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칼럼] 내가 배운 것 | 손보미 |

[4월의 칼럼] 내가 배운 것 | 손보미 |

shonbom수학을 지독히도 싫어한 건, 초등학교 때부터니, 그 역사도 참 길다. 분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 탓에 아빠가 나를 붙잡고 앉아 분수에 대해 설명하고, 설명하고, 설명하고, 또 설명했다. 우리 아빠는 손 글씨를 아주 예쁘게 쓰고, 자가 없어도 선을 똑바로 그을 수 있고, 콤파스가 없어도 원을 동그랗게 그리는 사람이다. 신문지 모서리(왜 하필이면 신문지였는지 모르겠다. 공책이 없었나?)에 파란색 볼펜으로 동그랗게 원을 그린 아빠는 “자, 이게 1이라고 치면 말이야.” 라고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그게 왜 1인지 전혀 파악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1은 숫자인데, 왜 동그라미가 1인가 말인가? 나중에는 사과를 가지고 와서 사과 하나(그리고 아빠의 소리 지름), 그리고 그걸 네 개로 자르면(그리고 엄마의 한숨) 어쩌고 저쩌고의 과정(그리고 나의 울음)을 거쳐서 나는 분수라는 개념을 겨우 겨우 깨달았다. 과학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고등학교 때 나는 물리를 지독히도 싫어했는데, 그런 나를 아빠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도대체 물리를 왜 배우는지 모르겠다는 나에게 아빠는 물리가 “이 세계 모든 사물의 이치에 대한 학문”이라고 항상 말하곤 했다. 하지만, 도르래의 힘을 계산하고, 속도와 시간 따위를 계산하고, 밀도를 따지는 게 도대체 어떤 측면에서 사물의 이치란 말인가? 속도가 사물인가? 힘의 방향이 사물인가? 도대체 왜? 국문과에 진학하고 나서야 나는 수학과 과학에서 해방되었고 그건 정말 좋은 일이었다.

이런 내가 몇 년 전부터 과학에 관심을 조금, 정말 조금 가지게 되었다. 웃기지만 미국 드라마「로스트」때문이었다. 현대 물리학에 대해 알고 있으면 그 드라마를 좀 더 재미있게 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그때부터 디씨인사이드 로스트 갤러리의 ‘횽’들이 올린 충고들을 바탕으로 이런 저런 책을 찾아가며 ‘공부’하기 시작했다. 물론 내게는 너무 어려웠다. 하지만 생각만큼 지루하지 않았다. 내가 생각한 ‘물리’와는 사뭇 다르기도 했다. 뭔가 더 말랑말랑한 느낌? 사실 아직도 내게는 일반 상대성 이론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다. 물리학 입문자를 위한 책을 몇 권이나 보고 쉽게 만든 물리학 관련 다큐멘터리를 몇 편이나 본 후에야 나는 비교적 최근에 물리학이나 수학에서 ‘우아하다’라는 표현을 왜 쓰는지 대충 감을 잡게 되었다. 때로 어떤 책들은 색깔 볼펜을 들고 열심히 줄을 긋고 노트 정리를 하면서 읽기도 한다. 그런데 한참 그렇게 하다 보면 대개 드는 생각은 “도대체 왜 내가 이런 걸 하고 있나?” 라는 것이다. 어차피 이렇게 해봤자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할 텐데, 혹은 지금 이해한다고 해도 결국은 다 잊어버릴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겠나. 내가 이 모양 이 꼴인 것을.

그래도 가끔씩, 아주 가끔씩 까무러치게 즐거운 경험을 할 때도 있다. 왜 그렇게 수학자나 과학자들이 방정식에 집착하는가?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수식으로 환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런 것들에 대해 내 자신이 처음 생각하게 되었을 때, 정말 별것도 아니지만 혼자 엄청 즐거웠다. 내가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방식들로 세계를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정말 신기했다. 그러니까 결국 내가 이 학문들에서 배우는 것은 그러한 것들이다. 세계를 바라보는 또 다른, 그렇지만 결국은 연결되고야 마는 각양각색의 방식들 말이다. 최근에 에른스트 페터 피셔의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읽었다. 역시 내게는 너무 어려워서 ‘도대체 이걸 내가 왜 읽고 있나?’라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다. 포기할까 했지만 결국 억지로 끝까지 읽었다. 그렇지만 역시 이 안에서도 까무러치게 즐거운 순간을 만났다. ‘밤은 왜 어두운가?’를 다룬「올베르스의 역설」이라는 챕터 덕분이었다.

홈볼트에 따르면 공간을 향한 모든 시선은 또한 동시에 시간을 향한 시선이기도 하다. 하늘 있는 별을 볼 때, 우리는 그것의 현재 모습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눈에 도달한 빛이 별을 출발할 때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중략) 하지만 우리의 관심은 반짝이는 별들이 아니라 그 뒤편에 자리잡은 검은 어둠이다. 그리고 이 어둠은 매우 오래전, 태곳적에 우주가 지녔던 모습을 바로 지금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키펜함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밤의 어둠은 우리에게 별들이 아주 오래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우주는 계속 팽창하고 있다고 말해준다. 우주의 그런 본질적인 특성을 관찰하는 일에 초대형 망원경이나 궤도 망원경이 전혀 필요치 않다는 사실이 놀랍다. 창문을 열고 밤하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족하니까.”

나를 묶어두는 것은 결국 이런 것이다. 그건 지식과 관련되거나 이론적인 그 무엇인가가 아니다. 그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경이’와 관련되어 있다. 정말이지 유치한 말이지만, 이제 내게 밤하늘은 전에 내가 알던 밤하늘과는 차원이 다른 ‘의미 있는’ 것이 되었다. 이를테면 내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이나 오래전의 그 하늘이 내게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 기분을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잘 설명할 수 없지만, 나는 그것이 ‘삶’과 연관되어 있다고 믿는다. 내게 다가오는 것들,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고, 다시 다가오는 것들. 그것이 대체 무엇인가? ‘과학’ 혹은 ‘물리학’이 결국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인가?『혁명이 다가온다』에서 지젝은 인간이 수많은 관절와 근육을 사용해 몸을 움직이는 현상을 과학적으로 해명하려고 든다면, 결국 그건 불가능할 거라고 말한 바 있다. 우리는 아무 의식 없이 걷지만, 그 걸음은 ‘불가능’이 어떤 식으로 ‘가능’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온몸으로 실현하며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어쩌면 바로 이런 것들이 바로 ‘과학‘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주위에 아주 당연하다고 싶은 것들도, 사실은 엄청난 ‘경이로움’과 관련이 되어있다는 것. 내가 두드리고 있는 이 컴퓨터의 자판이, 내가 앉아있는 이 의자가, 저기 밖에 흔들리고 있는 나뭇잎이 모두 그러한 불가능성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 그 경이로움과 불가능을 온몸으로 체화하며 살아가는 인간이란 존재는 어쩌면 설명이 불가능한 지점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이러한 것들이 내가 ‘과학’을 통해 배운 것들이다.

[소설가]

출생 1980년 / 데뷔  2011년 단편소설 ‘담요’ / 수상  2013년 제4회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2012년 제3회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대상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 2009년 21세기문학 단편소설 부문 신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