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앤트워프 생각 | 고종석 |

파리의 북역에서 암스테르담행(行) 고속 열차를 타면 첫번째 정류장이 브뤼셀이고, 두번째 정류장이 앤트워프다. 정확히 말하면 그 두번째 정류장은 앤트워프 바로 남쪽에 붙어있는 베르헴이다. 일반 열차는 앤트워프 중앙역에 서지만, 고속 열차는 베르헴에만 선 뒤 네덜란드로 떠나가 버린다. 파리에서 앤트워프-베르헴까지 걸리는 시간은 얼추 세 시간. 파리-암스테르담 노선에 고속 열차가 없었던 95년 이전에 견주면 소요 시간이 한 시간 가량 줄었다.
유럽의 도시 가운데 내가 가장 익숙한 곳은 파리지만, 그 다음으로 익숙한 곳은 앤트워프다. 지금도 그 도시의 거리들을 또렷이 그릴 수 있다. 중앙역에서 스헬데강까지의 간선도로를 나는 적어도 1백번 이상 걸었을 것이다. 스헬데 강의 수원(水源)은 프랑스 북부에 있다. 스헬데의 프랑스어 이름은 에스코다. 앤트워프의 스헬데강과 대성당 주변의 카페들에서 나는 30대 후반의 상당 부분을 흘려 보냈다. 앤트워프는 플랑드르 지방에서 가장 큰 도시다. 제2차세계 대전이 끝난 뒤 브뤼셀이 프랑스어 사용자들에게 ‘점령’된 뒤, 이 도시는 네덜란드어 사용자들의 명실상부한 수도가 되었다. 이 도시 사람들은 앤트워프를 안트웨르페라고 부르고, 프랑스어를 쓰는 남서쪽의 벨기에인들은 앙베르스라고 부르지만, 나는 앤트워프라는 영어 이름을 좋아한다. 앤트워프라고 불러야 앤트워프 같다.
이 도시는 유럽 제일의, 실질적으로는 세계 제일의 다이아몬드 도시다. 중앙역 앞에는 보석상점들이 길게 늘어서 있고, 한 블록 떨어진 곳에는 세계 다이어먼드의 시세를 결정하는 이른바 다이어먼드 구역이 있다. 양끝에 무장한 사설 경비원들이 지키고 서 있는 이 구역에는 굴지의 다이어먼드 상인들과 가공업자들이 둥지를 틀고 하루 스물네 시간 빛나는 돌들을 만지작거린다. 중앙역과 연결된 지하철역 이름도 디아만트(다이어먼드)다. 앤트워프의 다이어먼드업계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유태인들이다. 앤트워프가 세계 다이어먼드업의 중심이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다. 그 전까지는 암스테르담이 지금의 앤트워프 역할을 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암스테르담에서 나치에게 험한 꼴을 당한 유태인들이 대전 이후 앤트워프로 대거 몰려오면서 다이어먼드업까지를 등에 지고 왔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다이어먼드 때문에 앤트워프에 반한 것은 아니다. 앤트워프의 신시가에는 ‘벨기에 거리’라는 길이 있다. 그 거리에 카렌이라는 여자가 산다. 다이어먼드 전문가다. 그러나 돈은 별로 못 모았다. 앞으로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는 그랬다. 벌기는 꽤 벌었으나 번 족족 남 좋은 일만 시켰다. 삶이 순탄치가 않았다. 한 번 결혼했고, 한 번 이혼했다. 아이는 없다. 다섯 개 언어를 유창하게 하고, 일년 중의 반은 벨기에 바깥으로 출장을 다닌다.
1900년대의 마지막 가을에 나는 앤트워프에 잠깐 들렀다. 우연히 내 생일이 그 기간에 떨어졌다. 카렌은 그 날 저녁 나를 시내의 한 일식집으로 데려가 스키야키를 사주었다. 대성당 앞의 한 라이브 카페에 가서 우리는 칼바도스를 홀짝거렸다. 카렌의 공작(工作)으로 가수는 <해피 버스데이 투 유>를 불렀다. 사람들이 나를 일으켜세우고 요란스럽게 박수를 쳐 나는 약간 어색했지만, 그런대로 견뎌냈다. 그리고는 그 가수에게 <유 민 에브리싱 투 미>를 신청해서 모두 함께 불렀다.
우리 둘은 함께 파리로 왔고, 나는 북역에서 그를 돌려보냈다. 늘 그랬듯이. 유럽을 떠올리면 앤트워프가 생각나고, 앤트워프의 벨기에 거리에 사는 카렌이라는 여자가 생각난다. 파리 북역의 을씨년스러운 하늘도.

* 소설가이며 에세이스트이고 한국일보 편집위원이기도 한 고종석은 소설집으로 <<기자들>>, <<제망매>>를, 한국어에 관한 에세이집으로 <<감염된 언어>>, <<언문세설>>, <<국어의 풍경들>> 등을 펴냈다.

(200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