므로 심판을 기다릴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아니, 이미 심판은 내려졌으며, 따라서 미래의 문 역시 닫혀버린 지 오래다. 그저 적당히 견딜만한 권태, 혹은 적당히 즐길만한 쾌락 사이에서 진동할 뿐. 관례화된 파괴의 기쁨을 전위라 믿으며, 앙상한 권태를 고독이라 착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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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글(google)에서 농담처럼 이야기하는 ‘스텝퍼 이론(stepper theory)’이라는 것이 있다. 스텝퍼는 한정된 실내 공간에서도 제자리 걷기를 통해 계단을 오르거나 등산을 하는 등의 운동 효과를 줄 수 있는 작은 운동 기구이다. 스텝퍼 이론은 헬스장의 기구 위에서 열심히 발을 놀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결국 전 인류의 영속적인 현재를 보여준다는 사업가들의 인류학적/사회학적 논평에 다름 아니다. 아무리 땀을 흘리면서 힘겹게 걸어도 제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인간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의미심장한 것은 그 스텝퍼에 올라가 재생산의 흐름에 자신의 삶을 안정적으로 맡길 수 있는 사람도 소수이며, 우리가 그토록 자기를 착취하면서 경쟁하는 것도 기껏해야 그 스텝퍼에 오르기 위해서라는 사실이다. 더 이상 우리는 성공적인 미래를 부여잡기 위해 자신을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서 겨우나마 이탈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착취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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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이러한 시대에도 ‘미래’라는 말이 작동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현재를 미래로 투사함으로써 미래를 현재화 하려는 정치 이데올로기의 열망이 한쪽에 있었다면, 거꾸로 미래까지도 관리 가능한 대상으로 만듦으로써 현재를 미래화 하려는 경제 이데올로기의 기술도 다른 한쪽에 있을 수 있으니 말이다. 가령, 사회과학 분야에서 최고의 두뇌들이 모인다고 자부하는 금융경제학이라는 최신의 유행 학문은 어떤가. 금융경제학은 우리에게는 파생 상품과 헤지펀드라는 흉흉한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현대 자본주의 경제의 최첨단 분야다. 쉽게 말해 이들은 대단히 복잡한 수학적/통계적 공식을 개발함으로써 어떤 재화의 미래 가치를 정확하게 측정하여 자신이 예상한 가격보다 비싸게 물건을 팔고, 싸게 물건을 사는 일을 해내고야 만다.
   학부 시절에 나는 뭣도 모르고 그 수업을 수강한 적이 있었는데, 국내 유명 증권사 출신의 경제학 교수가 재화의 미래적 가치를 예측할 수 있는 휘황찬란하고 복잡한 수학 공식을 칠판에 적으면서 그것의 아름다움에 도취되고 찬미하곤 했던 것이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물론, 당시 그 수식들을 온전하게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러한 불가능성이 도리어 그 암호문 같던 공식을 마치 신탁의 징표 같은 아우라를 부여했던 것 같기는 하다. 그러니 저 신탁을 이해하기 위해 엄청난 정신적 노동을 쏟아 붓는 학생들은 충분히 이해 가능한 것이다. 저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인해, 이제 미래는 도래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관리되는 것으로 변모할 수 있었던 것이니까. 어느새 쿤데라가 말했던 종류의 힘이 센 ‘미래’라는 존재는 역사철학의 무대 뒤로 쓸쓸히 퇴화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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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나쁜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미래를 자신들이 꿈꾸는 이상적 질서로 탈바꿈하려 했던 진보주의자들의 보수주의적 정치? 아니면, 현실의 질서를 더욱 확장할 수 있다고 믿는 보수주의자들의 저 눈부신 진보주의적 테크닉?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이고 해결하기도 난망한 물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더 나은 삶에 대한 갈망과 전망이 없다는 것을 견딜 수 있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비약을 무릅쓰고 말하거니와, 여전히 우리에게 문제는 미래이니까 말이다. 미래는 이제 손쉽게 아첨꾼들의 전리품이 되거나 상갓집 개 마냥 우습게 조롱당하기도 하지만, 미래에 아첨하지 않고 미래를 모욕하지 않으면서도 미래를 반길 수 있는 방법 같은 것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가 좀처럼 포기가 되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다.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우리는 미래에 의존하지 않고, 미래와 결탁하지 않으면서도 더 나은 삶의 모습을 상상하는 길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어느새 관례와 습관이 되어버린 아방가르드, 정치성을 상실한 유희적 미학, 산업의 회로에 빨려 들어가고 있는 예술적 스펙터클 이외의 것을 상상할 수는 없을까.
   정치의 초석으로서의 미래, 그러나 정치의 독단적 지배를 훼방하는 것으로서의 미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사이의 투쟁을 활성화하고 독려하는 방법과 전술들. 산만하게 늘어놓았지만, 문제는 어쩌면 그 주위에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슬그머니 덧붙여 보고 싶다. 이 세계의 미래에 대해 완벽하게 이야기할 수 없지만, 세계의 종말에 대해서도 진실로 자신할 수 없다는 것. 이 두 가지 형태의 무능과 불명확함이 어쩌면 우리에게 일말의 희망이 되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을 버리고 싶지 않다. 미래를 모른다는 사실, 그러나 우리가 끝내 그렇게 모르는 상태로 견뎌야 하는지도 역시나 모른다는 사실. 이 두 가지 무지가 역설적이게도 평가 절하된 미래의 모욕적인 죽음이 남겨놓은 아주 사소한, 그러나 중요한 유산일지도 모른다.

 [평론가]

 

  문학평론가, 『문학과사회』편집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