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이인성 형과의 선사시대 | 정과리 |

평론가랍시고 문단의 말석을 차고앉아 될 글 안 될 글 쓰며 살아온 지가 벌써 스물 한 해가 된다. 등단하던 해 누군가, 다른 문맥에서이긴 하지만, 나를 두고 “억세게 운이 좋은 사내”라는 평을 해준 적이 있다. 처음에는 당혹스러웠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나는 그 말이야말로 나를 가장 적절하게 평하는 말 중의 하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요컨대 나는 행복한 놈이고, 그 행복은 나의 노력 자체보다는 주변 사람들이 드리워준 후광에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의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내가 뛰어난 사람들을 스승과 선배와 친구와 동료로서 둘 수 있었다는 ‘치명적인’ 행운이 놓여 있다. 이 인연의 대부분은 내가 먼저 유혹했다기보다 그들 쪽에서 내게 정을 듬뿍 주어 나를 그들의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이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물론 나도 그들에게 먼저 찾아가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고, 오히려 정반대였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타고난 소심증과 결벽증은 결국 나를 그리운 사람들의 주변을 멀찍이 맴돌게만 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그들이 우연히 먼발치에서 서성이는 한 꾀죄죄한 친구를 발견하고는 ‘어이!’하고 손짓을 했던 것이다.
아니다. 이것도 일종의 유혹, ‘초연(超然)’을 가장한 유혹이었을 것이다. 과장적으로 콧대를 높인 유혹, 지독하게 이기적인 유혹이었을 것이다. 이인성 형을 만난 것도 거의 비슷한 경로를 밟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김현 선생님의 책을 읽으며 불문과를 택해야겠다는 결심을 서서히 굳혀가던 무렵이었다. 당시의 대학교는 계열별 모집을 해서 2학년 2학기에 전공을 선택하게 되어 있었다. 이 갑작스런 제도 개편에 유신체제를 굳혀가던 박정희 정권의 모종의 음험한 의도가 숨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내게는 그것도 행운으로 작용하였다.
고등학교 때 숫기없이 문학을 짝사랑하면서 내가 접할 수 있었던 한국문학은 교과서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문학과지성』, 『창작과비평』이라는 계간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리고 그 안에 전혀 새로운 문학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대학생이 되고 난 후였다. 유치환 서정주를 넘어서 김수영 정현종의 시를 발견한 것도 그 때였고, 김승옥 이청준의 소설에 매료된 것도 그 때였으며, 김윤식 김현의 문학사를 처음 읽은 것도 그 시절이었다.
그러니까 계열 시절은 내게 말의 정확한 의미에서의 교양과정부의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그 문학의 신천지 안에서 『언어탐구』라는 동인지도 만났다. 250쪽 가량의 겉면을 노랗게 칠한 책이었다. 내가 갈급한 마음으로 그 책을 샀던 것은 300원이라는 당시 물가로도 꽤 저렴한 가격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 샛노란 표지의 미묘한 퇴폐성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독한 감기약을 먹었을 때 머리와 하늘 사이를 빙빙 돌며 올라가는 정신의 증발 현상 비슷한 것을 감지케 하는 표지를 열고 나는 이인성이라는 사람이 쓴 「정사」라는 희곡을 읽었다. 내 짧은 독서 경험 안에는 전혀 들어 있지 않았던 정황들, 의미를 종잡기 어려운 대화들, 의미의 모호성 때문에 그 형상이 더욱 격렬하게 부각되던 동작들, 혹은 사물화된 언어와 파열하는 사물의 정사. 그리고 전율, 정수리에서 심장으로 낙하하던 더운 물. 범람하던 바닷소리.
나는 대학 공간이 내 안전(眼前)에 펼쳐 보여 준 문학 신천지의 한 극지(極地)를 거기서 보았다. 기성 문인이 아니라 나보다 약간 선배인 학생들이 만들었던 탓으로 그냥 배우기보다는 스스로 탐험해야 할 숙제로, 「정사」는, 그리고 『언어탐구』 전체가 내 앞에 던져져 있었다. 나는 소년기부터 품에 간직해오던 문학의 화첩이 부욱 찢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그 찢긴 틈새를 통해 열린 새로운 세상은, 아직 내가 그 열쇠를 찾지 못했기에 완강히 침묵하고 있는, 아니 차라리, 사천대왕처럼 힐난처럼, 냉소처럼 비틀고 있는 어둠의 입이었다. 그 입이 열려야 사랑이든 투쟁이든 발견할 터이지만, 나는 저 비틀린 입술 위로 날아갈 날개를 달고 있지 않았다.
몇 달 후 나는 불문과로 진입하였고 진입생 환영식을 받았다. 그리고 이인성 형을 거기서 처음 보았다. 꼿꼿하게 비쩍 마른, 그러나, 어딘가 한없이 흔들리고 그 흔들림이 알 수 없는 빛조각들을 자꾸 뿌려대는 은사시나무 같은 사내였다. 그래, 저런 꼬락서닐 줄 알았어, 얼마나 자기를 학대했으면 저렇게 피골이 상접했을까?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나중에, 다음 해에 죽은 친구 백승룡이 나를 업고 가야만 했을 정도로 엉망으로 취한 상태에서 나는 이인성 형에게 무어라 중얼거렸던 것 같다. 『언어탐구』에 평론을 실었던, 방위복을 입고 술자리에 나타났던 권오룡 형에게도 뭐라고 주정을 해댄 것 같다.
그러나 그 날 이후에도, 그와 혹은 그들과 얘기를 나눌 기회는 좀처럼 갖지 못했다. 이인성 형이 바로 군대에 입대했기 때문이었다. 설혹 교정에서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다 하더라도, 내 수줍음, 혹은 내 이기주의는 여전히 그로부터 나를 멀찍이 떼어놓기 일쑤였을 것이다. 속마음이 있으면 거꾸로 무심한 척하거나 심지어 적의를 드러내는 공격적 방어기제가 지나치게 발달한 비뚤어진 존재가 나였다.
그러니 그가 먼저 찾아올 수밖에 없었으리라. 타인을 받아들일 품은 너그러운 자에게만 마련되어 있는 법.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입학하기 직전의 어느 날 그가 술병을 들고 내 하숙방으로 놀러왔던 것이다. 접는 간이 술상 겸 앉은뱅이 책상에 소주와 노가리를 놓고 우리는 대여섯 시간쯤 뭔가를 떠들면서 대취해가고 있었다. 비좁은 하숙방이 저절로 출렁거렸다. 내가 그때 그렇게 아득히 느끼던 저 비틀어진 입술은 실은 ‘술취한 배’였다. 지금도 랭보의 시집에 자주 손이 간다면, 그것은 내가 정말 그 배를 타보았기 때문이리라.
이인성 형과의 선사시대는 그렇게 마감하였다. 그와 내가 급속하게 가까와지고 마침내 이성복 형까지 함께 무크지 『우리 세대의 문학』을 창간하고 그리고 미운 정 고운 정이 쌓일 대로 쌓인 평생의 동반자로 함께 살아온 역사의 ‘작은 폭발(litte bang)’이 있기 직전의 암흑의 시공간이 그렇게 해서 스르릉 닫혀갔다. 아니다. 저 선사시대가 그냥 닫힌 건 아니다. 그것은 가장 고요한 태풍의 눈처럼 가장 깜깜한 역사의 눈이 되었던 것이다. 그게 없으면 우리의 작은 역사가 애초에 시작되지도, 이렇게 전개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눈은 이인성 형에게는 아마도 마음 고생을 여는 통로이었을 것이다. 내게는, 그러나, 행운을 여는 통로가 되었던 것이다. 장래의 가장 독특한 소설가와 문학 수업 시절을 보낼 수 있는 행운은 쉽게 찾아오는 게 아니다. 그런데 나는 그 희박한 확률 속에 포함되었던 것이다. 그 뿐이랴. 나는 또한 가장 독특한 장래의 시인도 그때 만났고, 무엇보다도 평생을 내가 그이의 발치에서 놀아야 할 선생님도 만났다. 그러니, 어떻게 내가 “억세게 운이 좋은 사내”임을 부인할 수 있으랴.

* 충남대 불문과 교수이기도 한 비평가 정과리는 『문학, 존재의 변증법』, 『존재의 변증법 2』, 『스밈과 짜임』, 『무덤 속의 마젤란』, 『문명의 배꼽』 등의 평론서를 펴냈다.
(2000. 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