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고향 |최시한|

요새 사람들은 별로 고향을 묻지 않는다.
누구를 만나면, 특히 젊은이가 인사를 드리면 어른이 하시는 첫 말씀이 성씨가 무엇이고 본관이 어디며, 부친은 무엇을 하는 분인가로 아예 정해지다시피 한 시절이 있었다. 내가 크던 육십 년대와 칠십 년대는 좀 달라서, 흔히 상대방의 고향을 물었다. 명절 때면 고속도로를 가득 메우는 내 또래들, 도시로 도시로 모여들어 이제는 한 가정을 이룬 그 사람들은, 삼등 열차 안에서 서툰 서울말로 이렇게 묻곤 했었다. 고향이 어디세요? 만약 자기 고향과 가까운 곳이면 어깨라도 칠 듯 반색을 하면서 대뜸 사투리를 썼다. 얼라? 알구보니께 내 사촌허구 한 동네 사람일세!
내 고향은 충남 보령이다. 보령시 북쪽 끝의 청소면 장곡리인데, 장곡리에 속한 마을들 가운데 바다 가까운 ‘간사지’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5학년까지 살았다. 아니, 옛날 그 집에 지금도 형님과 어머니께서 살고 계시고, 일 년에 몇 차례씩 다니러 가곤 하니까, 아직도 나는 그곳에 ‘살고 있다’.
사전에는 간사지가 간석지(干潟地) 곧 개펄을 잘못 부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다. 이름대로 그곳은 개펄을 간척하여 땅이 생기자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들어 생긴 바닷가 마을이다. 지금도 눈에 선한 딸구만이네 옴팡집, 대낮에도 노상 컴컴하던 똥섬의 근식이네 다 쓰러져 가는 집, 방조제 가에 위태롭게 붙어 있던, 어느 날인가 갑자기 생긴 성냥갑 만한, 하지만 그 집 계집애는 기막히게 예쁜 옷을 입었던 가겟집…… 그런 집들의 마을이었다.
하지만 나한테 고향은 결코 가난한 곳이 아니다. 바다와 농지를 가르는 방조제 끝에는 커다란 수문이 있었다. 수문 앞에는, 죽은 쥐를 먹은 동네 개들이 그 주검에 남아 있던 독 때문에 속이 타 죽을 때면 언제나 달려와 몸을 던지던, 검푸른 물이 고여 있었다. 좀 만만해 보이는 얕은 물가나 수로 쪽 둑에서, 여름이면 우리는 망둥이 낚시질을 하다가 멱을 감곤 했다. 멱 감기도 재미가 없어지면 파래를 뜯어 먹기도 하고 모래펄에 숨어 있는 재첩을 잡았다. 사리 때는 방조제를 넘어 과감히 개펄로 진출했다. 모랫등을 따라 한참 내려가 호미질을 하면 바지락이며 소라가 무진장 불거져나왔다. 힘겹게 들고 온 조개 바구니를 토방에 내려놓으면, 낙지 구덩이에 빠지면 어쩌려고 거긴 갔었느냐고, 어머니는 칭찬보다 먼저 걱정을 하셨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이라든가 이청준의 <눈길> 같은 이른바 귀향소설들에서 고향은 회한이 고여 있는 곳이다. 나 역시 그러하지만, 그보다 먼저 나한테 고향은 곧 부모님이자 자연이다. 누가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나는 금방 부모님의 어린 자식이 되고 자연의 품에서 뛰노는 아이가 된다. 몸이 따스해지고 눈에 광채가 돌면서, 사람이 영 달라지는 느낌이다. 그런데 점점 고향을 묻는 이가 드물어지는 것이다.
주위에는 부모님이 돌아가시거나 형제가 다 떠나버려 고향이 없어진 사람들이 많다. 대도시에서 자란 젊은이들은 애초부터 고향이 없는 듯하다. 그들은 아파트에서 아파트로 이사를 다니던 기억만 지닌 채, 시멘트와 유리의 벽에 붙은 난잡한 포스터 사이를 무표정하게 걷다가, 나를 힐끗 보며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고향이라면, 시골을 말씀하시는 거죠? 도시도 고향은 고향이지만 우리야 뭐…… 그런데 시골에 뭐가 있다고 그러시는지 모르겠군요. 너무 과거에 집착하시는 거 아닙니까?
고향이 없어진 사람들, 고향이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고향 이야기를 하고 싶은 나는 쓸쓸하다. 작년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방조제 밖에 또 방조제가 생겨 그 고향 바다도 사라져버렸다. 머지 않아 나한테도 고향은 마음속에만 남아 있는, 떠들어 보는 이조차 드물어 곱게 삭아 가는, 그런 풍경화 비슷한 것이 되고 말 게 분명해서 더욱 쓸쓸해진다.
그러다가 가끔, 나서 자란 곳 말고, 내가 고향으로 삼을 곳을 지금껏 찾지 못했다는 그런 생각이 들어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 숙명여대 국문과 교수이기도 한 소설가 최시한은 소설집으로 <<낙타의 겨울>>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을 펴냈다.
(2000. 4. 10)