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과연 인생의 오버액션이란… | 성기완 |

팔뚝에는 징을 박은 팔찌를 하고 있고, 귓불은 맨 위에서부터 아랫까지 후루룩 미싱으로 박은 듯이 귀걸이가 촘촘, 그리고 머리는 모히컨 족 전사처럼 가운데만 남겨두고 다 밀어 버렸고 색깔은 주황색, 찢어진 가죽 바지에 사나운 표정, 그러나 나이는 아무래도 어려 보이고 체격도 가녀린 가수가 무대에 나와 노래를 한다…
그의 노래는 몹시 자기과시적이다. 잘 안들리지만 가사도 대강은 “우리에게 미래란 없어, 너희들의 세상이 내게 해준 건 뭐야, 나 까부는 데 니가 보태준 거 있어” 하는 식이다. 공격적이고 역시 자기과시적이다. “그래, 너 잘났다, 넌 잘나서 그렇게 넥타이하고 버젓이 회사 다니고, 난 못나서 요렇게 지랄이다.” 뭐, 이런 식. 우리에게 잘 알려진 ‘펑크(punk)’라는 장르의 겉모습을 조금 패턴화시켜 묘사해 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 까발림에서 시원함을 느낀다. “맞아, 저건 내 현실이야. 나에게도 미래가 없어.” 또 어떤 사람은 그 까발림에서 거북함과 답답함을 느낀다. “왜 저렇게 직접적일까. 난도질당하는 기분이야.” 다른 사람은 그 까발림을 코메디처럼 감상한다. “거 되게 지랄인데. 야, 저 놈들 좀 봐, 볼만하군.” 또 다른 어떤 사람은 “저런 몹쓸 놈들. 싹 다 잡아다가…” 풍으로 반응한다.
이렇게 다양한 반응들 앞에서도 펑크족은 굴하지 않고 하루에 하나씩, 피어싱을 늘리고(귀에서 코로, 코에서 입술로, 혀로, 눈두덩으로, 배꼽으로, 그리고 젖꼭지, 성기로…), 열심히 마약을 하고(그것도 곧바로 중독이 되버리는 헤로인 류), 인생을 되는대로 살고, 무대 위에서 지랄을 한다.
오버액션은 때로 슬프다. 내 생각에 그 오버액션이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분야는 정치와 코메디이다. 그와는 반대로 절대로 오버액션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누구일까? 아마 진지한 철학자와 성철 스님 같은 구도자가 아닐까. 그들에게는 진리 이외의 것은 완전히 무의미하므로 한치의 오버액션이라도 절대로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때로 진지한 예술가들에게도 그건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사뮤엘 베케트의 고뇌 어린 초상을 떠올려 본다. 또 폴 클로델이나 앙드레 지드의 결백한…
그러나 따지고 보면 자기 나름의 오버액션이 없는 인생은 없다. 어떤 사람들은 ‘슈게이징(shoe-gazing)’이란다. 그들은 펑크의 대척 상표쯤 된다. 파리한 얼굴에, 자신감은 도무지 없어 보이는 얼굴, 그러나 그 표정에 어딘지 일말의 경멸이 비친다. 평범한 소년 같은, 아니 어쩌면 좀 멍청해 보이는 소년 같은 옷. 음악은 강렬하고 규칙적인 리듬 대신 몽환적이고 불투명한 노이즈가 강하다. 그들은 신발을 쳐다보면서 노래를 하기 때문에 슈게이징인데, 오버액션하기 싫다는 생각을 극단적으로 오버액션하고 있다.
그들과 펑크는 정반대의 태도를 표명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찬가지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너희들이 못마땅해”의 두 표현 방식이다. 어떨 때는 슈게이징의 오버액션이 덜 솔직해 보일 때도 있다. 지식인의 자기 표출이 그렇게 보일 때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하는 게 더 멋있어 보이니까 하는 오버액션이다. 펑크의 자기 파괴에는 순진한 면이 있고 그래서 어느 의미로는 오버액션이 아닐 수도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분명히 오버액션인데, 그걸 인식하지 않은 자아의 스스럼없는 행동방식이란 면에서는 오버액션이 아니다.
그 모든 걸 다 간직하고서 스스로 몸을 내쳐 우스꽝스러워지는 사람들도 있다. 아마 찰리 채플린이나 몰리에르 같은 사람들이 이 부류에 들 것이다. 과연 인생이란 것 자체가 오버액션의 연속이다. 머리 아프다고 픽 쓰러지는 마누라나 바깥으로 괜히 빙빙 도는 남편이나 다 마찬가지. 그러나 어쨌든 그들의 오버액션에도 진실이 있다. ‘불만’이 있는 것이다.

* 대중음악 평론가이자 인디 뮤직 아티스트로도 활동하고 있는 성기완 시인은, 시집 <<쇼핑 갔다 오십니까?>>, 음악 입문서 <<재즈를 찾아서>> 외에, 인디 음반 <<스케치북>>(’99’라는 밴드명으로), <<나무가 되는 법>> 등을 펴냈다.
(2000.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