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마음 어귀에 광장 하나 | 이응준 |

이인성의 해골 같은 파사드를 생각한다
ㅡ함성호,「밀봉 열차」중에서

어쩌다가 문득, 이런 식의, 그에 대한 상상에 사로잡히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나는 뜬 눈으로, 이런 풍경을 그린다. 텅 빈 광장 한복판의, 물이 뿜어져나오지 않는 분수대의 낮은 턱에, 그가 고요히 걸터앉아 있다. 그는 방금 눅눅했던 어느 거리를 지나쳐왔다. 그는 누군가에게로 때늦은 엽서를 쓴다. 그가 호주머니에서 레몬을 꺼내 한입 베어물자, 해가 구름 사이로 드러난다. 외로운 사람일수록 세상은 더욱 괴롭게 가두는 법이다, 라고 그는 적는다. 이 후회로 가득찬 엽서 같은 인생에서는, 아무도 서로가 서로를 탓할 수 없다고도 그는 적는다. 그는, 가깝고 먼 시멘트 바닥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많은 물체들을 본다. 무엇인가? 비둘기들. 참새들이 몰락하자, 도시는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들에게 점령당했다. 이 시대의 계엄군은 비둘기들이다. 날개를 하늘에서 사용하지 않고, 그저 오르내리는 계단쯤으로 여기는 저 비둘기떼다. 그는 그런 감회 역시 기입한다. 그는, 그의 육체를 빼어닮은 가늘고 메마른 담배를 꺼내 피워문다. 그는 자코메티의 어둡고 쓸쓸한 작품 같다. 청춘. 담배연기를 뱉어낸다. 청춘. 등대 쪽으로는 감히 외롭다는 말 하는 게 아니라고. 다만 밤바다에 배 가듯 칠흑에 몸을 띄워 없는 길을 만들어 가는 거라고. 자꾸 힘들다는 말 입에 담지 말라고. 그저 등대 쪽으로 우선은 빛을 찾아 애써 죽음을 향해 가듯 생각을 멈추어야 한다, 고 그는 믿는거다. 어쨌거나 청춘은 아직 그의 곁에 있다. 그가 시를 사랑하는 한 그는 청춘이다. 청춘은 청춘이어서가 아니라, 청춘에 관하여 노래할 수 있기에 청춘이다. 그는 항상 내일 죽을 아련한 예감으로 시를 읽는다. 하루, 이틀, 사흘, 매일 읽는다. 그는 바라봄이 아프다. 그는 꽃나무 한 그루만 서 있는 정원이다. 주여 용서하소서, 그는 그가 아름다움을 훔치기 위해 저지르는 모든 죄를 당신보다 잘 아나이다. 이곳은 광장. 약속을 하지 않았지만, 그가 내 머릿속으로 가로질러 나타났다. 그는 아주 많이 취한 듯 해도, 부질없는 농담을 늘어놓다가도, 바람처럼 자취를 감춘다. 그는 설혹 외지고 허름한 술집에서, 이름밖에는 모르는 사람들과 히히덕거린다 하더라도, 그뿐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그를 잊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있다고 우겨도, 뭐 어떠냐고 생각한다. 그는 아주 가느다란 촛불처럼 생긴 자신의 운명을 충분히 알고 있다. 그는 누구인가? 펄럭이는 파란 물고기의 깃발 같은 아가미. 어제 버린 애인의 손에 꼭 쥐어져 있던 고통의 꽃다발. 병든 천둥이 쇠북치는 창문. 피묻은 소년이 묻힌 모래구덩이. 謹弔와 크리스마스 카드. 철탑 위로 올라간 낯설고 검은 짐승. 저 뜯기고 해어진 날들이, 상처입은 가슴의 먹장구름 아래로 내던진 회중시계 아닌가. 그는 투덜거리기보다는, 차라리 그를 떠나려는 사람들의 얼굴을 잔에 담아 마신다. 그는 그런 부류의 사나이다. 그가 아무도 없는 광장에 왔다. 길 끝의 작고 누추한 방을 향해 차례로 불켜지는 저녁 가로등처럼. 나를 똑똑 두드리는 그는 누구인가? 그는 곧 불어닥칠 자신의 가슴아픈 사랑을 한 번도 마중나간 적 없다. 그런데도 그가, 스스로 자신을 나타내었다. 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피뢰침 같은 등을 보이며,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어디론가 걸어간다. 메마른 분수대를 떠나 광장을 벗어난다. 홀연, 그의 외투의 심장 부근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그것은 주머니난로처럼 따뜻한 시의 불빛이다. 외롭기로 작정한 그의 마음이다. 나는 눈을 감고 애써 외면한다. 그가 뒷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강하고 고독한 영혼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가 잠시 머물다 떠나간 그 광장엔, 그리하여 이제 아무도 없고, 그는 집이거나 집이 아닌 곳을 향해 걸어갔겠지만, 그럼에도 그는, 스스로의 집을 부정하며 굳이 혼자이기를 자청할 것이다. 시의 날갯짓처럼, 고통의 쉼표가 아주 많아 아름다운, 문 밖의 바람 같은 어떤 문장처럼.

* 시인으로 시작해 소설가로 더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이응준은, 시집 <<나무들이 그 숲을 거부했다>>, 장편 및 중단편집 <<느릅나무 아래 숨긴 천국>>, <<달의 뒤편으로 가는 자전거 여행>>, <<내 여자 친구의 장례식>> 등을 펴냈다.

(2000.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