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놀이, 놀이의 심연

존재의 놀이, 놀이의 심연

Adrien_Mondot

— ‘아드리앙 엠 / 클레르 베 공연단’의 『시네마티크』

금년도 ‘서울 국제 공연 예술제’에 초대된 ‘앙드리앙 엠 / 클레르 베 공연단(Compagnie Adrien M / Claire B)’의『시네마티크(Cinématique)』라는 작품을 보고나자, 나는 그것에 대해 뭔가를 말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혔다. 연극, 곡예, 무용, 디지털 미디어 아트 등이 자유롭게 뒤섞인 이 작품은 물론, 장르 파괴적인 혹은 장르 혼성적인 최근의 공연 경향을 잘 대변하는 하나의 예였다. 그러나 이 작품의 진정한 충격은 무엇보다, 그 새로운 실험에 단순한 방법론적 실험 이상의 근원적인 존재 이유가 내재해 있다는 어떤 엄연한 느낌이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데 있었다. 새로운 매체의 활용은 말초적 자극이나 신기함의 수준을 훌쩍 넘어 내 “전감각의 조직적 착란”(랭보)을 일으키며, 그것을 통해 깊고 어두운 내 머릿속 우물로부터 색다른 시적 공감을 길어 올리는 듯했다. 도대체 이런 미학적 체험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연극을 좀 공부하기는 했지만 무용이나 미디어 아트 등에 문외한인 나에겐 그쪽의 전문적인 접근로를 이용해 이 작품을 논할 자격도 능력도 없다. 그러니 이 공연의 기법이나 기술과 관련된 해석은 그쪽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나중에 한 수 배우도록 하겠다. 그 대신 나는, 무슨 매체에 의존하든 모든 예술적 효과를 창출하는 힘의 원천, 즉 이미지의 조직과 운동, 이미지의 서사를 재구성해 보는 방식으로 이 작품의 이해에 참여하고 싶다. 이것이 고루한 문학 쪽에서 그나마 잘 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마침, 이 작품의 제목은『시네마티크』이다. 이 프랑스어 어휘의 사전적 의미는 명사로서의 ‘운동학’과 형용사로서의 ‘운동학적인’이다. 하지만 ‘시네마’라는 세 음절이 겹쳐져 있기 때문에, 이 단어는 동시에 ‘영화적인’이란 암시적 의미를 환기시킨다. 사실 우리의 머릿속에서, ‘운동(학)적인’ 것은 ‘영화적인’ 것과 겹쳐 있다. 영화는 모든 운동, 움직임을 이미지들의 연속체로 구성하는 예술 장르이다. 실제로 이 작품은 컴퓨터 그래픽과 스크린 이미지 프로세스 등을 동원한 다양한 영화적 효과를 구사한다. 거의 입체(3D) 영화에 가까운 그 착시 현상이 무대 위 인물들의 움직임의 입체성과 빈틈없이 맞물려 돌아가면서 우리를 때로는 환상적이고 때로는 우주적인 공간으로 이끌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공간에서 과연 어떤 이미지-사건이 벌어졌던 것인가?
공연단의 공식 웹 사이트(www.am-cb.net)가 이 작품을 짧게 소개하는 처음 두 문장은 이렇다.

“여행과 몽상과 놀이로의 초대. 각자가 유년기로부터 제 안에 간직하고 있는 이 꿈의 영역은 매순간 다시 치솟아 오를 수 있고 우리의 현대적 실존을 이끄는 이성적 원칙들을 뒤집으러 올 수 있다.”

솔직히, 첫 문장은 하나마나한 소리다. 상상적 세계로의 여행, 비현실적이거나 반현실적 몽상, 무상의 놀이—이런 것들은 장르 불문하고 허다한 작품들에 적용될 수 있는, 모든 현대예술의 공통적 성질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적 뉘앙스를 풍기는 둘째 문장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여기엔 이 작품의 작가—굳이 ‘작가’라고 적는 이유는 나중에 이야기되리라—가 상대적으로 강조하고픈 뭔가가 희미하게 드러난다. 한마디로, 그는 인간적 실존 자체를 이성과의 관계 속에서 문제 삼고 있다. 이런 진술 역시 전혀 새롭지 않다 하더라도, 여기서 중요한 점은 아드리앙 몽도(Adrien Mondot)라는 작가(구성·연출·연기)가 이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자기만의 실존적 형태로 형상화했느냐는 것이다.
약 75분간 쉼 없이 진행되는 이 공연은 대략 8개 정도의 단락(시퀀스)으로 분절해 볼 수 있다. 맨 처음과 맨 끝은 일종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해당하고, 그 사이의 6개 단락에서는 어떤 방랑적, 몽환적, 유희적 이미지들의 운동 여정이 단계적으로, 발전적으로 전개된다. 그 각각의 단계란 어떤 중심 이미지를 축으로 한 기초 주제와 변주가 시각적으로 연주되는 단위라 할 수 있다. 한 단락으로부터 다음 단락으로의 발전은 앞선 이미지-군(群)이 해체·재구성되면서 새로운 중심 이미지가 등장하는 것을 뜻하는데, 이 이동은 주로 ‘암전’ 기법으로 제시되지만, 그렇다고 그 경계가 매번 명료한 것은 아니다. 한 이미지-군과 다음 이미지-군 사이의 중첩이 또한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다. 그건 마치 계절과 계절 사이의 경계가, 한 인생의 변모의 단계가 모호한 것과 마찬가지니까.
이제 나는 그 모호한 이미지들의 운동을, 운동하는 이미지들을 가급적 간략하면서도 체계적으로 추적해보고자 한다. “이성적 원칙들을 뒤집으러” 온 이 작품을 체계적으로 논한다는 것은 어쩌면 모순일 것이다. 그러나 비이성적 꿈에도 꿈 자체의 또 다른 논리는 있을 터이므로, 나는 그 희미한 윤곽이나마 내 식으로 드러낼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또 다른 꿈, 그것도 헛된 꿈이 될지 모르겠다. 더구나 나는 한 가지 명백한 한계를 안고 출발한다. 내 추적이 거의 시각적 이미지들에 한정되리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청각적 이미지들이 배제된다는 점이다.
음악과 음향 효과를 설명할 소질이 전무한 나는, 공연 한 번, 디브이디 한 번을 보는 동안, 허공을 가로지르는 소리들을 그저 한쪽 귀에서 다른 한쪽 귀로 흘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프랑스 언론의 공연평들 중에는, “소리를 잊지 말라”(『르 도피네 리베레』)거나 “소리의 세계는 결코 덜 중요하지 않다”(『라 데페슈』)는 특별한 언급들이 있으니 난감한 일이다. 지금 내게 남아있는 인상은, 그 소리들이 지속적으로 불안을 자아내고 있다는 것 정도다. 아마도, 나지막하게 단속적으로 뒤통수를 두들기는 듯한 리듬과 가냘픈 금속성의 전자 음향 멜로디가 고조되었다가 가라앉았다 하며 끝없이 이어졌던 것 같다. 그 소리가 때로 이상한 동화 속 요정이 춤추거나 우주의 유성이 흐르는 듯한 느낌을 낼 때도,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중간에 잠깐, 그리고 끝부분에서 얼마동안, 아주 서정적인 건반악기 소리는 예외였지만, 그것도 불안의 소리에 묻혔다. 내 무지한 귀가 포착한 항구적 불안감, 그것이 행여 이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정조일까?

이미지에 앞서, 이미지를 형상화해 나갈 무대와 등장인물을 먼저 묘사해 보자.
미니멀리즘을 실천하기라도 하는 양, 무대는 한 쪽에 검은 가방 하나가 놓여 있을 뿐, 텅 비어 있다. 하얀 사각형의 수평면(바닥)과 하얀 사각형의 수직면(배면)이 전부인 무대. 그 공간에서의 물적 변화는 가방이 얼마 후 탁자로 바뀐다는 게 유일하다. 물론 컴퓨터 그래픽이 투사되어 그 공간에 다양한 동영상을 그려갈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려졌다 지워질 수밖에 없는, 말 그대로의 ‘가상 현실’을 꿈이나 환상처럼 제시하는 것이지 물적 실체가 아니다. 시작처럼 끝에서도, 무대는 텅 비워질 것이다.
이 무대에 두 인물이 등장한다. 추레한 검은 의상을 걸친 남자와 여자. 남자는 우두커니 공놀이 곡예를 하고, 뒤이어 춤추는 듯한 몸짓으로 나타나는 여자는 가방 속의 기구를 조작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도대체 누구일까? 공연이 끝날 때까지 그들에 대해 알려주는 어떤 정보도 제공되지 않는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남자는 거의 마술에 가까운 고도의 공놀이 기술을 보여주고, 여자는 춤을 잘 춘다는 것이다. 마치 서커스단의 곡예사와 댄서처럼. 추레한 의상으로 봐서, 가난한 유랑 서커스단 정도겠지만 말이다.
간(間)-텍스트적 유추를 동원하자면, 이 두 요소는 거의 베케트(Beckett)의『고도를 기다리며』를 연상시킨다. 기억해 보라, 메마른 나무 한 그루만 놓인 텅 빈 무대와 초라한 검은 의상에 떠돌이 광대를 떠올리게 하던 두 남자를. 솔직히 말해, 나는 이 공연의 처음 10분이 지나면서, 이 작품과『고도』를 포개 놓고 있었다(실명인지 예명인지 모르겠지만, 작가의 이름 ‘몽도’도 왠지 ‘고도’와 겹쳐진다—Mondot / Godot)(a). 이 작품이 은연중『고도』를 모방했다는 뜻이 아니다. 어쩌면 영감을 받았을 수는 있으나, 이 작품이 제시하는 것은 전혀 다른 예술적 실존의 형태이다. 나는 다만, 이 두 작가가 근본적으로 흡사한 세계관·인간관을 공유하고 있는 것 같다는 직감을 받았고, 그것이 이 작품을 이해하는 나침반 역할을 해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결론을 미리 암시하는 것 같지만,『르 몽드』지의 공연평은 내 생각을 뒷받침한다. 거기엔 이 작품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한 19세기 저술가의 “마술사는 마술사의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다”라는 말을 인용되고 있는 바, 그 말을 확장하자면 인간은 인간의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가 되는데, 그것은 바로 베케트의 인간관이기도 하다. 굳이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온 세계가 무대요, 모든 남자와 여자는 배우다”라는 세익스피어(Shakespeare)가 있었다. 내가 파악하기엔, 아드리앙 몽도도 동일한 세계관·인간관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존재 이유를 찾으려 아무리 현란한 가상의 세계를 그려내고 헤매 봐도 결국 세계는 텅 빈 무대이고, 인간은 덧없이 스쳐가는 배우에 불과하다는 것.
그래도 어쨌든 배우가 무대 위에서 공연하는 동안의, 인간이 세계를 살아가는 동안의 몸과 마음의 움직임은 어떤 상황 속에 실존한다. 그 실존 방식에서『고도』와 흥미롭게 대비되는 점은,『고도』의 두 짝패가 오로지 제 자리에서 기다림의 늪에 빠져 있다면, 여기서의 두 짝패는 주어진 상황 밖의 어딘가로 떠나려는, 무엇인가를 찾아가려는 강한 충동에 휩싸여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한편으론『고도』가 대사에 의존한 연극이고 후자가 몸짓에 의존한 무언극+무용이라는 표현 양식상의 차이와 관계되겠지만, 다른 한편으론 전자에서 남자 대 남자의 관계로 펼쳐지는 우정의 심리학이 후자에선 남자 대 여자의 사랑의 심리학으로 대체되어 있다는 인물 구도의 차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남녀의 사랑은 안간힘을 쓰게 만든다. 비록 세계의 의미를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그리고 안간힘을 쓴 만큼 끝이 더 허망하더라도……

『시네마티크』의 이미지 서사 과정에 대해 우선적으로 지적해두어야 할 사항은, 최초에 얼마 동안 바닥에 그려지던 자연적 이미지들이 어느 순간부터 추상적 이미지로 전환된다는 것이다. 손, 자갈, 물결과 같은 최초의 이미지들은 어떤 계기에 컴퓨터 그래픽으로 직선과 곡선의 윤곽만을 제시하는 가상적 이미지의 세계로 흡수된다. 더불어 유채색은 사라지고 무채색의 공간만이 남는다. 마치 현실에서 흑백의 꿈속으로 들어가듯이. 그것은 동시에 아날로그 세계에서 디지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기도 하다. 꿈은 이미 하나의 가상공간이다. 그러나 꿈이 아날로그 세계 내의 가상공간에 머문다면, 디지털 세계의 추상적 형체들은 아날로그적 꿈보다 더 깊은 심연에 존재하는 무정형의 가상공간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이처럼 “디지털 질료 속의 감각적 여행”(『리베라시옹』)을 이끄는 이 작품에서 우리의 감각을 낚아채는 첫 번째 이미지는 동그라미다. 첫 장면에서 남자가 무료하게 공놀이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며, 여자가 역시 무료한 몸짓으로 가방 속의 디지털 기계를 조작해 장난치듯 남자의 발밑에 동그라미를 둘러칠 때, 우리는 남자의 존재가 그 원 속에 갇힌 것 같은 느낌, 그 동그라미에 의해 조건 지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러고 보면 남자는 작은 공—공도 동그랗다— 세 개를 계속 돌리며 허공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었다. 그가 공놀이(저글링) 곡예사라는 우리 짐작이 맞다면, 동그라미는 그의 존재 이유와 존재 의미를 표상하는 상징인 셈이다. 그런데 그가 발 디디고 있는 동그라미는 너무 작다. 과연 그토록 한 자리에서 좁게 살아야만 한단 말인가? 그것이 정말 존재 이유와 의미이기는 할까?
놀이의 역할이 바뀌자, 이번엔 남자가 자신의 발밑에 그려졌던 동그라미의 변형체인양 여자의 발밑에 조약돌들을 놓아준다. 그 조약돌들은 영상으로 확대돼 무슨 징검다리처럼 배치되고, 댄서인 여자는 돌과 돌 사이를 건너다니며 춤추듯 움직인다. 마치 그 돌들이 삶을 춤추며 더 넓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해주는 디딤대라도 되는 듯이. 이 돌들은, 어느 틈엔가 돌 밑의 바닥이 발을 헛디디면 빠질 물로 변하면서, 물의 유동성과 명확히 대비되는 견고성-고체성의 구체화된 이미지로 제시된다. 이것은 아마도, 그들이 이 불확실한(유동적인) 세계에서 확실한(견고한) 존재 의미를 디디며 삶을 이어갈 어떤 징검다리 길을 만들고 싶어 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그 징검다리도 물도 그저 그들이 기계를 조작해 그려낸 허상은 아닌가? 그렇다면 존재 이유나 의미라는 것도 애당초 없는 것이 아닐까?
과연, 남자가 또 무료해졌다는 듯 징검다리를 치워버리는 순간 여자는 물 위에 쓰러지지만, 그렇다고 물속에 빠지지도 않는다. 물속이란 없었고, 물의 영상이 투사된 단면의 바닥만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세상은 그저 무(無), 캄캄한 잠의 세계와 다름없다. 그럼에도, 아니, 그래서, 여자는 잠의 검은 바닥에 쓰러져 격렬하게 몸부림친다. 잠속에서도 잠들지 못하는 그녀의 고통스런 움직임이 어둠 위에 어둠의 파문을 번지게 한다. 그것은 이 무의미한 어둠의 세계에 대한 실존적 의식의 고뇌를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다음 장면은 일단, 그들 실존의 밑바닥에 펼쳐져 있던 물의 이미지가 실은 흔들리는 자의식의 거울에 다름아니었다는 것을 아름다우면서도 불안하게 보여준다. 여자의 몸짓과 춤이 물의 거울에 반영되는 게 아름답다고 느끼면서도 묘한 불안감에 젖는 까닭은, 여자의 몸놀림과 물에 비춰진 그 그림자 영상 사이에 자꾸 분열적 간극이 생기기 때문이다. 몸놀림의 형상이 흔들리는 물결에 의해 이지러지기도 하고, 심지어 그녀의 몸짓(실존적 실체)과 그림자의 몸짓(반성적 의미) 사이에 시차가 벌어져, 둘은 완전히 따로 놀기조차 한다. 요컨대, 그들은 자신의 삶에 정확히 1:1로 대응하는 확고한 의미를 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의식의 그림자들이 실존의 여정을 이어갈 수 있게 해주는 견고한 징검다리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비추는 거울은 물이 아니라 얼음 즉 유리와 같이 단단한 것이어야 한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이 장면이 진행되는 동안, 남자는 물 위에 놓인 탁자에 검은 선그라스를 끼고 묵묵히 앉아 있다. 시야를 닫고 골똘히 무엇인가를 구상하는 모습으로. 그러다가, 마침내 그 구상을 끝낸 것인지, 남자가 쿵 바닥으로 내려선다. 동시에, 바닥은 얼음처럼 희게 얼어붙는가싶더니 다시 작은 사각형 조각들로 부서지고, 부서진 조각들이 다시 검은 물결을 타고 출렁이기도 한다. 남자는 필경 그 물의 바닥을 견고하게 얼려 굳혀보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계가 애당초 무(無)에 불과하다면, 그들이 발 디딜 바닥이 그저 고체성의 얼음-유리가 되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얼음의 거울이 된들 세계의 의미 없음만이 더욱 여실히, 새하얗게 비춰질 터이므로. 게다가 얼음-유리는 깨지기 쉽고, 깨지는 즉시 어둠의 심연이 노출된다. 그러면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있는가?
바로 여기가, 아날로그 영상이 디지털 영상으로 바뀌는, 이 작품의 중요한 내적 전환이 이루어지는 자리다. 밑의 어둠과 사각형의 얼음 조각들은 어느 순간, 검은 바닥에 흰 빛의 디지털 선들이 가로 세로로 얽혀 촘촘한 사각형 문양을 짜나간 어떤 그물망이 되어 무대 가득 펼쳐진다(동시에 흑색/백색의 대비만이 남는데, 이 단계에서 그것은 유동성/견고성의 대비를 연장시킨다). 이 장면을 두고, 그들이 결국 아날로그적 거울의 기능을 확고하게 대신할 무엇, 차라리 가상이더라도 그들의 의식이 영속적으로 몸담고 실존할 수 있는 어떤 대체적 의미 공간, 의미체계가 필요함을 인식하고 만들어내기 시작했음을 뜻한다고 해석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적어도 나는, 그런 해석을 통해 이 작품에 내 식의 어떤 일관된 맥락을 부여할 수는 있다고 본다. 그것은 이제 가상세계에서의 새로운 실존적 여정이 개시된다는 뜻이 아닐까?
곧 깨닫게 되지만, 그 여정도 순탄치는 않다. 처음엔 너무도 안정적이어서 그들이 신기한 듯 이리저리 디뎌보는 바닥이, 시간이 흐르며 삐죽삐죽 솟아오르기도 하고 밑이 꺼지며 크고 작은 어둠의 구멍들이 계속 파여 그것을 피하기 바쁠 지경이다(이 단계에서 백색의 견고성은 다시 흔들린다). 그러나 뒤에는 어둠의 낭떠러지가 버티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곳에 발을 디딘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어둠의 구멍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또 한편으론 그 가상공간 안에 더 정교한 의미 체계와 형상을 새로이 구축하면서. 디지털 그물망의 선들은 바닥에서 일어나 점점 더 입체적인 세계의 윤곽을 그려나가고, 그들은 그 안을 질주하기 시작한다. 그들이 가로질러 가는 것은 동굴 속 같기도 하고—혹시 플라톤의 동굴을 암시하는 걸까— 거대한 도시의 건축물들 같기도 하며 우주 공간 같기도 하다. 그들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그들이 위 장면의 끝에서 뛰어든 곳은 하얀 나락이다. 여기서 잠시 아날로그적 이미지들이 되살아나는데, 다시 바닥이 물결처럼 흔들리자 그들은 한쪽에 여전히 놓여있던 탁자—남자가 이 모든 것을 구상했던 사유의 자리—를 뒤집어 뗏목처럼 그 위에 올라탄다. 물결은 얼었다가 깨졌다가 다시 언다. 그리고 탁자는 얼음 위에서 썰매가 되었다가 멈춰 선다. 세상이 완벽하게 얼어붙은 듯이, 우여곡절 끝에 백색의 견고성이 완성된 듯이…… 그러나(!), 그럼으로써 무엇이 남았는가? 그들의 존재 의미는 충족되었는가? 뒤집어진 탁자 속에서 멍하니 몸담고 있던 남자가 맨 처음처럼 공놀이를 시작한다. 그의 공놀이 솜씨는 너무도 마술적이어서 거의 초현실적으로 보이지만, 여전히 무료하고 공허하기 이를 데 없다. 가상공간을 가로질러 거의 초현실적인 세계에 이르러도,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될 뿐인가?
이어지는 장면은, 저 앞에서 여자가 어둠의 잠속에서 몸부림치던 장면과 겹쳐지면서도 차별화된다. 이번의 그녀는 가상세계 속에서 잠든 듯, 캄캄한 공간 바닥에 그어진 디지털 빛 선 위에 엎어져 꿈틀대며 그 빛의 선들을 흩트리고 분해시킨다. 선들은 작게 잘라지고 때론 점으로 화하며 허공으로 떠오른다. 빛의 분수가 솟구쳐 불꽃놀이처럼 퍼진다. 빛의 선들이 가상의 의미 그물을 짜는 기본 질료였다면, 그 의미 체계에서 이탈한 빛 쪼가리들이 허공에 퍼져 흐르고 있는 것이다. 아무 의미도 없는 원초적 혼돈의 우주처럼, 혼돈이 그냥 덧없이 신비하고 아름다운 우주처럼. 그처럼 허구적 의미의 해체가 역설적으로 존재의 발산이 될 때 마지막 무상한 아름다움이 피어나는 것인가?
그녀의 두 번의 몸부림은 아날로그 세계든 디지털 세계든 그것들이 결국 무의미한 허상임을 증언하는 듯한데, 이 작품의 중요한 전언 중의 하나는 그 두 세계의 근거가 공히 일종의 인위적 기호체계라는 것이다. 암전을 거쳐, 클라이막스라고 이를 만한 부분에서 빛 쪼가리들은 언어라는 기호의 파편들로 치환된다. 쥐불놀이처럼 두 인물이 휘두르는 말의 불덩어리들이 서로를 뒤섞기도 하고 분리시키기도 한다. 거대한 장벽이 되었다가 허물어지는 말들은 저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공룡으로 보이다가 인물들의 등에 지워진 무거운 괴물스런 짐 덩어리로 보이기도 한다. 말은 더 이상 말이 아니다. 말도, 모든 기호들도 그저 몸부림일 뿐인가?
흩어져 널린 말들을 거두고, 그들은 최초의 텅 빈 무대로 돌아온다. 아니다. 그들은 애초부터 그곳을 한 치도 떠난 적이 없었다. 그들이 있던 그 자리에 허구의 세계를 그려보았을 따름이다. 거기서, 그들은 다시 공놀이를 한다. 이 마지막 놀이는 그러나 단 한 개의 커다랗고 투명한 공만 가지고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매우 특이하다. 조금 전 장면이 바뀌던 영상을 떠올리자면, 그 공은 언어의 둥근 불덩어리를 벼르고 별러서 만든 공처럼 여겨진다. 공이 투명하다는 것은 언어가 불타 녹는 과정에서 의미가 제거되었다는 것, 즉 무의미 그 자체임을 암시한다. 이 점은, 이전엔 세 개의 공을 가지고 놀았다는 사실과의 대조와도 통한다. “3이라는 숫자는 어떤 닫친 총체를 구성하는 전형적인 세트의 한 형태이다”(장 벨맹-노엘). 다시 말해, 이 세계의 구성 체계를 분류하는 가장 기본적인 숫자다(나/너/그, 주체/객체/대상, 과거/현재/미래 등등). 그런데 그런 분류—분류가 의미를 만든다—가 사라진 전체로서의 하나만이 남은 것이다. 그들이 그 의미 없는 전체를 살아갈 수 있을까?
이와 관련해, 앞에선 남자 혼자 하던 공놀이를 여기선 남자와 여자가 함께 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주목을 요한다. 두 사람은 수저를 겹쳐 놓은 것처럼 합체된 자세로, 한 몸에서 뻗쳐 나온듯한 네 개의 팔로, 마치 허공에 떠 있는 듯이 보이는 공을 유희한다. 그리고 공을 몸에 달고 다니듯이 움직이며 서로의 에로틱한 몸짓을 얽어나가는데, 가히 둘은 사랑을 나누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들의 가상 여행은 아무런 삶의 의미도 구해내지 못했지만, 그 여행을 함께 하며 사랑을 얻은 것이다. 궁극적으로 무의미한 세계에서의 사랑, 그것이 존재론적 구원이 될 수 있을까? 그러나 이 작품의 종결은 왠지 불길하다.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고 여전히 얽혀 있는 몸을 어둠의 바닥에 눕힐 때, 한 방의 총성이 울리며 이 작품은 끝난다. 그들은 결국 죽음을 택했단 말인가?
그런 듯 아닌 듯 끝은 모호하지만, 상상적 무대 속의 그들이 죽었다 한들 객석의 우리가 착잡하게 살아있는 한, 그 모호함은 오히려 정당한 것이 아닐까?……

굳이 어떤 결론을 따로 말할 필요는 없으리라. 공연은 처음부터 끝까지 꿈처럼, 놀이처럼 흘러간다. 얼핏 그것은 무상의 꿈, 무위의 놀이를 지향하는 듯이 보인다. 반복되는 공놀이가 환기하는 것도 그것이다. 생각해보라, 그저 허공에 공을 빙글빙글 돌릴 뿐인 그 행위를. 그러나 어느 틈에 그 무상은 악몽스러워지고, 그 무위는 심각해진다. 어느 틈에 관객의 마음마저 변화시키는 그 무엇, 나는 거기에 이 작품을 만든 작가의 작가 의식이 담겨 있다고 본다. 작가는 무상과 무위의 끝자리와 마주치는 것을 회피하지 않지만 또한 거기에 맹목적으로 함몰되지도 않는다. 그는 그 과정을 미적 형태로 빚어내 객체화시키면서, 그것들과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며 마주선다.
그 창조적이며 성찰적인 작업은 치밀하기 이를 데 없다. 그가 획득해나가는 세계와 인간에 대한 인식은 무대, 배우, 표현 매체의 본질에 대한 이해와 정교하게 맞물리며 역동적인 장경들을 구성해 나간다. 무엇보다도 작가의 예술가적 자의식(b)이 투영된 미학적 방법이 고스란히 그 표현 내용과 한 몸을 이룬다는 점에서(가령 디지털 입체 영상을 사용하지만 현란한 유채색 대신 흑백의 대조법만을 사용하는 경우가 그렇다), 이 작품은 새로운 문화 시대의 새로운 디지털 매체 예술이 그 나름의 ‘작가주의’를 어떻게 구현하는지 보여주는 한 표본으로 꼽혀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주석]
a) 그냥 지나가는 이야기지만, 고도라는 이름은 신이라는 영어 단어(god)와 찰리 채플린의 프랑스어 식 애칭인 샤를로(Charlot)의 합성 조어라는 설이 있다. 내 몽상 속에서, 몽도라는 이름은 세상이라는 프랑스 단어(monde)와 샤를로의 합성 조어로 연상된다.
b) 작가는 작가로서의 자의식의 일단을 작품 속에서 메타적 표현으로 환기시키고 있다. 맨 첫 장면에서 바닥에 투영된 손의 영상이 무엇인가를 그리는 것이나 여자가 어둠의 바닥에서 몸부림 칠 때 그 몸 아래 어둠이 잉크를 떠올리는 영상으로 번져나가는 것이 그렇다. 책을 쓰는 작가가 손으로 글을 쓰듯이 공연 작가는 어떤 시청각적 형상을 그리는 존재다. 종이 위에 펜으로 글을 쓰는 대신, 무대 위에 몸으로 어떤 구체적 이미지들을 써나가는 것이다.

[『F』3집, 2011.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