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의 그늘 속에서

웃음의 그늘 속에서

—김유정문학상 수상 소감

솔직히, 어느 날 문득 전상국 선생님께서 전화를 주셨을 때, 저는 너무 뜻밖이라 몹시 놀랐고 무슨 이유인지 의아해했으면서도 그것이 이 상의 수상 통고를 위한 것이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었습니다. 아마도 제 속엔, 제가 ‘상’이란 것과는 애당초 거리가 먼 작가라는 자의식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정희 선생님까지 거드셔서 제 수상이 기정사실화된 뒤에도 여전히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른 무엇보다, 과연 제 문학이 김유정이라는 이름에 값할만한 것인가라는 자문이 곧바로 뒤따랐던 것입니다. 저는 누구보다도 저 자신을 설득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제가 이해하는 김유정 문학이란 무엇일까요? 잠깐 동안, 이에 대한 이야기로 제 수상 소감을 대신해야 할 것 같습니다.
김유정이 한국 근대문학에 희극적 미학의 초석을 놓은 작가라는 평가에는 이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김유정의 문학을 가장 넓고 깊게 지배하고 있는 것은 분명 웃음입니다. 그러나 그 웃음을 단순히 토속성에 기초한 해학 정도로 해석하는 데는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교과서에 자주 실리는「봄 ․ 봄」은 전형적인 소극(笑劇, farce)의 폭발하는 웃음을 우리에게 선사합니다.「산골」이나「동백꽃」이 자아내는 웃음도 비교적 그에 가까운, 풋풋하고 소박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김유정의 더 많은 다른 작품들에서 전혀 색다른 질감의 웃음들이 제공되고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될 듯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들이 김유정의 문학적 의미를 확립하는 데 더욱 중요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웃음은 매우 복잡한 인간적 현상입니다. 폭소가 있자니 미소도 있고, 아이 같이 순수한 웃음 반대편에 야비한 웃음이 있는가 하면 자조적인 웃음도 있으며, 비웃음 ․ 헛웃음 ․ 선웃음 등등, 웃음의 편차를 나누자면 한도 없을 듯합니다. 그런데 김유정의 작품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것들이 유발하는 웃음의 다양한 양상에 놀라게 되고 점차 그런 웃음의 심연에 빠져들게 됩니다. 한 프랑스 이론가의 설명에 의하면 그러한 양상은 원초적인 단순한 웃음 뒤에 개입하는 어떤 사유나 감정의 농도에 의해 발생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희극적 작품을 읽으며 그 웃음의 편차를 가리고 가늠해 나가는 작업은 곧 작가가 어떤 웃음의 효과를 유발시켰는가를 밝히고 그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를 캐내는 과정이라 할 수 있는데, 저는 김유정 문학에 대해서도 그러한 접근이 반드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때야 비로소 김유정 문학의 감춰져 있던 가치들이 한층 풍요롭게 드러날 테니까요.
길게 이야기할 자리가 아니므로, 저는 두 개의 작품만을 간략히 언급하고자 합니다. 그 하나는「솥」이란 작품으로, 들병이에 빠져 아내를 버리고 도망치려는 어수룩한 남자를 희화화하며 진행되던 이 이야기 속에서, 그 들병이의 본 남편이 갑자기 등장하여 “꿈이어야 할 텐데 꿈은 아니니” 현실은 현실이지만 악몽이나 다름없는 사태가 펼쳐지리라 예감되는 그 순간, 그러나 전혀 뜻밖의 상황이 연출됩니다. 들병이와 그 남편이 보여주는, 어떤 현실적 개연성도 부여받지 못할 행동들은 무슨 ‘블랙 코미디’처럼 우리를 단숨에 너무도 부조리한 상황으로 몰고 가며 그 부조리가 빚어내는 웃음, 이를테면 어이없는 웃음, 기막힌 웃음, 쓰디쓴 웃음을 터뜨리게 만듭니다. 그 연장선에서, 서울 산기슭의 셋방 집에 모여 있는 ‘따라지’들이 얽히고설키는「따라지」는 좀 더 조직화된, 거의 이오네스코를 연상시키는 부조리극 그 자체라 할 만합니다(작품 속에도 “재미스런 연극”이란 표현이 나옵니다). 마구잡이 싸움이 벌어지다 갑자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적막이 쳐지는 장면 속에서 우리를 사로잡는 웃음은 너무도 괴상한, 그로테스크한 웃음이기까지 합니다.
김유정 소설의 인물들은 대개의 희극적 인물들이 그렇듯 “걸쌈스러운 탐욕”(「떡」) 즉 편집증적인 욕망과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작품에서 그들은 자주 격렬히 싸우는데, 김유정 문학의 독특한 면모 중의 하나는 그 싸움이 언제나 원점으로, 무(無)로 환원된다는 것입니다. 그 싸움은 어떤 새로운 결과도 낳지 못합니다. 변화시키고 싶어도 끝내 변화하지 않는 삶의 저 지독한 부조리성! 그의 인물들 상당수는 현실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이미 분해된 관계 속에 들떠 있는 떠돌이들입니다. 그리고 그 떠돌이들은 서서히 근대화의 상징인 도시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도시에서도 ‘따라지’일 뿐이며 그들이 살아내는 현실도 근대적 합리성의 이상과는 너무 먼 혼돈의 상황에 불과합니다. 참으로 신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식민지 통치로 인한 유사 근대화를 겪으며 그 사회를 관찰했을 따름인데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삶의 양태마저 이미 예언하고 있는 듯이 우리의 의식의 깊은 곳을 찌르고 드니까 말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는 동시대의 또 하나의 불행한 천재였던 이상과 동전의 앞뒤와 같은 ‘짝패’를 이룹니다. 김유정이 그리는 그 웃음들의 뒷면에 침잠해, 이상은 희극적 인물들의 비극성을 파고들어 갔습니다. 희극적인 것과 비극적인 것은 원래 원천적으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 둘의 차이는 단지 무엇을 어떻게 보여주느냐 하는 시선의 차이일 뿐입니다. 요컨대, 그렇듯 둘이면서 하나이며 하나이면서 둘인 관계 속에 놓인 이 두 작가는, 그들의 다르면서도 흡사한 삶의 운명에 상응하는(‘구인회’를 통해 접속된 그들은 서른도 안 되는 나이로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들만의 흡사하면서도 다른 문학적 추구를 통해, 계몽주의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어 지금 우리 시대의 ‘현대적’ 삶까지도 통찰케 하는 새로운 미학의 선구자들로 우뚝 섰던 것입니다.
……끝으로 짤막하게 제 이야기를 덧붙이겠습니다. 이쯤에서 고백하는바, 저는 대학에서 프랑스 희극을 전공하고 웃음에 대해 강의를 해왔던 사람입니다. 제 소설만 읽은 어떤 이들은 간혹 이상하다는 듯이 제게 묻곤 했습니다. 그렇게 암담한 소설을 쓰는 사람이 어떻게 웃음을 전공했냐고요. 조금 더 저를 아는 어떤 이들은 이런 말을 건네기도 했습니다. 그런 암담한 속에도 웃음을 틈틈이 끼워 넣는 게 너다운 모습 같다고요. 글쎄요, 실은 끼워 넣는 게 아닙니다. 견디고 견딘다는 의식에 시달리다 보면, 웃음은 저 스스로 단말마적으로 터져 나옵니다. 그나마 그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요. 왜냐하면, 아무리 암울한 웃음이더라도, 웃음이란 것은 어쨌든 절망의 벽에 숨구멍을 내는 마지막 힘인 까닭입니다. 그 안간 힘이 이 삶을 끝끝내 응시하게 하며 한 걸음이라도 더 내딛게 하고 한 줄의 글이라도 더 쓰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 소설들은 어쩌면 오래 전에 김유정이 웃음 뒷면에 드리워 놓은 깊은 그늘 속에서 은밀히 서식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토록 김유정 문학을 재음미하며 저 자신을 되돌아볼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 그리고 애초에 이 상을 제정한 김유정기념사업회에 거듭 감사드립니다.

– 2013년 5월 25일, 춘천 ‘김유정 문학촌’에서.

 

  • 김태동

    “아무리 암울한 웃음이더라도, 웃음이란 것은 어쨌든 절망의 벽에 숨구멍을 내는 마지막 힘”… 선생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수상식에 참석못하여 너무 죄송하고요,,, 김태동 드림

  • 류예지

    저도 축하드립니다, 선생님. 먼발치에서나마 선생님을 언제나 응원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